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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란도란 Sep 10. 2024

창백한 기억의 익사

<피플스 편집장 & 진혜원 이야기>


<프롤로그 - 진혜원의 기억>


하나의 기억은 또 다른 기억까지 잡아끌어 올린다.

그는 기억하고 있으나 는 잊어야만 살 수 있었던 기억. 기억 앞에 여전히 우는 아홉 살 어린아이였다.


사람들은 가장 강렬한 기억을 잊지 못한다.

나는 연약한 기억들을 가까스로 부여잡고 살아간다. 가장 강렬한 기억이 어떤 칼날로 나를 찌를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열일곱, 엄마가 첫사랑과 떠나던 날이 그랬고

스물하나, 형이 암벽에서 떨어지던 날이 그랬다.

그를 다시 만났고 하나의 기억이 칼날을 벼르고 있었다. 가장 오래되고 가장 서슬 퍼런 날이었다.




편집장이 나를 빤히 보며 말했다.


  "네가 첫사랑 맞아. 그 고백이 처음이었어. 그때 난 열세 살이었고 선명히 기억해. 한국 떠나기 전 마지막 기억이니까."


고백이었다. 오랜 시간을 흘러 건너온 첫사랑 고백. 나는 고백을 듣자마자 번득이듯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와우! 편집장님, 신박한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피플스의 가을 특집호가 <명사들의 실연 이야기>니까 내년 봄 특집호는 <명사들의 첫사랑 이야기> 어때요?"


  "진혜원, 말 돌리기 천재네."


  "네! 실연은 너무 슬퍼요. 풋풋하고 달달한 첫사랑 취재하고 싶어요. 첫 인터뷰이로 선정후 당첨!"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팔을 쭉 뻗어 손가락으로 편집장을 가리키며 웃었다. 편집장이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근데 넌 왜 크다 말았니? 아홉 살 때 꽤 컸는데."


  "말 돌리기는 오빠가 더 선순데. 내 성장은 열두 살에 멈추었지. 지난 삶이 꽤 고달팠다고."


  "그래서 나도 잊은 거야?"


  "아홉 살 때 열병을 몇 달 내리 앓았어. 우리 할머니 말로는 내가 아프고 나더니 애가 싹 변했대. 그전에는 말 새끼처럼 천방지축이었는데 앓고나서 천생 여자가 됐다고. 사고의 충격으로 아팠다는데 그 이전 기억들이 거의 없어."   


편집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서류 봉투 하나를 쓱 내밀었다.


  "지금부턴 고달프지 않을 거야. 오늘 너 입사한 지 두 달 째야."


  "앗, 벌써? 일을 너무 열심히 했어. 오늘을 잊다니!"


  "진혜원 씨, 사규상 채용에 결격 사유가 없으므로 오늘부로 수습기자가 아닌 정규직으로 전환하겠습니다. 근로계약서 작성하시죠."


계약서를 쓰고 기분 좋게 돌아온 그날 밤, 나는 오래된 기억을 꿈에서 만났다. 소리 내어 울 수조차 없이 아픈 기억. 익사되어 사라진 줄 알았던 창백한 기억이었다. 서슬 퍼런 기억의 칼날에 마음은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장마가 막 시작된 하지였다. 태양은 가장 높이 떴고 맑은 하늘에는 먹구름이 불청객처럼 수시로 찾아다. 그날도 해를 품은 먹구름이 몰려온 날이었다. 먹구름이 한바탕 굵은 장대비를 쏟아부은 후 햇살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혜원과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는 앞말의 산등성이에 있었다. 앞말에 가기 위해선 너른 개울을 하나 건너야 했다. 어른들이 놓은 큼지막한 바위들이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여름의 중심으로 갈수록 하루하루 개울물은 고 물살도 거세졌다. 한 번만 더 비가 쏟아지면 이곳으로 올 수 없었다. 징검다리가 물에 잠길 테고 한참을 돌아서 학교에 가야 했다.


하교 후에 혜원, 혜원의 동생과 셋이서 개울가에 놀러 갔다. 징검다리에 물이 찰방찰방거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평화로운 오후였다. 우린 개울가에 신발을 벗어놓고 징검다리 위를 사뿐사뿐 오갔다. 오전에 한바탕 내린 비로 물은 맑고 차가웠다. 불행과 사고는 한순간이었다. 혜원의 동생이 발을 헛디뎌 물에 빠졌고 순식간에 물살에 휩쓸렸다. 혜원이 놀라 물에 뛰어들려고 했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에 여름의 개울은 한껏 몸집이 불어 있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혜원을 붙잡았다.   

   

  "안돼! 들어가면 안 돼. 내가 얼른 가서 어른들 불러올게. 기다려. 꼭!"      


마을회관은 손에 닿을 듯 가까웠다. 개울의 둔덕 위에서 어른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내달리며 소리쳤다.    

  

  “사람 살려! 살려 주세요. 아이가 물에 빠졌어요. 살려 주세요!”     


내 목소리를 들은 모두가 개울가로 달렸다. 혜원은 기어코 동생을 구하기 위해 개울에 몸을 던졌고 저만치 떠내려가고 있었다. 가까스로 혜원을 물에서 건져 올린 어른들은 서로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혜원의 안색이 창백했다. 의식이 없었고 바로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갔다. 혜원의 동생은 이미 거센 물살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혜원의 아버지와 마을의 모든 어른들은 개울의 하류로 내려가 거슬러 올라오며 혜원의 동생을 찾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놀던 곳이라 개울의 지형을 잘 아는 어른들은 채 1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움푹 파인 곳에서 혜원의 동생을 건져냈다. 창백할 대로 창백해진 어린 소녀의 자그마한 몸이 개울 밖으로 들려 나왔다. 누군가 가녀린 소녀를 들쳐 안고 리어카에 뉘었다. 혜원의 아버지가 달음박질로 리어카로 다가와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유원아... 아가... 흐윽... 숨 좀 쉬어 봐. 응? 숨 좀 쉬어 봐. 유원아...”     


