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영주권, Green Card> 2장. 불법 이민자 되어
세븐의 그림에 새겨진 롱다리 스시맨(Mr’ Sushi Long Legs)은 어느새 식당의 캐릭터가 되었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엄청난 광고효과를 가져왔다. 30분 이상 줄을 서서 기다리지 않는 한 영무의 스시를 맛볼 기회는 없었다. 게다가 그림을 직접 그린 세븐의 인기도 덩달아 올라 식당은 영업과 동시에 항상 문전성시를 이뤘다. 세븐의 싱그러운 미모와 그림 실력이 한몫을 톡톡히 했다. 영무는 행복한 비명을 지르며 세븐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세븐, 다음 주 휴무일에 나랑 골프 시합 어때? 듣자 하니 고등학교 시절에 골프 Varsity(학교 대표팀)였다면서? 나는 대표 선수는 아니었지만, 아마추어 중에선 날 쉽게 이기는 사람은 없었어.”
“좋아요, 릭. 그렇지 않아도 이 아름다운 여름날을 그냥 보내는 게 내키지 않았어요. 우울증에 빠져 골프를 잠시 쉬기는 했지만, 당신을 만나고부터 새로운 의욕이 생겨요. 골프장은 펌킨 릿지(Pumpkin Ridge)가 좋겠어요. 전장이 길고 아름다운 골프 코스죠.”
“좋아. 거긴 나도 좋아하는 코스야. 참, 거긴 코스도 좋지만, 스테이크가 제맛이야. 지는 사람이 스테이크 사는 거 어때?”
“후회하실 텐데요. 좋아요. 대신 저도 레이디 티가 아닌 블랙 티에서 당신과 같이 칠게요. 이래 봬도 제 최고 스코어는 3언더라고요. 지금은 실력이 좀 줄었겠지만요.”
눈부시게 아름다운 오리건주의 하늘 아래 초록은 빈틈없이 펼쳐져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과 초록 잔디, 천상과 지상을 또렷하게 가른 틈 사이로 하얀 윗도리와 짧은 진초록 치마를 입은 세븐이 등장했다. 영무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앞치마를 두르고 식당을 오가던 세븐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녀는 마치 8월의 청량한 햇살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헛것을 봤다는 듯 두 눈을 끔벅거리던 영무가 눈을 비비며 세븐에게 말했다.
“아니, 세븐 너 맞아? 그동안 식당에서 내가 봤던 그 세븐 맞냐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세븐의 주위를 도는 영무에게 세븐이 대답했다.
“릭, 당신이 그만큼 저에게 관심이 없었다는 얘기죠. 어떨 때 보면 당신은 일에 미친 사람 같았어요. 이제 식당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으니 당신 건강도 돌보면서 주위에도 관심을 좀 가져요. 특히 저한테요. 자 이제 게임을 시작해 볼까요?”
골프를 치는 내내 영무는 게임에 집중할 수 없었다. 식당에서 일하는 세븐은 생계를 위해 자기를 죽이는 사람이었다면 필드에서의 세븐은 생기발랄하게 날갯짓하는 한 마리 종달새 같았다. 세븐의 아름다운 몸짓은 영무의 심장을 가만두지 않았다. 그녀의 스윙과 움직임, 특히 그린 위에서 앉았다 일어나는 모습을 보며 영무는 그녀에게 눈을 뗄 수 없었다. 세븐의 생기 가득한 청량함에 영무의 감정도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세븐, 오늘 게임은 내가 도저히 못 이기겠어. 너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라서 게임에 집중할 수가 없어. 오늘은 내가 풀코스로 대접할 테니 적당히 봐줘 가면서 쳐. 그리고 잠깐 이쪽으로 와봐. 오늘의 이 역사적인 순간을 사진에 담아야겠어.”
세븐이 다가와 다정하게 영무의 허리를 감싸며 말했다.
“이왕이면 더 다정하게 찍어요. 릭, 고백할 게 있어요. 언젠가부터 당신의 냄새가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잠깐잠깐 당신을 스칠 때마다 당신 특유의 냄새가 났는데, 처음엔 그게 당신 냄샌 줄 몰랐어요. 나중에야 알게 됐죠. 그 이후로 제가 당신 요리할 때마다 제가 곁에서 계속 서성거렸는데 혹시 눈치챘어요?”
사진을 찍은 영무가 세븐의 눈을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이 닿을 듯 가까웠다. 영무는 더는 참을 수 없어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세븐의 두 팔도 영무를 껴안았다. 온몸으로 전해지는 촉감이 둘의 마음 또한 하나로 이어주었다. 영무는 싱그러운 여인의 향에 홀렸고 세븐은 투박한 남자의 향에 취해 갔다. 서로를 느끼며 한참을 안고 있다가 영무가 정신을 차린 듯 세븐을 밀쳐냈다.
