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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란도란 Sep 17. 2024

첫사랑은 치맥을 타고!

<진혜원 이야기>


소소한가 모임의 긴급 소집이 필요했다. 지난밤, 또 꿈을 꿨기 때문이다. 카카오톡의 그룹 채팅창을 열었다.


나 : 나 또 꿈꿨음! 술 원츄♡

마라토너won : 너 만나고 술만 늘어.

암벽밖에몰라 : 진또 언니는 할머니야? 꿈을 왜 그렇게 자주 꿔?


소소한가 모임은 첫 인터뷰이였던 마라토너 유원 언니랑 두 번째 인터뷰이인 암벽등반선수 희우랑 만든 모임이다. 소소하게, 한가하게, 먼 훗날은 유유자적하며 살자는 뜻으로 내가 이름 지었다. 유원 언니랑 술 마시다가 희우를 만났고 자연스레 친분을 쌓았다. 희우는 술을 전혀 못했으나 우리가 가르쳤다. 한 잔 두 잔 마시더니 세 번째 술자리에선 소주 한 병을 거뜬히 마셨다. 희우는 언니들 덕분에 세상의 맛을 제대로 배운 거다.


이번 모임은 치킨에 생맥주다. 희우에게 국내의 모든 술과 안주를 섭렵하게 해 줄 계획이다. 생맥주 500ml를 원샷한 유원 언니가 말했다.


  "무슨 꿈이야?"


  "동생 꿈. 나 동생 이름도 까먹고 있었어."


나는 어린 시절 장마철에 있었던 사고에 대해 담담하게 말했다. 내 이야기를 다 들은 희우는 훌쩍훌쩍 울먹였고, 유원 언니는 폭탄주 제조에 열을 올렸다.


  "만병통치약. 먹고 다시 잊어라."


맥주, 소주, 콜라를 섞어 만든 '고진감래주'였다. 이름대로라면 고생 끝에 즐거움이 와야 하지만 이 술은 고주망태의 지름길이다. 맛있다. 맛있어서 멈출 수가 없다. 유원 언니는 고진감래주 명인이다.


  "삼촌, 여기 치킨 세 마리 바삭하게 튀겨주세요!"


  "언니~ 우리 셋이 세 마리를 어떻게 다 먹어?"


  "걱정 마. 진또 혼자 두 마리 먹어. 우린 반반."     


접시에 수북이 쌓인 치킨이 눈앞에 나타났다. 치킨은 위대한 음식이다. 치킨 없는 세상은 멸망해야 한다. 그 세상은 절망만이 가득할 테니까. 나는 치맥 앞에 서면 첫사랑 '미노미노'를 떠올린다. 나의 생애 첫 치맥이 미노미노와 함께였기 때문이다. 그때의 치맥 맛이 너무도 강렬해서 잊을 수가 없다.  맛을 뛰어넘는 치맥을 만나지 못했다. 처음은 그만큼 강렬하다.


        UnsplashHONG FENG



<진혜원의 첫사랑>  


내 첫사랑 '미노미노'는 향리골에서 만났다. 미노미노는 광활한 토지를 소유한 양계장집 장남이었다. 시골 아이답지 않은 하얀 피부, 진한 쌍꺼풀에 눈꼬리가 처진 큰 눈, 오뚝한 코, 도톰한 분홍빛 입술이었다. 나는 생김새에는 관심이 없었다. 미노미노의 양계장이 탐났다. 나는 달걀이랑 닭을, 없어서 못 먹을 정도로 좋아했다.


하루는 미노미노의 집에 놀러 갔다. 미노미노의 엄마가 갓 잡은 닭을 노오란 기름에 튀겨 주셨다. 나의 첫 치킨이었다. 향리골에는 치킨집이 없었다. 가장 가까운 치킨집인 읍내까지 차로 한 시간이 넘었다. 못 먹는단 소리다. 물에 빠진 닭만 먹었던 나는 갓 튀긴 노릇노릇한 치킨을 한입 베어문 순간 감격했다. 바삭바삭한 튀김옷과 그 안의 촉촉하게 육즙을 머금은 닭살. 거기에 맥주까지. 우린 겨우 아홉 살이었지만 맥주 맛에 눈 뜨고 말았다. 미노미노 엄마가 닭을 염지 할 때 병맥주를 넣고 반 정도 남겨 두었다. 어른들이 모두 양계장에 일을 하러 나간 사이 우리는 남은 병맥주를 마셨다. 유리컵에 뽀글뽀글 하얀 거품이 일었고 한 입 들이킨 순간 "캬아~"소리가 절로 나왔다.


