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부터 연두 작가를 만난다는 기대감에 마음은 달음박질을 치고 있었다. 연두 작가가 남자라는 사실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믿지 않을 작정이다. 연두 작가의 작품이 인기가 많은 이유는 인물의 세밀한 감정 표현에 있다. 특히 사랑에 빠진 여자의 감정을밀도 있게 그려낸다. 남자는 알 수 없는 여자만의 복잡 미묘한 감정선을 그려내어 독자들로부터 열렬한 지지와 찬사를 받는다. 나는 연두 작가의 등단작부터 최신작까지 모두 본 찐 팬이다.
편집장과 함께 인터뷰를 가는 게 영 껄끄럽다. 계속 붙어있다 보면 내 정체가 탄로 날 것만 같다. 편집장과는 되도록 마주치지 말아야 했다. 만날 때마다 대추 이야기로 귀결된다. 이건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나는 그 옛날 비단 할머니집의 대추를 얼마나 따먹은 것일까. 기억이 안 나니 억울하기만 하다.
오늘 인터뷰는 연두 작가의 작업실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워낙 베일에 가려진작가인 데다 낯도 많이 가리고 외출을 꺼린다고 했다. 작가님의 작업실은 월계역 근방에 있었다. 우리 집과 가장 가까운 역인 망월사역에서 겨우 6개 역밖에 되지 않았다. 15분이면 갈 가까운 거리였다. 지하철로 가는 것이 제일 빠른데 편집장은 굳이 자신의 차를 가지고 우리 집 근처로 오겠다고 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차는 꽉 막혔다. 차로도 20분이면 갈 거리인데 한 시간째 도로에 서있다.
"편집장님, 약속 시간까지 10분밖에 남지 않았어요. 지하철 탔으면 진작도착했다고요."
"그러게요. 이 도로 차가 왜 이렇게 막힙니까?"
"아까 인근에 도봉산이랑 수락산있다고 몇 번을 말씀드렸잖아요. 주말에는 항상 밀린다고요."
"아, 이 정도일 줄은 몰랐죠."
"작가님께 늦는다고 연락드릴게요."
"괜찮습니다. 걘 시간 따위는 애초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우리가 늦어도 늦은 줄도 모를 겁니다."
결국 약속 시간보다 10분 늦게 작가님의 작업실에 도착했다. 작업실은 한적한 주택가에 있었다. 대부분 2층과 3층 높이의 낮은 주택들만 모여있는 동네였다. 편집장의 차를 공용 주차장에 주차하고 함께 언덕길을 올랐다. 작가님의 작업실은 적벽돌로 된 오래된 주택의 3층이었다. 소박한 작업실이 의외였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갔고 편집장은 반투명 유리로 된 문을 두드렸다. 한참을 두드려도 인기척이 없었다.
"자나 봅니다. 창문으로 들어가야겠어요. 잠깐 여기서 기다려요."
편집장은 집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끼익"거리는 소리만 연신 들렸다. 잘 열리지 않는 오래된 창문을 가까스로 열 때 나는 소리 같았다. 안에서 무엇을 하는지 반투명 유리문을 통해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연두 작가는 자다가 깨서 급하게 작업실을 정리하는 듯했다. 잠시 뒤 문이 열렸고 편집장이 보였다. 편집장의 뒤로 까치집을 한 더벅머리에 키가 멀대같이 큰 남자가 쭈뼛거리며 서 있었다. 서글서글한 눈매가 한눈에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기자님.누추하지만 들어오세요."
"어제가 마감이라 이 녀석 꼴이 말이 아닙니다. 진혜원 씨가 이해하세요."
"안녕하세요. 연두 작가님. 저 작가님 찐 팬이에요. 이렇게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연두 작가는 내 손만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낯을 심하게 가린다더니 역시 그런 것 같았다. 뻘쭘해서 다시 손을 내리려는데 연두 작가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저도 영광입니다. 진혜원 기자님!"
연두 작가는 서글서글한 눈매로 미소를 지었다. 보고 있으면 훈훈해진다는 '훈남'이었다. 연두 작가는 따뜻한 사람일 것 같았다. 이렇게 생긴 자들은 따뜻해야 마땅하다. 나도 연두 작가를 보며 활짝 웃었다.