“세븐, 미안해.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너도 알다시피 나는 불법 이민자야.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신세라고.”
“릭,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우리에게 내일은 없어요. 오늘 행복하면 그뿐이라고요. 내가 당신을 왜 좋아하는지 알아요. 당신은 불법 이민자이지만 누구보다 성실하게 당신의 삶을 살고 있어요. 우리는 언제 죽을지조차 모르는 존재예요. 오지 않은 날들을 걱정하느라 지금, 이 순간을 망치기 싫어요. 지금은 지금의 우리 감정에만 충실하기로 해요. 네?”
시간은 오후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18홀의 게임을 치르는 동안 영무는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몰랐다. 오직 세븐을 지켜보며 세븐만 생각했다. ‘이게 사랑인가?’ 영무는 생각했다. 갑자기 세상 모든 걸 얻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벅찬 감정도 잠시, 영무는 덜컥 겁이 났다. 세븐이 천사처럼 나타났고 식당은 승승장구했다. 가진다는 건 반드시 잃음을 전제로 한다. 많이 가진다는 건 많이 잃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는 세븐의 말에도 영무는 점점 불안감에 휩싸였다.
“세븐, 약속한 대로 오늘 저녁은 내가 풀코스로 대접할게. 세븐이 말한 대로 오늘만큼은 우리 행복하게 보내자. 가자. 어서, 배고프다.”
영무가 와인 잔에 와인을 따라 세븐에게 건네며 건배를 했다. 벌써 두 번째 와인이다. 먼저 나온 생선 요리와 함께 화이트 와인을 마셨고 뒤늦게 나온 스테이크와 함께 레드 와인을 마셨다. 어느새 얼굴에 홍조를 띤 세븐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시간은 저녁 7시를 향해가고 있었지만, 오리건의 하늘은 대낮처럼 밝았다. 마지막 잔을 비운 두 사람이 자리에 얼어나 각자의 차로 향했다. 영무가 말했다.
“세븐, 지금 운전 괜찮겠어? 내가 데려다줄게. 세븐 차는 내일 가져가는 게 좋겠어. 내일 휴식 시간에 내가 같이 와 줄게.”
“아니요. 너무 번거로워요. 대신 릭. 당신 차에서 잠깐만 쉬었다 갈래요. 저 이래 봬도 술 세요. 지금 저 아래 보이는 줄을 따라 반듯이 걸어볼게요.”
보도 블록에 그려진 일자 모양의 선을 따라 걷는 시늉을 하던 세븐이 휘청거렸다.
“릭, 당신 차 뒷좌석 문을 좀 열어 줄래요? 우리 잠깐만 얘기 나눠요. 그러면 술이 깰 거예요.”
영무가 자신의 SUV 차량 뒷좌석 문을 열어 세븐을 부축해 태웠다. 문을 닫고 반대편으로 가려던 찰나 세븐이 영무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들어와요. 릭, 멀리 갈 거 없어요. 어서 들어와서 그 문을 닫으라고요.”
이끌려 들어간 영무의 몸이 세븐의 몸 위에 포개졌다. 아직도 하늘은 밝았다. 영무가 차 문을 닫았지만 틴팅이 덜 된 차량은 안이 훤하게 보였다. 세븐은 아랑곳하지 않고 영무에게 키스했다. 영무도 참을 수 없다는 듯 거칠게 세븐을 안으며 키스했다. 골프를 치면서 세븐에게 느꼈던 욕정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세븐의 짧은 치마는 말려 올라가 존재 이유가 없었고 영무는 더욱 거칠게 세븐을 몰아붙였다. 둘이 온전히 하나가 되는 동안 그들에게 세상도 내일도 없었다. 심하게 요동치던 영무의 차가 어느 순간 그 움직임을 멈췄다. 하늘은 이제야 잔잔한 어둠을 깔고 있었다.
“세븐, 당신이 나에게 온 건 정말 행운이야. 불법 이민자가 된 후로 이런 사랑은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야. 언젠가 이 골프장에서 결혼식 하는 신랑 신부를 본 적이 있어. 너무나 아름다운 날, 너무나 아름다운 결혼식에, 너무나 아름다운 한 쌍이었어. 부러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고. 그 꿈 같은 일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을까? 사랑해 세븐, 나 너에게 미친 거 같아.”
“지금 프러포즈하는 거예요, 릭?”
“아니, 아니야. 프러포즈는 더 근사하게 해야지. 미안해 세븐, 내가 너무 성급했지? 반지도 없이 첫날부터 말이야. 내가 너무 좋은 나머지 잠깐 정신을 놓아버렸나 봐.”
“릭,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당신의 모든 면에서 그게 느껴져요. 하지만 우린 이제 첫걸음을 내디뎠어요. 그리고 서로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하죠.”
마지막 말을 마치고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던 세븐이 다시 말을 이었다.
“릭, 당신에게 미리 고백할 게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