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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란도란 Nov 05. 2024

망해도 좋아, 그대만 있다면!

<피플스 잡지사 이야기>


<프롤로그-진혜원 이야기>


소설을 쓰며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넌 이기적이야."였다. 내가 그토록 하고 싶은 일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는 일이다. 내 뒷모습을 더 많이 보여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일상을 포기하고 작은 반지하 방에서 글을 쓰고 있을 때면 나는 늘 외로웠다. 글은 나 혼자 걷는 길이었다. 누군가가 대신 걸어줄 수도, 함께 걸을 수도 없는 길이었다.


나는 글을 쓰며 매번 내 안의 수많은 '나'를 마주한다. 그들 중에 누가 진정한 나 자신인지 알 수 없다. 어쩌면 그들 모두가 다 나일 수도 있다. 내 안의 모두가 '나' 하나로 통합되는 일, 가장 나다워지는 일이 내겐 글이었다. 외로운 길이라 생각했던 그 길 위에서 피플스를 만났다. 피플스에서 수습기자로 일하며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의 이야기를 글로 쓰며 알게 되었다. 어떤 글은 함께 걸을 때 더 빛난다는 것을.


피플스와 나는 삶의 한 모퉁이에서 그렇게 만났다.


삶이란 내 안의 여러 가지 '나'를 찾아 통합시켜 가는 여정이죠. 우리는 결국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해요. 사람은 자신다워질 때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내면의 힘을 발견하게 되죠.  
- 이서윤, <더 해빙>에서



  

"편집장님, 저 이 분위기에선 일 못 하겠습니다!"


마케팅부 현해탄 부장이 볼멘소리를 냈다. 월요일 오전, 다음 달 발행할 잡지의 콘텐츠 선정을 하기 위한 기획 회의 중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눈치채셨습니까?"


선정후 편집장이 냉큼 사과했다. 사람이 변했다. 능청스러워졌다.


  "눈치를 못 챌 수가 있습니까? 회의 시작부터 스크린보다 진혜원 기자 얼굴을 더 보고 있잖습니까. 아주 티가 팍팍 납니다."


  "이런, 사랑과 기침은 숨길 수 없다더니 티가 나는군요. 당분간은 숨기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디자인부 고소리 부장이 감격에 겨운 듯 말했다.


  "전 이 분위기 열렬히 환영해요. 그간 피플스 분위기 침체된 보랏빛 아니었습니까? 오늘의 피플스는 핑크빛이에요. 모든 인류는 사랑을 해야만 해요."


그녀는 사랑을 찬양하는 말을 한참이나 쏟아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부끄러웠다. 선정후 편집장에게 넌지시 눈치를 줬지만, 그의 시선은 대부분 내게 머물렀다.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자 그리 말했거늘 저렇게 대놓고 쳐다보다니, 안 걸리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자, 그럼 들킨 벌로 제가 커피와 간식을 쏘겠습니다."


기획 회의를 잠시 멈추고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그간의 일들을 모조리 실토해야만 했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 온 인연으로 시작해서 어젯밤 나의 고백까지 숨김없이 말했다. 이야기 중간중간 고소리 부장은 감정이 격해져 "맙소사!"를 외쳤다. 웬일인지 묵묵히 이야기를 듣던 현해탄 부장이 끝끝내 한마디 내뱉었다.


  "이거 끌어당김의 법칙, 연애 편입니까?"



<보라색과 분홍색 플라즈마 볼>  

사진: UnsplashHal Gatewood




항간에는 이런 말이 떠돌기도 한다. 친구 중에 돈 좀 있으면서 얄미운 사람이 있거든 잡지를 창간하게 만들어라! 그러면 재산을 모두 털릴 것이다. 또 출판업계에는 이런 농담도 있다. 서서히 망하려거든 단행본 출판사를 차리고, 빨리 망하려거든 잡지사를 시작하라!     

- 한기호,  <잡지, 기록 전쟁>에서


첫 직장인 잡지사 <피플스>에 입사한 직후부터 한 가지 걱정이 있었다. 취재에 드는 비용과 월급을 제때 받을 수 있을지 말이다. 피플스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얼핏 봐도 영세한 잡지사였다. 그리고 지금은 피플스를 운영하는 선정후 편집장이 더 걱정된다. 잡지의 시대는 이미 진작에 저물었다. 많은 잡지가 폐간의 수순을 밟고 있는 게 현실이다. 대체 피플스는 어떻게 버티고 있는 것인가 궁금했다.


