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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란도란 Nov 12. 2024

마지막 화 : 사랑의 헤드록

<우리 모두의 이야기>

어린 햇살 아래서

뛰어놀곤 했었던

가쁜 숨결

굽이진 골목 지나

길을 따라가 보면

같은 기억

어른이란 시간은

아직 어색하게도

나를 채워

많은 게 변했다 해

여긴 그대로인걸

You'll feel the same

땀에 젖어 놀았던

우리는 너와 난 이젠

돌아갈 순 없지만

낡아진 서랍 속에서

작았던 서롤 기억해


- 10CM, '서랍' 가사 



<프롤로그-진혜원 이야기>


초등학교 6학년이 끝나갈 즈음 할머니가 나에게 책상을 사주며 말했다. 


  "혜원아, 중학생이 되면 이 책상에 앉아서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 


할머니의 바람과는 달리 나의 책상 위에는 문제집보단 월간지 만화와 패션지가 펼쳐져 있었다. 중학교 3년 내내 나는 책상에 앉아 순정만화와 패션지로 나의 문학적 감수성과 미적 감각을 키웠다. 한때 만화가를 꿈꾸었으나 그림이 글을 뛰어넘진 못했다. 그 3년이 내 꿈의 시초였다.     


책상 서랍을 열어 당시에 3년 동안 모은 책갈피 바구니를 꺼냈다. 매달 월간지와 패션지를 살 때마다 서점에서 하나씩 받았다. 책갈피에는 마음을 울리는 멋진 문구들이 적혀 있었다. 나는 책갈피를 하나하나 꺼내어 문장들을 읽었다. 소설을 쓰다 막힐 때면 내가 종종 치르는 의식 중 하나다. 책갈피에 빼곡하게 적힌 문장의 숲을 거닐다 보면 어느새 나의 문장도 다가온다. 오늘의 문장을 골랐다.

동화라고 해서 결말이 항상 행복하게 끝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전히 동화다.
첫사랑도 마찬가지다. 행복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항상 슬픈 것은 아니다.
그저 사랑일 뿐이다.
- 디안 푸르노모(인도네시아 작가)    


이 책갈피는 누군가 내게 전해준 것이다. 서점 삼촌의 말로는 아주 잘생긴 20대 초반의 청년이라고 했다. 그게 다다. 금성무를 똑 닮은 서점 삼촌보다 잘생긴 사람을, 그때까지 내 생애에서 본 적이 없었다. 책갈피를 다시 바구니에 넣으려던 순간, 책갈피 뒷부분에 펜으로 적은 흐릿한 두 글자가 보였다.


  "이게 뭐지? J.H?"


 J.H 혹시 너의 이니셜이니? 이건 아니겠지? 선정후, 또 너냐고? 하라. 선정후!  




피플스 가을 특집호 초판 만 부 소진, 할 수 있다. 나는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나의 인맥들은 대다수 출판계에 있다. 모든 인맥을 동원하여 피플스에 광고를 실을 수 있는 출판사들과 미팅을 잡았다. 잡지사는 정기구독자와 광고가 가장 큰 수익원이다. 각종 장르의 글을 쓰는 선후배와 친구들이 있는 단톡방에도 피플스를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작가라면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하는 것이 창작에 도움이 된다.


그리고 나는 유원 언니의 전 남자 친구 빌런 이민호에게 200부를 선주문받았다. 그가 근무하는 곳이 우리 회사 바로 옆 건물이라 오며 가며 종종 마주쳤다. 계속 마주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서로 눈인사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어느 날 그가 말을 걸어왔다. 유원 언니가 인터뷰한 실연의 주인공이 혹시 자신이냐고. "알 필요 없습니다."라고 딱 잘라 말했으나 그는 자신이어도 상관없다며, 잡지가 나오면 꼭 사보겠다 했다. 지난주에 회사 앞에서 그를 또 만났다. 잡지를 정기구독했다는 그의 말에 선주문하라고 넌지시 말했다. 사봤자 10부 정도겠지 했는데, 그는 선뜻 200부를 주문했다.