혜원의 아버지는 절규하며 가녀린 소녀의 등을 세차게 두드렸다. 귀를 소녀의 코에 가까이 대기도 하고 입안 가득 바람을 불어넣기도 했다. 아버지의 간절한 몸부림에 창백한 소녀가 금방이라도 일어나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끝내 혜원의 동생은 깨어나지 못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나와 함께 징검다리를 건너던 어린 소녀는 그 짧은 시간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갔다.


며칠 뒤 병원에서 돌아온 혜원은 수척했다. 나는 혜원을 보자마자 그날 물에 떠내려가던 모습이 떠올랐다. 혜원마저 잘못되었다면 나는 고통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혜원이 살아줘서 고마우면서도 버럭 화부터 냈다.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뛰어들었어."


혜원은 나를 보곤 울음을 터뜨렸다. 늘 크게 소리 내어 울던 아이가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흐느껴 울었다.


  "동생이... 흐윽... 떠내려 가잖아..."


내가 어리석었다. 혜원이라면 기어이 뛰어들걸 알면서도 혼자 두고 마을회관으로 달렸다. 어른들을 불러오지 않고 내가 뛰어들었더라면 혜원의 동생을 살릴 수 있었을까. 다 내 잘못인 것 같았다. 건강했던 혜원은 그 사고 후 한동안 열병을 앓았다. 나는 여름내 혜원을 만날 수 없었다. 대문 앞에 서서 굳게 닫힌 혜원의 방문 창호지를 몇 시간씩 바라보는 게 그해 여름 나의 하루 일과였다. 지난봄에 혜원이 엄마와 함께 창호지 사이에 넣은 누름 꽃들이 보였다. 봄의 들꽃들은 여름의 습기를 머금고 다시 말라가며 빛이 바래갔다. 혜원이 방문을 열고 함박 웃으며 나오는 모습을 수없이 상상했다. 길었던 장마도 무더운 여름도 그렇게 흘러갔다.

      

일순간 매미 소리는 사라지고 귀뚜라미 소리가 지천으로 울리던 날, 나는 그토록 바랐던 서울로 다시 돌아왔다. 바라던 일이었으나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혜원 걱정에 얼른 향리골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정해진 수순처럼 나는 바로 출국해야 했다. 다음 해 여름 향리골을 다시 찾았을 때 혜원은 그곳에 없었다. 동생을 잃은 얼마 뒤에 혜원 아버지의 빚보증이 잘못되어 남의 손에 집이 넘어갔다는 할머니에게 들었다.


  "그 많던 전답도 다 팔고 읍내로 쫓겨가듯 이사 갔단다. 여식도 몇 달을 내리 앓더니 병색이 짙고 혼이 다 빠진 것 같았지. 보름달처럼 땡그라니 건강하던 애가 이사 가던 날 보니까 얼굴이 반쪽이 됐더구나."


이야기를 전하는 할머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는 그날부터 혜원을 떠올리며 수없이 자책했다. 그 뒤로 14년을 만날 수 없었다. 혜원 앞에 차마 나타날 수가 없었다. 그해 여름, 빛이 바래갔던 들꽃들처럼 너의 슬픔도 바래길 바라고 또 바랐다.  


 UnsplashEvie S.



<에필로그 - 선정후의 기억>


혜원은 추석맞이 향리골 노래자랑에서 인기상을 탔다. 무대 위 혜원의 모습이 여름 햇살처럼 쨍하니 밝아 보였다. 부상으로 라면 한 박스를 받아 무대 아래로 내려왔고 그 남자를 보자마자 활짝 웃으며 "미노미노"라 불렀다. 올려다 본 하늘의 보름달이 유독 더 커 보였다. 밝은 달빛이 쏟아져 내렸고 그 아래에서 둘은 사진을 찍었다. 달빛 아래에서 혜원의 눈은 별처럼 반짝였다. 눈물을 머금고 있던 것일까. 그날 밤, 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빛나고 있었지만 나에게 별은 혜원 하나였다.

 

  '내 마음속에서 빛을 잃은 적 없이 늘 반짝이던 너, 내 별은 오직 너 하나뿐이야.'  


  참 오랜 시간을 후회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때 혜원이 아니라 내가 물에 뛰어들었더라면...

  그때 내가 더 빨리 마을회관에 뛰어갔더라면...

  후회 속에서 나는 간절히 바랐다.  

  앞으로 너에게 닥칠 시련들이 있다면

  모두 다 나에게 오게 해달라고.     

  너에게 장마 같은 기억들이 몰아쳐

  또다시 아파해야 한다면

  너의 시련까지 내가 모두 끌어안겠다고. 


지나간 시간은 추억 속에 묻히면 그만인 것을
나는 왜 이렇게 긴긴밤을
또 잊지 못해 새울까
창틈에 기다리던 새벽이 오면
어제보다 커진 내 방 안에
하얗게 밝아온 유리창에
썼다 지운다 널 사랑해
밤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별들
저마다 아름답지만
내 맘속에 빛나는 별 하나
오직 너만 있을 뿐이야

- 김광석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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