오전부터 이어진 기획 회의 마지막에 '가을 특집호 명사(名士)들의 실연 이야기' 발행 부수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초판 천 부도 무리이지 않을까 했는데 만 부를 인쇄한다니 믿기지 않았다. 선정후, 그는 갑부인가. 돈이 많지 않고서야 만 부를 제작 후 어찌 다 판매한단 말인가.


궁금한 건 참을 수 없었다. 퇴근 후 오빠와 저녁을 먹으며 조심스레 얘기를 꺼냈다.


  "오빠, 초판 만 부는 무리 아니야? 정기구독자 수가 많아?"


  "1500명 정도. 뉴스레터랑 웹진으로도 업로드해서 구독자는 꽤 되는 편이야."


  "구독자 수는 정말 놀랍다. 공공기관이나 전국 도서관에 넣는다 해도 천 부 정도일 텐데 나머지 부수는 무슨 수로…. 어디 창고에 그냥 쌓아놓는 건 아니지?"


  "우리에겐 골드버튼 유튜버 이시후 사원이 있고 22명의 인터뷰이들이 있지. 피플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는 매체잖아. 사람이 사람을 끌어모아." 


  "사람이 사람을 끌어모은다? 그래도 만 부는 많다고 생각하는데."


  "인터뷰한 명사 중에 자신을 홍보하기 위해 종이 매체가 필요한 이들도 있어. 그들이 구입하는 부수도 꽤 되고."


  "오빠, 어디서 돈 끌어다 쓰는 건 아니지? 적어도 유지는 되는 거 맞지?"


  "응. 잡지는 올드 미디어지만 광고 수익도 어느 정도는 . 매달 광고를 싣는 출판사와 협력사들이 있어. 출판사들이 어렵다지만 어려운 이들끼리 서로를 돕지. 정기구독자와 광고 수익으로 유지는 가능해."


  "그럼 다행이고. 잡지를 만드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 젊은이의 패기라기엔 무모하단 생각 안 해봤어?"


  "시작은 무모했지. 한 달 한 달 버티는 게 목표였어. 월간지가 가진 매력이 있어. 매달 기다리는 , 그날이 오길 기다리는 마음. 한 달에 한 번 출간일에 맞춰 서점에서 사던 잡지들이 사라지지 않길 바랐어."  


나는 학창 시절에 월간지 만화들과 패션지를 챙겨 보았다. 발행일이 모두 달랐는데 좋아하는 월간지의 발행일은 기억하고 있다가 서점으로 달려가곤 했다. 그러나 세상은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변해 갔다. 서점 매대 위에 있었던 잡지들이 사라졌고 길가 곳곳의 가판대에서 쉽게 볼 수 있던 잡지들도 하나둘 사라져 갔다. '특종'이란 기사 하나만 보고도 수십만 부가 날개 돋친 듯 팔리던 시대는 지나갔다. 유행은 돌고 돈다지만 잡지는 영영 뒤안길로 사라진 매체 같았다.


  "오빤 이상적이야. 복고에서 빠지는 유일한 게 있다면 잡지가 아닐까. 영영 돌아오지 않는 시대도 있어."


  "맞아. 이상이지. 그렇지만 난 늘 이루고 싶은 일을 상상하고 또 상상했어. 바라는 일이 반드시 일어날 거라 믿었고. 너도 그랬고."


  "나? 나 다시 만날 줄 알았어?"


  "응. 그날이 언제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반드시 만나게 될 줄 알았어. 매년 향리골에 갔었고 다시 만나게 날을 상상했어. 그런데 어느 날, 이력서가 메일함에 있었어. 그때 무슨 생각한 알아?"


  "무슨 생각?"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


  "아하하하~ 우연일 수도 있잖아.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있다 보면 한 번쯤 만날 수도 있지. 그리고 내가 이력서를 엄청 썼어. 그중 하나가 피플스라고." 


  "아까 현해탄 부장님이 끌어당김의 법칙 말씀하셨잖아. 우주나 지구에는 우리에게 보이지 않은 에너지가 있는데 강렬하게 원하는 게 있으면 그 에너지가 자기에게 몰린대. 난 이 법칙을 믿지는 않지만 대신 나를 믿어. 계속 상상하고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나 자신을 믿어."