  "회사에 돌리려고요. 지인이 인터뷰했다고 하고요. 물론 지인이 유원이라고 밝히진 않을 거예요. 제가 유원이에게 준 상처는 그 무엇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을 겁니다. 기사 읽으면서 제가 지은 죄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월요일 오후, 중요한 전달사항이 있다며 전 직원 출근하라고 했다. 일찍 출근해서 선정후 편집장에게 먼저 이 소식을 전해야 했다. 광고 협의를 할 출판사 목록들과 선주문을 받은 계약서들을 봉투에 챙겼다. 피플스의 보라색 시트지가 붙은 유리문을 열고 들어섰다. 선정후 편집장은 나를 보고 세상 환하게 웃었다. 날이 갈수록 잘생겨 보인다. 저 두꺼운 검은 뿔테 안경은 눈부신 외모를 숨기기 위함이 분명하다. 나는 편집장의 책상 위에 봉투를 내려놓았다. 봉투 안에서 서류들을 꺼내 살펴본 편집장이 말했다.  


  "진혜원, 지난주 내내 이래서 바빴구나. 나랑 만나주지도 않고 말이야. 피플스가 그렇게 걱정됐어? 아님, 내 걱정?"


  "둘 다. 내가 있는 한 피플스는 안 망한다! 오빠를 돕고 싶었어."


  "고마워. 그런데 앞으로는 이러지 않아도 돼. 그 시간에 차라리 날 만나. 초판은 이미 선주문만으로도 다 팔렸어. 2쇄는 보름 정도 기다려야 해."        


  "뭐? 초판이 만 부나 되는데 벌써 어떻게 다 팔아? 대체 누가 그렇게 많이 사는 거야?"


  "오늘 회의 시간에 알게 될 거야. 만 부가 다 팔린 이유."


쓰리피 프로젝트  

  

  "드디어 쓰리피 프로젝트가 2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피플스의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인 만큼 철저하게 준비합시다. 비용은 걱정하지 마시고 다양한 프로그램 과감하게 넣어주세요."


선정후 편집장은 자못 진지했다. 도대체 쓰리피 프로젝트가 무엇이기에, 평소 말이 많던 현해탄 부장조차도 표정이 엄숙했다. 현해탄 부장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한일 하나종합병원장님이 다방구 게임을 꼭 넣어달라 부탁하셨습니다. 오늘까지 총 스물일곱 차례 전화하셨습니다."


  "병원장님 이번엔 선주문 몇 부나 하셨습니까?"


  "천 부 주문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많이 주문하신답니까? 적당히 주문하시라고 이번엔 제가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방구 게임은 준비하세요. 작년에 비석치기도 반응이 뜨거웠으니까요."


  "지난봄 특집호 역경을 극복한 사람들 이야기가 장기 입원 중인 환자분들에게 반응이 아주 뜨거웠답니다. 이번에는 병원장님의 실연 이야기가 실린다고 직원분들과 환자분들이 벌써 난리가 났답니다. 워낙 주변에 지인들도 많으셔서 2,000부 사시겠다는 거 제가 말렸습니다. 2쇄 들어가면 추가 구매하신답니다."


나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    


  "저 쓰리피 프로젝트가 뭔가요?"


현해탄 부장이 답했다.


  "아, 진혜원 기자에게 이 중요한 걸 설명 안 했군요. Peoples party입니다. P가 세 개 들어가서 일명 쓰리피라고 부릅니다. 정기구독자와 인터뷰이들이 모여 1년에 단 하루 파티를 여는 걸 말하죠."