"손을 언제까지 잡고 있습니까? 인터뷰 시간 이미 많이 지체 됐습니다."
편집장의 날 선 목소리에 나는 연두 작가의 손을 놓았다. 연두 작가의 작업실은 전형적인 남자 대학생의 자취방 같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웹툰 작업을 하는 큰 책상 정도였다. 창가에 두 개의 책상이 나란히 있었다. 연두 작가는 허둥지둥하더니 냉장고를 열어 뒤적거렸다.
"전 첫 끼는 무조건 해독주스를 마십니다. 언덕 내려가면 큰 마트가 하나 있어요. 농산물이 아주 싱싱하죠. 같이 장 보러 가실래요?"
"네? 장이요?"
인터뷰하러 왔는데 장을 보고 있다. 우린 지금 초록색 장바구니를 들고 마트에서 채소를 고르고 있다. 언덕을 내려오며 곳곳에 카페가 보였다. 카페에서 음료를 사면 될 걸, 왜 마트까지 와서 장을 봐야 하는 걸까 의문이 들었다. 연두 작가가 마셔야 한다는 해독주스의 정체는 무엇일까.
"채소가 참 싱그럽죠? 진혜원 기자님, 이 셀러리 좀 보세요. 마치 오늘 아침 수확해서 지금 막 여기에진열된 것 같지 않나요?"
셀러리를 들고 해맑게 웃는 연두 작가를 보며 나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연두 작가는 채소의 싱싱함에 진심으로 감동받은 듯했다. 셀러리를 바라보는 눈빛에 광기가 어렸다.
"야, 대충 사. 대체 언제까지 장을 보는 거야. 우린 지금 인터뷰하러 온 거라고!"
편집장이 연두 작가에게 볼멘소리를 했다. 장을 한 시간째 보고 있다.연두 작가는 매우 꼼꼼하게 장을 봤다. 채소 하나를 고르는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보고 또 보고 뚫어지게 보다가 고심 끝에 겨우 1개씩 장바구니에 넣었다. 이런 성향이 작품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거구나 싶었다. 나도 소설 쓸 때 이 태도,참고만 해야겠다.
"기자님께 최상의 맛을 보여드려야 해. 최상의 맛은 최상의 재료에서 나오지."
연두 작가는 편집장의 볼멘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장을 보았다. 그렇게 장을 보고 언덕을 올라 작가의 작업실로 돌아왔다. 연두 작가는 주방에서 흥얼거리며 해독주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내게 해독주스의 효능에 대해 일일이 설명했다. 낯을 심하게 가리는 게 맞는 걸까. 처음 만난 나에게 왜 해독주스의 효능을 알려주는 것일까. 편집장은 이 상황을 포기했는지 책상에 앉아 일을 하는 듯 보였다.
"기자님, 이 해독주스는 노화 방지와 변비 예방에 탁월해요. 오래 앉아 있는 직업군은 반드시 매일 마셔야 해요. 제가 만드는 과정 천천히 알려드릴 테니 보세요. 아! 동영상 찍으셔도 됩니다."
"아핫! 그렇군요. 그럼 동영상찍을게요."
나는 연두 작가 옆에 서서 동영상을 찍었다. 찍을 수밖에 없었다. 인터뷰는 언제 시작하는 것일까. 이미 오후 4시가 넘었다. 인터뷰가 끝났어야 할 시간에 나는 해독주스 동영상을 찍고 있다. 믹서기에 들어간 셀러리, 오이, 골드키위, 파인애플이 섞여서 갈리고 있다. 내 정신도 빙빙 돌면서 갈리는 기분이었다. 낯을 심하게 가린다는 연두 작가는 말이 아주 많았다. 동영상의 오디오에 빈틈이 없었다. 그는 해독주스에 진심이었다.
우리는 방바닥에 초록빛 자태를 뽐내는 해독주스 5잔을마주하고앉았다. 각자 1잔씩 들었다. 골드키위와 파인애플의 단맛과 셀러리와 오이의 상큼한 맛이 어우러져 목 넘김이 나름 괜찮았다. 이 맛이라면 매일 첫 끼니로 먹을만했다. 연두 작가는 해독주스를 연거푸 세 잔이나 마셨다.마치 우리에게 뺏길세라 허겁지겁 말이다. 또다시 해맑음을 풍기며 말했다.
