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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란도란 Aug 27. 2024

'빙봉'이 될 수 없어서 안녕!

<웹툰작가 연두 이야기>


대체 어디를 걷고 있는가.
그건 다른 사람의 길이 아닌가.
그러니까 어쩐지 걷기 힘들겠지.   
너는 너의 길을 걸어라.
그러면 멀리까지 갈 수 있다.
 
    - 소설 『데미안』에서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의 빙봉은 주인공 라일리의 행복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희생한다. 빙봉이 사라지며 내뱉는 애절한 한마디는

"나 대신에 그녀를 달나라에 보내줘."였다.

연두 작가는 그녀에게 '빙봉'같은 존재였다.

자신의 존재를 지워서라도 그녀의 꿈을 이루어주려 했다. 그녀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으나 그녀는 마케도니아로 떠났다. 돌아올 거라 믿었지만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연두 작가 더 이상 빙봉이 될 수 없어서 그녀와 이별했다.

      


연두 작가는 그녀가 가는 길이 자신의 길이라 믿었다. 그녀의 꿈이 자신의 꿈이 되었고 함께 걸었다. 나의 세계를 잃고 사랑하는 이의 세계로 너무 깊숙이 들어가면 위험하다. 나를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지워가며 이어가던 사랑의 끝은 이별이었다.  

      

<취재-진혜원 기자>



 

  "아니요. 그녀와 만나면 살이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연두 작가는 그녀와 만나며 40kg이 빠졌다. 대체 뭘 했길래 40kg이나 빠진 것일까 이야기의 시작부터 궁금했다.


  "그녀는 설.밀.탄.튀를 전혀 먹지 않았어요."


  "네? 그게 뭐죠?"


  "설탕, 밀가루, 탄수화물, 튀김! 저흰 사귀는 동안 바깥 음식을 먹은 적이 없어요."


  "설탕이랑 밀가루를 제한하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거의 없을 텐데. 4년을 어떻게..."


연두 작가는 그녀의 철저한 식단 관리로 인해 해독 주스, 견과류, 채소, 지방과 단백질 위주의 식사만 쭉 해왔단다. 식단과 더불어 매일 정해진 시간에 홈트레이닝도 함께 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40kg이 빠질 만큼 치열하게 살았다. 연애 이야기에 식단과 운동이 절반이었다. 연두 작가가 4년이나 이 루틴을 모두 지킨 건 그만큼 그녀를 사랑했기에 가능했다.         


그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방으로 갔다.


  "저녁마다 먹는 식단이 있는데 같이 드시죠. 제가 6시 전에 식사를 끝내야 해서요."


해독 주스를 마신 지 3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연두 작가는 식사를 같이 하자고 했다. 이미 오후 5시가 훌쩍 지났다. 인터뷰는 계속 지체되었다. 연두 작가는 냉장고에서 살코기 한 덩이를 꺼내 숭덩숭덩 썰었다. 그리곤 끓는 물에 넣어 삶았다. 물에 빠진 살코기였다. 고기는 굽거나 튀기거나 볶거나 양념해서 먹는 것이 진리다. 그녀가 남겨놓고 떠난 철저한 식단 관리는 실연 후에도 이어지고 있었다.


  "너나 먹어. 우린 인터뷰 끝나고 알아서 먹을 테니까."


편집장은 볼멘소리를 하면서도 바닥에 앉았다. 우리 셋은 다시 바닥에 앉아 접시에 숭덩숭덩 놓인 살코기들을 마주했다. 옆에는 양은그릇에 드레싱소스 없이 샐러드만 수북이 담겨 있었다.


  "드세요. 천천히 씹다 보면 육즙도 나오고 먹을만합니다."  


물에 삶은 고기를 소금에 살짝 찍어 질겅질겅 씹으며 인터뷰를 이어갔다. 마음의 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매일 이렇게 먹으면 턱이 발달할 것 같아요. 하하하."


연두 작가가 "풉!"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좀 질기긴 하죠. 진혜원 기자님은 가만 보면 그녀를 꽤 닮았어요."


잠자코 앉아만 있던 편집장님이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었다.


  "닮긴 뭐가 닮아! 생김새부터 다른데."

 
  "이게 발끈할 일인가? 솔직함이 닮았지. 자기감정을 숨기지 않잖아."

 
  "발끈한 건 아니고 허튼소리 말고 인터뷰에나 집중하란 거야. 벌써 6시가 넘었어. 이래서 언제 끝내냐?"

  
  "자자, 두 분 그만하시고 인터뷰 얼른 이어갈게요. 연두 작가님, 그녀와의 만남부터 얘기해 주세요."


연두 작가가 그녀를 처음 만난 애니마는 학과의 소모임 동아리였다. 거의 매일 저녁 동아리방에 모여 만화를 그렸다. 상당한 미인이었던 그녀는 인기가 많았고 동아리방으로 많은 남자들이 찾아왔다. 그녀는 매우 귀찮아했다. 그날은 연두 작가의 학과 동기가 동아리방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여러 차례나 차였음에도 줄기차게 찾아오던 남자였다. 연두 작가는 동기가 안쓰러워 안에 들어와 기다리게 했다. 그녀가 동아리방에 들어와 그를 보았다. 아무나 동아리방에 들이냐고 불같이 화를 내더니 말했다. 연두 작가와 자신이 사귀고 있으니 앞으로는 찾아오지 말라고. 소문은 삽시간에 학과 전체에 퍼졌다.  


  "저는 그렇게 학과 남자들의 공공의 적이 되었습니다. 졸업할 때까지 쭉. 제가 학과 친구가 없어요. 그녀의 한마디가 파장이 엄청났죠."