나의 첫사랑은 치맥을 타고 왔다.


  "미노미노, 앞으로 내가 너 지켜줄게. 나만 믿어."


하이얀 레이스에 프릴이 달린 앞치마를 입고 양계장을 누비던 미노미노의 엄마를 보며 꿈을 꾸었다. 나는 아침마다 앞치마를 걸치고 예쁜 바구니 하나 팔에 양계장으로 간다. 닭들이 새벽에 낳은 따끈따끈한 달걀을 하나하나 바구니에 넣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날 나는 미노미노랑 반드시 결혼하리라 결심했다.   


미노미노처럼 곱상하고 순한 아이들은 놀림을 많이 받았다.


  "야, 닭털!"


미노미노의 별명이었다. 친구들이 닭 냄새 난다고 놀려도 미노미노는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내 미래의 남편이 놀림받는 걸 나는 지켜볼 수 없었다. "닭털"이라 부른 친구의 멱살을 잡았다.


  "야, 한 번만 더 우리 미노미노한테 닭털이라 부르면 네 몸에 있는 털 모조리 뽑아버린다."


  "우리 미노미노? 너 미노미노 좋아해?"


  "어. 앞으로 놀릴 생각 하지 마. 자, 어서 가서 소문을 퍼트려."


나는 미노미노에게도 봉숭아물을 들여주었다. 다른 남자애들은 검은 비닐봉지에 흰 실로 대충 묶어줬다면 미노미노는 특별했다.


  "미노미노, 너 커서 누구랑 결혼할 거야?"


  "너!"


  "잊지 마. 너만 특별히 위생 봉지에 빨간 실이야."   


미노미노의 손가락을 감싼 건 엄마 몰래 찬장에서 꺼내온 투명 위생 봉지였다. 엄마가 아껴 쓴다고 숨겨놓은 거였다. 아빠가 읍내에서 사 온 신식 봉지라며 꼭 필요할 때만 써야 한다 해놓고 정작 엄마는 쓰지 않았다. 미노미노에겐 위생 봉지가 아깝지 않았다. 내가 이사만 하지 않았다면 나는 안정적으로 양계장을 가졌을 것이다. 미노미노는 아주 착했고 내 말이라면 모두 좋다고 했으니까. 나의 이사로 우린 헤어졌다.


우리는 스무 살이 되었고 11년 만에 다시 만났다. 추석 날 향리골 마을회관에서 열린 노래자랑이었다. 해 추석은 상품이 어마어마했다. 1등이 최신상 TV였고 2등이 세탁기였다. 우리 할머니의 TV를 바꿔줘야 했다. 나는 할머니의 화려한 꽃무늬 티셔츠와 보라색 몸뻬, 삿갓으로 한껏 꾸몄다. 무대에 올라 인순이의 '밤이면 밤마다'를 열창했다. 요란한 막춤과 함께. 정신을 잠시 놓았다. 인기상이었고 먹지도 않는 브랜드의 라면 한 박스를 받았다. 시골의 노래자랑도 철저하게 가창력을 보았다. 1등을 한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를 부른 중년 신사는 초대 가수로 최백호가 온 줄 알았다.    


그날 무대 아래에서 미노미노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라면 한 박스를 들고 무대 아래로 내려왔고 미노미노가 내 눈앞에 나타났다.


  "혜원아, 나 기억해?"


  "아하하하, 기억하지."


  "춤 잘 추더라. 너 어렸을 때도 잘 췄잖아."


  "아하하하, 인기상밖에 못 탔단 말이지."


  "우리 오랜만에 만났는데 사진 한 장 찍자."


우리는 사진을 찍었다. 내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차올랐다. 나의 행색이 참으로 화려한데 왜 초라하게 느껴졌을까. 내 옷에는 왜 그렇게 꽃들이 많았던 걸까. 즐겨 입었던 할머니의 몸뻬는 그날따라 많이 창피했다. 미노미노는 나와 사진을 여러 장 찍고는 친구들과 떠났다.


  '너 왜 내 번호 묻지 않니? 그냥 가는 거니? 그런 거니? 갔니?'


멀리 떠나간 내님은
혹시 날 잊어버렸나
잊지 말자고 해놓고
        .
        .
        .