"오늘의 디톡스 완료!이 주스로 말할 것 같으면, 사실그녀가 매일 마시던 겁니다."
연두 작가의 사랑이야기가 갑자기전개되었다. 나는 확신했다.그는 낯을 가리지 않는다. 전혀! 편집장은 내게 거짓말을 한 것이다.왜 그랬을까. 연두 작가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성큼성큼 걸어가 책상 위에 있던 액자 하나를 가져왔다.
"전 그녀를 대학에 입학하고 만났죠. 애니마라는 만화 동아리였어요. 애니를 위해 질주하는 말, 그 이름하여 애니마~이 사람이 바로 그녀입니다."
그가 가리킨 사진 속의 그녀는보자마자 '청초'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했다. 이슬만 먹고살 것처럼 생겼다. 사람이 이렇게 맑고 깨끗하게 생길 수있다니놀라울 따름이었다.
"어? 그런데 작가님은 사진에 없네요?"
"하하, 없는 것 같지만 있습니다. 이 사람이 접니다."
연두 작가가 가리킨 사람은 거구였다.
"제가 이때 110kg까지 나갔어요. 그녀를 만나면서 40kg이 빠졌죠."
"네? 정말 대단하세요. 혹독하게 다이어트하셨나 봐요."
"아니요. 그녀와 만나면 살이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연두 작가가 들려준 그녀와 4년 간의 연애는 놀라웠다. 그녀를 만나면 저절로 다이어트가 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연두 작가는 4년 간 치열하게 그림을 그려야만 했다. 그것도 여자만 주야장천 그렸다. 그를 순정만화계의 전설로 만든 건 바로 그녀였다.
<에필로그>
늘 적은 가까이에 있다. 항상 최측근을 제일 조심해야 한다. 진혜원을 그 녀석(연두 작가)에게 혼자 인터뷰하러 보낼 수는 없다. 그 녀석이 만났던 여자와 진혜원은 여러모로 닮았다. 외모는 전혀 다르지만 성격이 비슷하다. 둘이 인터뷰하다 보면 그 녀석은 귀신같이 진혜원의 성격을 파악할 것이다. 진혜원에게 그 녀석이 낯을 많이 가린다고 거짓말을 했다. 한 시간도안 되어 들통날 테지만. 함께 가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인터뷰하러 가는 당일, 집 근처로 데리러 가겠다고 했다. 혜원의 집 인근에는 도봉산과 수락산이 있고 주말에는 도로 양방향이 정체가 극심했다. 미리 내비게이션으로 검색해 보니 이동 시간만 최소 1시간 이상이 소요되었다. 혜원은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겠다고 했으나 기다리라고 했다. 예상보다 차는 더 밀렸고 1시간 20분이나 차에서 얘기 나눌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연두 작가님. 저 작가님 찐 팬이에요. 이렇게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진혜원은 입이 귀에 걸려서는 녀석에게 서슴없이 손을 내밀었다. 손은 아무와 잡는 게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조심성이 없다. 녀석은 잠시 혜원의 손을 보더니 덥석 잡는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이래서 내가 반드시 따라와야만 했던 것이다.
"손을 언제까지 잡고 있습니까? 인터뷰 시간 이미 많이 지체 됐습니다."
녀석이 나를 보곤 씩 웃는다. 눈치가 매우 빠른 녀석이다. 이 녀석은 타인의 미세한 표정 변화 만으로도 감정을 빠르게 캐치해 낸다. 괜히 순정만화계의 전설이 된 게 아니다. 다음 인터뷰에도 반드시 같이 와야 한다. 둔한 진혜원을 이 악의 소굴로 혼자선 절대 보낼 수 없다.
그날 밤 녀석에게 전화가 왔다.
"야, 진혜원 기자. 네 첫사랑 그 꼬맹이 맞지? 어렸을 때랑 똑 닮았던걸. 아까 보자마자 알아봤지. 어떻게 된 거야? 왜 같은 회사야? 우연이야? 아니면 네 의도냐? 싹 털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