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천상작가 해원 Nov 29. 2024

2-2. 도망쳐 간 곳에 천국은 없다

<소설 영주권, Green Card> 2장. 불법 이민자 되어


비 내리는 깊은 겨울밤, 인적이 끊긴 편의점에서 두 남녀가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격렬한 키스에 빠져 설사 손님이 들어와도 모를 만큼 두 사람은 서로의 감촉을 즐기고 있었다. 영무와 씨에떼였다. 결혼과 동거를 거절하며 계속 회피하는 영무를 씨에떼는 포기하지 않았다. 손님의 발길이 뜸해지는 늦은 밤이면 씨에떼는 영무를 유혹했다.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보낸 지난 시간은 영무를 끝없는 두려움으로 내몰았다. 밤이 되면 두려움은 금세 외로움과 손을 잡고 영무의 심장을 후벼 팠다. 영주를 만나겠다는 유일한 희망은 불안감과 외로움에 묻혀 점점 희미해져 갔다. 영주가 있을 만한 곳을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영주를 찾기는커녕 그녀를 안다거나 봤다는 사람조차 만나볼 수 없었다. 불법 이민자가 된 영무에게 영주권은 반드시 얻어야 할 하나의 숙명 같은 것이었다. 주변의 만류에도 이민을 결정한 영무의 마지막 자존심이기도 했다. 두려움과 외로움에 목마른 영무에게 어리고 예쁜 씨에떼의 촉촉한 몸짓은 참아내기 힘든 유혹이었다. 처음 씨에떼의 키스를 허락하던 날도 지금처럼 비가 내렸다. 퇴근하려고 여자 탈의실에서 유니폼을 갈아입던 씨에떼가 비명을 내질렀다.     


“꺄아악! 릭, 도와주세요. 어서요. 여기 좀 들어와 봐요.”     


영무가 놀라 탈의실에 들어서자 속옷 차림의 씨에떼가 영무게 와락 안기며 말했다.     


“릭, 무서워요. 저기 구석에 쥐가 있어요. 릭의 팔뚝만 한 놈이었어요. 절 보고 놀라지도 않고 노려봤어요. 전 쥐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요. 릭!”     


씨에떼는 영무의 목을 노골적으로 감싸며 더 꼭 끌어안았다. 쥐가 있다는 곳으로 발을 옮기려던 영무를 잡아당기며 씨에떼가 말했다.     


“릭, 이제 괜찮아요. 쥐는 이미 도망갔을 거예요. 이대로 잠깐만 저랑 있어 주세요. 전 너무 놀랐어요. 제 심장이 진정될 때까지만 제 곁에 있어 주세요.”     


얇은 브래지어를 통해 느껴지는 씨에떼의 가슴이 영무의 젊음을 자극했다. 손은 그녀를 떼어 놓으려는 듯 밀어냈으나 가슴속에 타오르는 남성의 충동은 젊고 예쁜 씨에떼를 강하게 원하고 있었다. 심장이 폭발할 듯 쿵쾅대고 있었다. 애써 태연한 척 심호흡을 한 영무가 씨에떼를 밀어내며 말했다.     


“씨에떼, 뭐 하는 거야? 쥐는 무슨 쥐가 있다고 그래. 날 놀리려고….”     


영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씨에떼의 입술이 영무의 입술을 덮쳤다. 영무는 그만 놀라 토끼눈이 되어 씨에떼를 밀쳐냈다. 씨에떼는 자신을 거부하는 영무에게 울먹이며 말했다.     


“릭, 전 당신을 처음 본 그 순간부터 당신에게 빠졌어요. 진심이에요. 당신을 처음 만난 이후로 그 누구도 제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그동안 즐겁게 일할 수 있었던 이유도 다 당신과 함께였기 때문이에요. 릭, 절 받아주세요. 제발요. 릭!”     