인근의 대학교 대운동장을 하루 빌려서 하는 큰 축제였다. 대학생 때 하던 축제처럼 팀별로 부스도 만들고 장기자랑부터 다양한 공연과 프로그램까지 계획되어 있었다. 나는 '팀 진혜원'의 팀장이었고 우리 팀에는 내가 인터뷰한 마라토너 강유원 선수, 암벽등반 손희우 선수, 연두 작가, 이지수, 형순 오빠와 정기구독자 11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부터 2주간 각 팀별로 부스 운영과 장기자랑을 준비해야 했다. 마치 다시 대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이번에 애독자 퀴즈 코너는 문제 난이도를 좀 더 높여 주세요. 작년에 정답을 너무 쉽게 맞히더군요. 이시후 사원이 1년 치 피플스 쭉 훑어보고 1차 문제 내주세요. 최종 문제는 제가 만들겠습니다. 선물도 작년보다 더 푸짐하게 준비해 주시고요."   


선정후 편집장의 지시에 이시후 사원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장기자랑 준비까지 해야 해서 2주가 아주 빠듯했다. 피플스는 장기자랑에 매번 진심인 회사다. 이번에도 상금이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수와 형순 오빠는 언제부터 피플스의 정기구독자였던 것일까. 게다가 지수는 이미 Peoples party의 날 공연도 해 주기로 했단다. 문득 선정후 편집장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이 사람을 끌어모아.'


피플스가 초판 만 부를 발행할 수 있는 이유, 결국 사람이었다.

 

Peoples party의 날이 왔다. 우리 팀은 대학 축제의 꽃이었던 부스, 전통 주점을 했다. 나는 부스에서 부침개를 연신 부치며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다방구를 하는 사람들 모두가 아이처럼 뛰놀고 있었다. 20대부터 70대까지 나이도 성별도 직업도 모두 다르다. 이들 중에는 사회 각계의 저명인사들도 있었다.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그들도 운동장 안에선 그저 한 사람일 뿐이었다. 우리는 모두 더도 덜도 아닌 그저 한 사람이다. 내가 사랑하는, 앞으로 더 사랑할 일만 남은 선정후 편집장이 그리던 세상은 이상이 아니었다. 최소한 이 운동장 안에서만큼은 그가 꿈꾸던 세상이 현실이었다. 


나는 피플스의 수습기자가 되어 이들을 만날 수 있었고 지금 함께 할 수 있어서 더없이 행복하다. 가장 좋아하는 어린왕자의 작가 생텍쥐페리의 말을 전하며 나의 이야기는 여기서 '잠시' 멈추려 한다. 삶은 흐르며 우리는 언젠가 또 다시 만날 것이다.


 인간은 인연으로 엮어 만든
하나의 매듭, 망, 그물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인연이다.

 



<에필로그>

뒷정리를 마치고 모두가 돌아갔다. 한편의 계단에 앉아 텅 빈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꿈만 같던 하루가 지나갔다. 우리 팀 부스였던 전통 주점을 찾는 사람이 많아 종일 부침개를 부쳐댔더니 온몸에서 기름내가 진동했다. 장기자랑과 운동장에서의 놀이로 흙내와 땀내도 났다. 오빠는 운동장에서 구르다 온 건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흙투성이였다.


  "오빠, 신나게 놀았구나."


  "응. 난 1년 치 다 논 거 같아. 내일부턴 더 열심히 일할 수 있겠어."


  "멋지다. 울 오빠. 난 오늘 피플스가 더 좋아졌어. 큰일이야. 이러다 소설은 안 쓰고 기자만 할 것 같아. 오빠, 하나만 약속해 줘. 혹시 우리가 만나다 헤어지더라도 나 자르지 않기. 내 발로 나가기 전까진 그냥 두기! 어서, 손가락 걸자."


  "너 이리 와 봐."


오빠가 나에게 다가와 헤드록을 걸었다.


  "사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헤어질 생각부터 해? 영영 안 헤어질 거야. 진혜원, 넌 나한테 혼 좀 나야겠다."


  "오빠, 헤드록은 반칙이라고. 자꾸 이러면 가만 안 둔다. 쪽!"




                             .   

  





수요일 낮 12시,

<작가 후기>로 인사드리러 오겠습니다.

그동안 소설 '수습기자, 실연을 기록하다'를 읽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 인사 전합니다.

덕분에 20화 무사히 완결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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