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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란도란 Sep 03. 2024

부지깽이를 들고 말새끼라 외쳤던 너

<피플스 편집장 이야기>


 <프롤로그>     


한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기억이 있다.

오래된 기억들이 잊히지 않고 내 안에서 빛을 낸다.

반짝이는 기억들은 세월의 흐름에도 빛을 잃은 적이 없다.

그리울수록 더욱 선명히 빛을 내었다.

그 기억 속에 네가 있었기 때문이다.    




   "진혜원, 넌 언제까지 나 모르는 척할 거야?"  


편집장은 내가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줄 알지만 난 정말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렸을 적 향리골에서 살던 기억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어떤 기억들은 남아있지 않아 다행이기도 하다. 나는 어린 시절의 슬픈 기억들은 그 어떤 것도 남기지 않았다. 슬픔은 기억하는 자들의 몫이다. 편집장이 내 기억 속에 없다는 건 그도 내겐 슬픔이었다.  

 

  "편집장님, 죄송하지만 기억이 나질 않아요."


편집장은 아무 말이 없었다. 집 근처에 도착했고 편집장은 차에서 내려 집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함께 걸으면서도 편집장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편집장의 눈빛은 분명 낯이 익고 우린 함께 한 시간들이 있었다. 나는 무엇이 두려워 그를 잊은 것일까. 그는 내게 어떤 슬픔이었을까.    




연두 작가는 등단 후 처음으로 휴재를 통보했다. 연재 하루 전날에 마케도니아로 출국했다. 우리가 2차 인터뷰를 하기로 약속한 바로 전날이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편집장은 우선 사무실로 출근하라고 했다. <피플스>의 보라색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자 편집장이 보였다. 책상에 앉아 한 손을 이마에 대고 눈을 감고 있었다.     


  "편집장님, 어쩌죠? 서면 인터뷰라도 진행할까요?"     


편집장은 내가 바로 앞에 앉았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까부터 계속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미친놈... 결혼한 여자를 찾아가서 뭘 어쩌겠다고... 가라고 떠밀 때는 버티더니 왜 이제서... 제정신이 아니야."

     

  "문자 왔숑! 문자 왔숑!"     


10년 전 휴대폰에서나 들었던 것 같은 알림음이 조용한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편집장의 휴대폰이었다. 편집장은 문자를 확인하더니 그제야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한숨을 깊게 내쉬더니 말했다.        


  "진혜원 씨, 지금 메일 확인해 봐요. 연두 작가가 선물을 보냈답니다. 진혜원 씨랑 나에게 보내는 선물이라는데, 이건 또 뭔 헛소릴까요? 이 상황에 선물을..."     


나는 자리에 앉아 메일을 열었다. 연두 작가는 정중히 사과부터 전했다. 돌아와서 자초지종은 모두 밝히겠다고. 언제 돌아올지는 미정이라 다음 인터뷰 일정은 약속할 수 없고, 현지 상황에 따라 서면 인터뷰에 응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공항에서 대기하는 동안 급하게 끄적인 시놉시스인데 한번 봐 달라며 첨부파일을 함께 보냈다. 그 상황에 시놉시스를 끄적이는 연두 작가, 그는 프로였다.  


첨부파일의 이름은...


부지깽이를 들고 말새끼라 외쳤던 너. hwp     


제목을 보는 순간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익숙한 단어가 두 개나 있었다. '말새끼'는 내가 어렸을 때 할머니에게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은 말이다. 또 '부지깽이'는 나의 분신이었다. 부지깽이로 주로 맞거나 때렸다. 맞을 때가 좀 더 많긴 했다.   

  

  '이거 난가?'     


아리송했지만 연두 작가가 나의 어린 시절을 알 리가 없다. 파일을 열어 훑어보았다.


배경 : 향리골 마을  
 
등장인물

1. 선정후 - 서울 출생. 천식 매우 심함. 의사의 권유로 시골 할머니댁으로 전학. 비리비리함. 동네 아이들의 놀림 대상. 전학 첫날부터 따돌림 시작. 서울로 다시 돌아갈 날만 기다림.     

2. 진또 - 향리골 출생. 매우 건강함. 또라이라 불림. 명랑 괄괄. 지랄발광. 동네에서 진또에게 안 맞은 애가 없음. 건드리면 무조건 때림. 부지깽이 들고 온 동네 들쑤시고 다님.     

주요 사건 : 선정후 동네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괴롭힘 당하는 중. 진또 부지깽이 들고 동네 쏘다니다가 이 모습을 발견함.    
 
"야잇, 말새끼들아. 부지깽이 맛 좀 볼 텨?"
    