울먹이며 영무를 파고드는 씨에떼를 영무는 피할 길이 없었다. 온몸이 점점 그녀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거부하던 영무의 몸이 스르르 열리는 걸 느끼자 씨에떼는 다시 영무의 입술로 다가갔다.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영무도 그녀를 안았다. 참았던 충동이 폭발하자 영무는 씨에떼를 구겨질 듯 거칠게 끌어안았다. 싱그러운 이국 여인의 젊음을 마음껏 흡입했다. 그렇게 영무는 씨에떼를 받아들였다.     




6월의 마지막 비를 끝으로 우기가 지나자 지구상에서 태양 빛이 가장 아름답다는 오리건주에 7월이 찾아왔다. 영무와 씨에떼가 동거를 시작한 지도 벌써 여섯 달이 지났다. 동거를 시작하고 채 석 달이 되지 않아 씨에떼는 여러 가지 핑계로 편의점 일을 그만두었다.      


영무에게 이제 씨에떼는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어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외로움을 달래주는 유일한 가족이었다. 결혼을 통해 부부가 될 사이였고 영무에게 영주권을 제공할 희망이었다. 편의점을 그만두겠다는 그녀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씨에떼와 결혼해 영주권만 얻는다면 자동차 정비소나 정상적인 회사에 취업할 수 있고 생계는 걱정할 게 없었다. 생계뿐만 아니라 사업으로 큰돈을 벌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영무는 씨에떼와의 미래를 생각하며 희망에 부풀었다. 새로운 사랑과 희망 앞에서 첫사랑 영주는 영무의 뇌리에서 점점 사라져 갔다.     


영주권에 대한 희망과 함께 영무는 새로운 꿈을 꾸었다. 편의점에서 일하며 더 싸게 물건을 받아 오는 방법을 터득하며 언젠가는 자신도 편의점을 운영하는 사장이 될 거라 다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실무 경험 외에도 편의점 운영과 향후 사업 확장을 위해 공부할 책이 필요했다. 씨에떼와 함께 세계 최대의 독립 서점이라는 파웰스 북스(Powell’s Books)에 들러 책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어둠이 내린 창밖을 무심히 내다보던 영무의 눈에 어디서 본 듯한 한국 여성이 어린 남자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갔다. 옆모습이지만 분명 영주였다. 창밖에 영주가 있었다. 급한 마음에 창문으로 달려가 큰 소리로 영주를 불렀다.     


“영주야! 영주야! 영주야!”     


창문을 두드리며 더 큰 소리를 내어 불렀지만, 영주는 돌아보지 않았다. 창밖에서는 영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했다. 영무는 영주의 모습을 좇아 내달리기 시작했다. 씨에떼는 이상한 눈으로 영무를 바라보며 뒤따랐다. 하지만 서점은 넓고도 넓었다. 한참 만에야 영주가 걸어가던 곳으로 나왔지만 영주는 사라지고 없었다. 영무는 미친 사람처럼 건물을 따라 두 바퀴, 세 바퀴 연거푸 돌아봤지만, 어두운 거리 그 어디에도 영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숨을 헐떡이던 영무가 낙담한 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분명 영주였어. 영주였어. 그렇다면 그 아이는? 아니야, 아니야, 내가 잘 못 봤을 거야. 아니면 헛것을 본 걸 거야. 하지만 분명….’     


영무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영문도 모른 채 바라보던 씨에떼가 영무에게 물었다.     


“릭, 당신 왜 그래요? 도대체 무얼 찾아다닌 거예요? 난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어요.”     


“어, 씨에떼, 미안해. 근데 아까 창밖으로 어떤 아시아 여자가 어린아이 손을 잡고 걸어가는 거 봤어? 분명 내가 아는 사람 같았거든.”     


“아니요, 못 봤어요. 릭, 당신이 소리치면서 막 뛰어가길래 저도 창밖을 봤는데 아무도 없었어요. 저는 당신이 갑자기 그래서, 미친 줄 알았다고요.”     


“아, 그래? 내가 요즘 일하면서 공부까지 하느라 너무 무리했나 봐. 미안해 씨에떼, 얼른 책 사서 이 옆 카페에 가서 맛있는 커피 마시자. 내가 아는 근사한 커피숍이 있거든.”     