휘영청 밝은 달도 내 맘을
모를 거야 몰라
몰라 몰라 몰라


이 모든 건 휘영청 밝은 보름달 때문이다.

네가 너무 밝아서 내가 잠시 미쳤던 것이다.

미노미노야, 제발 나를 잊어다오.

오늘의 내 모습을 영영 잊어다오.

안녕, 잘 가. 나의 첫사랑!



https://youtu.be/unC3TmQm9yc?si=Uq4L8Te-fqylxz76


떠난 줄 알았던 첫사랑이 돌아왔다.

  

  "혜원아, 우리 만나자!"


7년의 세월은 순식간에 지나갔고 미노미노에게 연락이 왔다. 치맥을 타고 왔던 나의 첫사랑, 그의 메시지에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 아직 양계장이 떠나지 않았다. 나의 꿈은 현재 진행형이다. 미노미노가 보낸 메시지를 수시로 보며 미소를 지었다. 금요일이고 출근일이었. 오늘도 역시나 <피플스> 사무실에는 나와 편집장 둘 뿐이었다. 입사한 지 두 달이 지났고 나는 편집장 외에 아무도 만난 적이 없다. 이상했다. 혹시 직원이 나 하나뿐인 건 아닐까 의심이 깊어져 갔다.


오늘 만나자고 미노미노에게 막 답장을 하려는데 편집장이 말했다.


  "진혜원 씨, 무슨 좋은 일 있습니까? 종일 실실 웃던데."


  "그런 일이 있습니다. 좋은 일."


  "좋은 일 혼자만 알지 말고 나도 좀 알려주죠?"


  "저 오늘 첫사랑 미노미노 만나러 가요."


나는 헤벌쭉 웃었다. 편집장은 나를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아이고, 이거 어쩌나. 진혜원 씨 오늘 야근인데."


  "네? 왜요? 저 할 일 없는데요?"


  "진혜원 씨 기사문 퇴고 다시 해야겠어요. 영~ 엉망이지 뭡니까."


  "네? 분명 지난주에 이 정도면 됐다고, 나머지는 편집장님이 직접 손본다고 하셨잖아요."


  "보다 보니 안 되겠어요. 진혜원 씨가 철저히 퇴고 작업하세요. 본인 기사는 본인이 끝까지 책임지는 겁니다. 또, 다른 기자의 기사문도 퇴고 한 번 해보요. 타인의 글을 많이 읽어야 실력이 늡니다."


편집장은 한 뭉텅이의 기사문 원고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가져다가 퇴고하라는 거였다.


  "아, 참! 주말 이틀 시간 비우세요. 내가 깜박하고 얘기 못했는데 신입사원 역량 강화 워크숍이 있습니다."


  "네? 아니, 무슨 워크숍을 하루 전날에 통보합니까? 그리고 신입사원이 저 말고 또 있어요?"


  "진혜원 씨 혼자입니다."


  "달랑 저 혼잔데 무슨 워크숍을? 설마 편집장님이랑 저랑 둘이 하는 거예요?


  "설마요. 뭐 원한다면 둘이 할까요?"


  "이전부터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었는데요. 이 회사에 저 말고 직원이 또 있긴 해요? 사무실에서 다른 직원을 만난 적이 없어요."


  "풉! 다른 직원들 있습니다. <피플스>는 자율 출근입니다. 사무실 여건을 보십시오. 매일 출근하고 싶습니까?"   


잊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도 겪은 일을 잊었다. 피플스는 오래된 종합상가의 7층에 위치해 있다. 엘리베이터가 없다. 한여름의 출근은 고행이었다. 점심도 굶고 싶을 정도였다. 엘리베이터가 없어 배달도 오지 않았다. 배달음식은 1층으로 내려가 받아와야 했다.


  "금요일 출근은 진혜원 씨 혼자입니다. 그러니 다른 직원을 볼 수 없는 거죠. 내일 워크숍에  직원이 참석 예정입니다. 워크숍 장소는 가평이고요. 회사 차로 함께 이동합니다."   


나는 미노미노에게 다음 주에 만나자고 답장했다.


다음 날 오전 8시 종합상가 앞,

노란 12인승 봉고 안에 나는 앉아 있었다.

마치 유치원생이 된 기분이었다.

회사 차였다.

이거 타고 가평 간다.

아, 신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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