아이들 진또 보고 귀찮아하는 표정임.    
 
"아이씨~ 쟤 또 왔어. 가자. 쟨 건들면 골치 아파."     

아이들 유유히 사라짐. 선정후 진또 보고 놀람. 진또는 황금색 보자기를 망토처럼 걸치고 부지깽이 들고 다가옴.     

"사내자식이 처맞고만 있니? 덤벼야지. 깡이 이렇게 없어서야. 오빠 이래서 험한 세상 살겄나? 쯧쯧. 아가 비리비리한 게 약해빠졌어."   
    
선정후 엉거주춤 일어섬. 진또가 옆으로 가까이 다가가 흙먼지 털어줌.
    
"먼지 봐라. 먼지~ 오빠, 싸울 때는 먼저 앉으면 지는 거야. 고개 빳빳이 쳐들고 노려 보란 말이야. 나 잘 봐."     

선정후, 자기 어깨 남짓 오는 진또를 넋 나간 듯 봄. 노려 보는 표정이 귀엽다 생각함. 선정후 기어들어갈 듯한 목소리로 말함.
    
"고마워."     

"됐다. 이게 뭐 고마울 일이야. 앞으로 오빤 내가 지켜줄게. 난 황금박쥐야. 저 위에 밤나무집 산다. 오빠는 어디 사나? 못 보던 얼굴인데."
    
"대추나무집 비단 할머니네... 난 선정후. 지난주에 전학 왔어."    
     
"우리 할머니집 옆집이잖아! 우와, 앞으로 나만 믿어. 내가 특별히 아무도 못 건드리게 해 줄게. 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     

진또는 비단 할머니집 앞마당에 있는 대추나무와 뒷마당에 있는 감나무에서 대추와 홍시를 자유롭게 따먹겠다고 함. 선정후 동의함. 진또는 그해 가을부터 담벼락에 올라앉아 대추를 대놓고 따 먹음. 선정후와 함께 홍시도 땀. 선정후, 열세 살에 캐나다로 이민. 진또 그다음 해 읍내로 이사감. 둘의 기나긴 이별 시작.  



편집장이 말했다.    

 

  "연두 작가가 뭐래요? 왜 나한테 안 보내고 진혜원 씨한테 보낸 겁니까?"     

  

  "하! 대추나무집 비단할머니, 선정후였어! 너냐?"     


  "너~냐? 진혜원 씨, 왜 갑자기 반말입니까?"     


  "진작 말하지 그랬어. 선정후라고! 얼굴이랑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고."     


  "너 다 기억났구나. 그런데 갑자기?"    

 

  "아니. 연두 작가님이 메일로 보냈어. 근데 이게 왜 선물이지? 그리고 오빤 내 얘기를 다 하고 다닌 거야?"     


  "선물 맞네... 넌 왜 계속 반말이야? 여기 사무실인 거 잊었나 봅니다. 진.혜.원 씨."     


  "우리 원래 말 놨잖아. 오빠 그때 내 부하였어."     


  "무슨 소리야? 내가 왜 네 부하야?"     


  "동네에 다 내 부하들이었지. 나 골목대장 출신이야. 아무도 날 못 건드렸어. 괜히 진또가 아니라고."     


  "잘났다. 진또야. 너 나한테 고백도 했어. 손가락, 발가락 스무 개 몽땅 봉숭아물들여주면서. 기억나?"

   

  "응. 기억나."    


햇볕 잘 드는 봉당에 앉아 봉숭아꽃잎이랑 초록잎을 돌로 짓이겼다. 하얀 명반 알갱이도 몇 알 넣고 같이 이겼다. 안 하겠다는 오빠를 끌어다 앉혀놓고 손가락, 발가락에 짓이긴 봉숭아를 올리고 검정 비닐을 대충 잘라 감쌌다. 하얀 실 뭉텅이를 가져다 입으로 뚝뚝 끊어 손가락 하나하나 동여매 주었다.  

   

  "남자가 이런 거 해도 돼? 창피해."  

   

  "뭐가 창피해? 내일 풀러보고 놀라지 마. 엄청 예뻐. 그리고 봉숭아 물들인 거 첫눈 올 때까지 남아 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했어. 오빠 나한테 고마운 줄 알아."     

  

  "난 첫사랑 없는데. 그럼 할 필요가 없잖아."     

 

  "없긴 왜 없어? 내가 있잖아. 나중에 어른되면 나한테 장가 와. 꼭~ 약속해. 얼른!"  