영무가 딴청을 피우며 연신 눈을 비벼댔다. 그리고 돌아서는 씨에떼의 등 뒤에 대고 한국말로 혼잣말했다.     


“분명 영주였어!”     


진짜인지 헛것인지 알 수 없는 영주와 아이를 본 이후로 영무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만약 영주가 미국으로 와서 아이를 낳았다면 영무가 봤던 예닐곱의 그 아이 또래가 됐을 것이다. 영주와 자신의 아이가 미국에서 살고 있다면 씨에떼와의 결혼은 다시 생각해 봐야 했다. 영무는 책을 산다는 핑계로 시간이 날 때마다 파웰스 북스 근처를 서성였지만, 영주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꼭 다시 나타날 것 같은 영주를 찾아 헤매는 사이, 씨에떼와의 결혼에 점점 회의감이 밀려왔다. 누군가에게 상처 주는 일을 더는 하고 싶지 않았다. 머지않아 영무의 고민을 한 번에 해결해 준 믿을 수 없는 일이 생기고야 말았다.     


편의점을 그만두고 집에서만 머물던 씨에떼는 생활비 명목으로 영무에게 점점 더 많은 돈을 요구했다. 편의점 사업을 위해 돈을 모아야 했던 영무는 끼니도 잊은 채 열심히 일했지만 씨에떼의 요구는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의 영무에게는 씨에떼를 통한 영주권 확보가 무엇보다 급하고 중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영무가 씨에떼에게 주는 돈이 늘어날수록 씨에떼의 화장도 짙어져 갔다. 영무가 퇴근해 돌아오면 평소보다 세 배는 긴 눈썹을 붙이고 있기도 했고, 때로는 술에 취해 잠들어 있기도 했다. 영무는 씨에떼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감지했다.      




“도망쳐 간 곳에 천국은 없다. 영무 너 이런 말 들어 본 적 있어?”     


점심을 함께 먹고 난 후 편의점 사장이 영무에게 대뜸 물었다.     


“아니요. 들어 본 적 없어요. 근데 왠지 기분 좋게 들리진 않네요. 꼭 저를 빗대어서 하는 말 같기도 하고요. 근데 사장님, 저는 도망쳐서 온 건 아닙니다. 무언가 찾으러 온 겁니다. 도망친 거랑은 차원이 다르죠.”      


“아니, 자네를 빗대어 말한 건 아니야. 우리 이민자 전체를 말하는 거야. 우리나라가 못 살 때는 이민이 곧 천국이었어. 그런데 이젠 많은 게 바뀌었지. 이제 나이 들고 병들어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아. 이민자야말로 평생을 이방인으로 사는 사람들이야. 고향에서 멀어질수록 천국과도 멀어지는 거 같아. 고향에서 멀어질수록 더 많은 걸 필요로 하게 돼. 평생을 구하다가 죽는 거지. 이민자에게 정착이란 없는 거야. 영무 너도 잘 생각해 봐.”     


사장의 말을 듣던 영무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옷을 챙겨 급하게 편의점을 나서며 사장을 향해 소리쳤다.      


“사장님, 저 집에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영무가 차를 몰아 집으로 향했다. 편의점과 집은 채 10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였지만, 편의점 일에 열중하던 영무는 근무시간에 단 한 번도 집에 들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뭔가 강력한 불안이 영무의 발길을 집으로 이끌었다. “이민자에게 정착이란 없는 거야. 도망쳐 간 곳에 천국은 없어.” 사장의 말이 반복하여 뇌리를 스쳤다. 불길한 예감이 영무의 온 등골을 타고 돌았다. 이윽고 집에 다다라 현관문을 열어젖힌 순간, 영무의 눈에는 차마 볼 수 없는, 아니 두 눈으로 똑똑히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영무의 한 가닥 희망이 날카로운 유리 파편이 되어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씨에떼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