  "끌어당김의 법칙이라…. 피플스의 구호, 오빠가 만들었지? 사람은 이야기다. 이야기는 세상이다. 세상을 기록하는 잡지, 독자가 평생 간직하고 싶은 잡지. 피플스!"


  "응. 멋지지?"


  "난 오빠가 더 멋져. 자신을 믿어서. 이상을 포기하지 않아서. 다들 무모하다 말해도, 이상적인 일을 현실로 만들려는 오빠가, 세상에서 제일 멋져."


오빠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오빠를 바라보고 웃었다. 사랑하는 이가 무모한 일을 벌이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가 계속 잡지를 발행할 수 있을까. 잡지의 시대가 기적처럼 다시 돌아오긴 할까. 그가 바라는 세상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응원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가 가려는 길 위에 그 길목에 서서 손을 내밀 것이다. 기꺼이 함께 걷겠다고.


결국 망하기밖에 더 하겠는가. 망해서 모든 걸 잃는다고 해도 나의 사람, 나의 사랑만 잃지 않으면 된다. 사랑만 지키면 언제든 다시 일어설 수 있다.                 


피플스에 얼마나 오래 있을지는 없다. 애초에 소설을 쓰기 위한 돈을 모으기 위해 이곳에 왔. 일정 금액의 돈이 모이면 그만둘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피플스의 폐간은 막을 것이다. 망할 때 망하더라도 최선은 다한다.


  '잡지를 팔자! 부를 소진하자.'


타깃은 이미 정해졌다. 그에게 피플스 가을 특집호를 강매하러 갈 것이다.

기다려라. ○, ○○


https://youtu.be/IMWT6937uUs?si=Z2MUzUi9NS2kDEE5


세상의 모든 걸 잃어도 난 좋아요
그대만 있다면 그대만 있다면





<에필로그-선정후 이야기>


잊고 있었던 기억이 하나 있다. 나는 교복 입은 혜원을 읍내의 서점에서 만난 적이 있다. 혜원은 열다섯이었고 나는 입대를 앞두고 있었다. 그해에도 향리골을 찾았고 할머니에게 혜원이 이사했다는 곳을 전해 들었다. 향리골에서 시내버스로 30분 거리였다. 삼거리에 내렸고 작은 서점이 눈에 들어왔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서점으로 들어갔고 한참 책을 보았다. 얼마 뒤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들어왔다. 서점의 유리문에 달린 종소리와 여학생 특유의 재잘거림이 섞여 묘한 화음을 만들었다.


  "삼촌, 오늘 파티 들어왔어요? 학교 끝나자마자 뛰어왔어요."


혜원이었다. 똑 단발에 반달눈, 묘한 화음 속 낭랑하게 울리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혜원임을 단박에 알아챘다. 한구석에서 소설을 읽던 나는 혜원이 혹시 나를 알아볼까 조마조마했다. 반가움과 설렘으로 심장이 콩닥거릴 때 혜원은 매대 위에 있던 월간지를 낚아챈 뒤 재빠르게 계산대로 향했다. 나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기도하듯 눈을 감은 혜원이 투명 플라스틱 통에서 책갈피를 하나 꺼냈다. 그러더니 책갈피의 문구를 읊기 시작했다.  


  "두구두구두구두! 앗, 오늘의 명언은 영어입니다. There is no remedy for love but to love more. 헨리 데이비드 소로군요. 이 문구를 보니 전 이만 떠나야겠어요. 더 열렬히 사랑할 사람을 찾아! 삼촌, 다음 달도 파티 일찍 나오면 전화 주세요."


혜원은 친구들과 함께 서점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여전히 밝은 기운을 몰고 다녔다. 혜원이 낚아채 간 순정 만화 잡지를 보자 빙그레 미소가 번졌다. 읽고 있던 소설 한 권과 혜원이 산 잡지를 들고 계산대로 갔다. 서점 주인은 투명 플라스틱 통을 내밀며 책갈피 두 개를 고르라 했다. 책 한 권에 책갈피 하나인 듯했다. 나는 두 개를 골랐고 그중 하나를 혜원이 오거든 전해달라 부탁했다. 서점 주인은 혜원이 매일 온다며 내일 전해주겠다고 했다.


혜원은 그 책갈피를 받았을까.

지금도 가지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그날 서점을 나서며 주문을 외웠다.


우리 또 만나자.

“au revoir”





1997년 창간한 월간지

현재 유일하게 종이서적으로 출간하는 순정 만화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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