   

나는 새끼손가락이랑 엄지를 올리고 오빠에게 손을 내민다. 오빠는 마지못해 새끼손가락에 고리 걸고 엄지를 콕 찍어준다. 안 해주면 생떼 부리며 울걸 아니까. 나는 동네의 많은 아이들에게 봉숭아물을 들여주었다. 미래에 시집갈 걱정은 없도록 말이다. 우리 할머니가 그랬다. 나같이 말새끼처럼 천방지축이면 나중에 시집 못 간다고. 말썽 부리고 부지깽이로 얻어맞을 때마다 누누이 들었다. 나는 시집을 못 갈까 봐 어린 시절에 미래 대비를 부지런히 해두었다.


  "다 기억났어. 오빠도 그중에 한 명이었지."     


  "그중? 그럼 나한테만 한 게 아냐? 몇 놈한테 고백을 한 거야?"     


  "싹~ 모조리~ 다 했지. 근데 수확이 영 좋지 못해. 오빠 하나 걸렸네."     


  "이 확신은 뭐야? 내가 걸려든 게 아니면?"     


  "대학 때 만난 친구한테 얘기 다했을 정도면 내가 오빠 첫사랑이지 뭐~ 빼박이야."

     

편집장은 싱겁게 한번 웃었다. 진또였던 시절을 건너 다시 수습기자 진혜원으로 돌아왔다. 이곳은 직장이고 정후 오빠는 나의 상사다. 정규직으로 전환되기 전까지는 조심해야 했다. 수습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연두 작가님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하겠다고 메일 보낼까요? 선.정.후 편집장님."

       

  "그러시죠. 진혜원 씨. 그리고 하던 얘긴 마저 하시죠."

     

편집장이 나를 빤히 보며 말했다.

       

  "네가 첫사랑 맞아. 그 고백이 처음이었어. 그때 난 열세 살이었고 선명히 기억해. 한국 떠나기 전 마지막 기억이니까."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 있다. 하나의 기억은 또 다른 기억까지 잡아끌어 올린다. 그리고 영원히 잊고 싶었던 그 기억까지 스멀스멀 다가오고 있었다. 우린 다시 만나선 안되었다.

 



<에필로그>     


나는 6학년 2학기에 다시 서울로 돌아왔고 캐나다 유학을 준비했다. 부모님은 함께 가지 못했고 나만 가야 했다. 방학 때면 한국에 들어왔고 향리골로 갔다. 혜원은 내가 캐나다로 떠난 다음 해에 읍내로 이사 가고 없었다. 그 사고가 일어나고 혜원의 집은 풍비박산이 났다. 할머니에게 여쭤보면 어디로 갔는지 알 수도 있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혜원이 나를 보며 떠올리게 될 기억들이 두려웠다. 그저 시간이 흐르고 흘러 우연인 듯 다시 만나길 바랐다. 우연은 14년이란 세월을 건너뛰게 했다.    

 

스물일곱, 군 전역을 하고 향리골로 향했다. 혜원도 대학생이 되었을 것이다. 추석 당일이었고 혜원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 밤 마을 회관에서 노래자랑이 열렸고 무대 위에 있는 진혜원을 보았다. 삿갓을 쓰고 할머니 옷을 입고 있었지만 나는 한눈에 진혜원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진혜원은 화려한 꽃무늬 몸뻬를 입고 '밤이면 밤마다'를 부르며 요란한 막춤을 추었다. 삿갓 아래로 보이는 반달눈과 낭랑한 목소리가 어렸을 때랑 똑같았다.     


그러나 그날 무대 아래에서 나만 진혜원을 바라본 게 아니었다. 그 녀석도 있었다.

혜원이 '미노미노'라 불렀던 그 녀석.


    

  혜원은 나의 반짝이는 기억이다.

  세월의 흐름에서도 빛을 잃지 않았던 너에 대한       

  선명한 기억들.

  할머니와 함께 마실 와선 담금주 한 잔

  홀짝이고 '동백 아가씨'를 구슬프게 부르던 너.

  너를 보며 보랏빛 도라지꽃을 떠올렸어.      

  내가 아이들에게 괴롭힘 당할 때

  황금박쥐처럼 나타나 부지깽이를 휘두르던 너.

  그날 나를 올려다본 맑고 검은 눈동자가 예뻤어.       

  단발머리 나풀거리며 들녘을 뛰어다니던      

  노오란 담비 같던 네가 귀여웠어.          

  담벼락에 올라앉아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내가 따주는 대추를 야금야금 먹던 너.

  봉숭아물들여주면서 이담에 크면

  장가 오라고 아무렇지 않게 고백하던 너.


  나는 너와 함께 한 유년의 기억들이 있어

  외롭고 힘들었던 유학생활을 버틸 수 있었어.

  나를 살아가게 한 기억은 너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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