  "그럼 그때부터 사귄 건가요?"


  "네. 그녀가 절 책임지겠다고. 앞으로 남자친구로 옆에 있어 달라더군요."


  "오~ 책임진다, 남자친구로 있어 달라 그게 고백이잖아요! 제 생각에는 작가님이 이미 마음에 있었을 거예요."

  

  "시작은 사랑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우린 꽤 잘 맞았어요. 좋아하는 게 많이 겹쳤죠. 만화책, 애니, 게임, 그림까지. 그녀랑 있으즐거웠고 하루가 금방 갔어요. 자연스럽게 연인이 되었죠. 시간은 사랑이 되더라고요. 시간이 쌓여가며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두 분이 인연이었나 봐요. 그때 함께 그림 그리며 작가로서 실력을 키우신 거죠?"


  "맞습니다. 그녀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는 겁니다."


  "와, 낭만적이에요. 여전히 그녀에게 마음이 남아 있나요?"

 

  "그렇진 않습니다. 전 당시에 혹독하게 그림을 배웠습니다. 그녀는 남자만 그렸고 저에게 여자를 그리라고 했죠."


  "여자는 그리지 않은 거죠?"


  "예쁜 여자 그리다 보면 화가 난다더군요. 또 귀찮은 걸 아주 싫어했어요. 그릴 때 여자가 손이 더 많이 가요. 디테일 면에서 남자보다 훨씬 세밀하게 그려야 하죠."


그녀는 중학생 때부터 만화를 그렸다. 좋아하는 만화책의 남자 주인공만 골라 그렸다. 그때부터 여자는 그리지 않았다. 남자 주인공을 그리며 2D 남자친구 화보집까지 만들었다. 이슬만 먹고살 것처럼 청초하게 생긴 그녀는 예쁜 여자를 질투했다. 만화 속의 여자 주인공을 그리다 너무 예쁘다 싶으면 찢어버리곤 했다. 그녀는 돌아이였을 것 같다. 여자는 안 그리면서 웹툰 작가가 되려고 한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연두 작가는 그녀가 그리기 싫어한 여자를 대신 그렸다.


  "대학 때부터 공모전 준비 계속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녀와 공동작업 하셨나요?"


  "네. 같이 스토리 구상하고 그림은 나눠 그렸어요. 전 여자, 그녀는 남자, 배경 작업도 나눴고요. 순정만화의 작업 과정 전반은 모두 그녀에게 배운 겁니다. 4년 내내 배웠으니 제 스승이기도 하죠."


  "현재 활동하는 작가분이신가요?"


  "네. 순정은 아니고 무협입니다. 남자만 그리더니 무협 장르로 등단했죠. 좋아하는 것만 한다. 그녀다워요."


  "결국 무협 작가가 되셨군요. 같은 일을 하시는데 마주칠 일은 없으세요?"


  "그럴 일이 없습니다. 그녀는 오래전에 마케도니아에 정착했거든요."


연두 작가가 들려준 그녀의 마케도니아 정착기는 놀라웠다. 그녀는 대학 졸업 여행으로 친구와 동유럽 배낭여행을 떠났다. 졸업을 앞두고 떠난 두 달간의 여행이 둘을 영영 갈라놓았다. 그녀가 마케도니아에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케도니아에 정착한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했다. 궁금증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인사이드 아웃에 나오는 빙봉 아시나요? 전 그녀에게 더 이상 빙봉이 될 수 없어 이별을 선택했습니다."


이야기가 갑자기 묻지도 않은 빙봉으로 갈아탔다. 이대로라면 밤새도록 이야기가 이어질 분위기였다. 어디에서 끊어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시간이 점점 더 늦어지자 편집장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편집장이 나서서 인터뷰를 중단했다.


  "시간이 늦었다. 못다 한 이야기는 다음 주에 계속하자."


편집장은 서둘러 인터뷰를 정리하고 그만 돌아가자고 했다.     


출처-네이버



  

시간은 밤 10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밖으로 나오니 달도 별도 없이 먹구름만 잔뜩 낀 하늘이었다. 바람결에 습기를 머금은 공기의 질감이 느껴졌다. 먹구름 사이로 간간이 번개까지 비췄다.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시간이 많이 늦었어요. 제가 집까지 바래다 줄게요."


편집장은 차의 앞문을 열어주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전혀 막히지 않았다. 연두 작가가 낯 심하게 가린다는 거짓말을 왜 했는지 묻기 위해서 밑밥부터 깔았다.  


  "연두 작가님 정말 낭만적이에요. 빙봉 같은 사랑, 애절해요."  


  "빙봉이 아니라 빙신입니다."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편집장님은 낭만이 없어요."


  "그 여자 결혼했습니다. 마케도니아에서 빙봉 같은 남자랑."


  "네?"    


  "바보같이 돌아올 거라 믿으며 기다렸어요. 사랑한다면 진작 마케도니아로 갔어야죠. 기다리기만 하는 사랑은 끝이 좋지 않아요."


  "아... 연두 작가님 너무 안타까워요."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차창의 와이퍼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쏟아지는 빗물에 자동차 불빛들이 번져서 별세계처럼 보였다. 불빛이 아름다워 창에 손을 대어보았다. 라디오에서 김필의 '다시 사랑한다면'노래가 흘렀다. 차가 미끄러지듯 갓길에 멈추었다. 나는 편집장을 보았다. 편집장의 눈길에 불안해졌다. 마음을 꿰뚫어 보듯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진혜원, 넌 언제까지 나 모르는 척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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