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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상작가 해원 Dec 27. 2024

2-6. 죽음, 가장 행복한 날에

2장. 불법 이민자 되어


세븐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무에게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어릴 때 엄마가 절 버리고 떠난 뒤로 오늘처럼 행복했던 날은 없었어요. 릭, 오늘은 제 생일이었어요. 아빠마저 세상을 떠난 뒤, 전 제가 세상에 태어났다는 사실이 죽도록 싫었어요. 그래서 생일을 아예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죠. 근데, 당신과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행복하다는 생각과 함께 제 생일이 기억났어요. 당신은 저에게 새 삶을 선물해 줬어요. 사랑해요. 릭!”     


메시지를 바라보며 영무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말로 들었을 때와는 달리 사랑이라는 문자에는 알 수 없는 영원성이 담겨 있는 듯했다. 사랑한다는 말은 금세 허공으로 사라져 실체가 사라지지만, 글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영원할 것처럼 느껴졌다. 세븐의 말대로 영무에게도 새로운 삶과 사랑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그시 눈을 감고 세븐을 떠올리며 영무는 생각했다.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삶이 나에게 우연히 온 것처럼 사랑도 그렇게 오는 것인가? 삶과 사랑은 무엇인가? 삶이 있기 전에 우리에게 사랑이 먼저 있었던 건 아닐까? 사랑에 의해 창조된 우리는 삶이라는 여정에서 오히려 사랑을 잃어버린 건 아닐까? 삶은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는 과정인지도 몰라. 세븐은 나에게 그 근원적 사랑을 깨우쳐 주기 위해 나타난 천사일지도 모르겠어. 아니, 어쩌면 이 세상은 온통 보이지 않는 사랑이라는 물질로 이루어졌는지도 몰라. 세븐, 세상에 태어나 줘서 고마워, 나도 사랑해!’     


벅찬 기쁨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한참을 눈을 감고 서 있던 영무가 세븐의 문자에 답했다.     


“세븐, 생일 축하해. 미리 알았더라면 근사한 선물이라도 준비했을 텐데. 이 세상에 너라는 사람이 태어나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 오늘은 우리 둘 다 새롭게 태어난 날이야. 우리 오늘을 잊지 말고 영원히 기억하자. 나도 사랑해 세븐!”     


그릇의 깨진 틈으로 햇살이 들 듯 고통과 외로움에 상처 난 그들의 마음에 햇살이 들고 있었다. 사랑은 모든 상처를 치유한다.     




“Today, we gather to witness the union of Seven and Young-moo(Rick) in marriage. As they stand before us, they are here to affirm their love and commitment to one another. 오늘 우리는 세븐과 영무(릭)의 결혼을 목격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두 사람은 우리 앞에서 서로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확인하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교외의 작은 성당에서 결혼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머리가 눈처럼 하얗게 센 늙은 신부가 성혼 선언을 위해 영무에게 질문했다.     


“Do you take Seven to be your lawfully wedded spouse, to love and cherish each other in sickness and in health, for better or for worse, in life and in death? 신랑은 세븐을 합법적인 배우자로 삼고, 아플 때나 건강할 때, 좋거나 나쁠 때, 설령 죽음이 둘을 갈라놓는다고 해도 서로 소중히 여길 것을 약속합니까?”     


영무가 목이 메어 “예”하고 울음 섞인 대답을 했다. 영무의 눈에는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눈물이 가득했다.

      

영무의 대답을 들은 늙은 신부는 눈을 돌려 다른 편을 바라보며 같은 질문을 던졌다.     


“신부는 영무를 합법적인 배우자로 삼고, 아플 때나 건강할 때, 좋거나 나쁠 때, 설령 죽음이 둘을 갈라놓는다고 해도 서로 소중히 여길 것을 약속합니까?”     


성당 안에는 대답 대신 경건한 침묵이 흘렀다. 그 누구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가 한동안 이어졌다. 잠시 뒤 숨죽여 우는 영무의 흐느낌이 들려왔다. 신부는 잠시 고개를 숙여 기도하듯 묵념한 뒤 마지막 성혼 선언을 이었다.     


“By the power vested in me, I now pronounce you husband and wife. You may kiss the bride. 저에게 부여된 권한으로 이제 두 사람을 남편과 아내로 선언합니다. 신랑은 신부에게 키스해도 좋습니다.”     


참았던 영무의 울음이 성당 안을 가득 채웠다. 영무는 오열했다. 눈물의 결혼식에 세븐은 없었다. 세븐의 영혼만이 슬픈 눈물이 되어 영무의 눈에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세븐을 보낸 마지막 밤, 영무가 보낸 문자는 한동안 읽히지 않은 채 ‘1’이라는 숫자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 시간이 지나 세븐이 집에 도착할 시간이 지난 후에도 숫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전화를 걸어도 세븐은 응답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자정이 다가올 무렵, 드디어 숫자 1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1의 사라짐과 함께 세븐도 사라졌다. 집에도 식당에도 나타나지 않은 세븐을 발견한 건 다음 날 오후였다. 차와 함께 호수에 잠긴 세븐은 휴대폰을 손에 꼭 쥔 채 죽어있었다. 경찰 조사 결과 타살의 흔적은 없었다. 어려서부터 이곳에서 자라 호수 일대 지리를 손바닥보다 환하게 아는 세븐이 사고를 당했을 리도 없었다. 가장 행복했던 자신의 생일을 그녀는 끝끝내 넘기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그녀의 스물일곱 짧은 생은 끝이 났다. 마지막 순간, 영무가 보낸 문자를 읽으면서 꽃다운 그녀가 떠나갔다. 영무는 마지막 문자를 다시 읽으며 깊은 슬픔에 잠겼다.     


“세븐, 생일 축하해. 미리 알았더라면 근사한 선물이라도 준비했을 텐데. 이 세상에 너라는 사람이 태어나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 오늘은 우리 둘 다 새롭게 태어난 날이야. 우리 오늘을 잊지 말고 영원히 기억하자. 나도 사랑해 세븐!”     




세븐과의 영혼결혼식을 마치고 식당으로 돌아온 영무가 처음 마주한 건 세븐의 그림이었다. 식당 여기저기에 붙어 있는 세븐의 그림은 여전히 영무를 반겼다. 그녀의 체취가 채 가시지 않은 식당 구석구석을 돌며 영무는 마음속으로 세븐에게 말했다.     


‘세븐, 네가 없는 세상을 나는 살아가야 해. 이 모든 게 어린 생명을 가벼이 여긴 나의 죄에서 비롯됐어. 너의 죽음까지도 나의 죄로부터 비롯된 거야. 나는 더 고통받아야 해. 어떻게든 살아남아 남은 벌 다 받고 갈 거야. 어디까지가 나의 죄인지 보고 말 거라고. 그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줘. 그런데 세븐, 네가 없는 세상이라도 나 어떻게든 살아내 볼 거야. 하지만 네가 없는 식당은 이제 자신 없어. 네가 그려 준 저 그림도 이젠 고통일 뿐이야. 나 이곳을 떠나려 해. 그러니 너도 이제 여기 오지 마. 너와의 모든 추억은 내 가슴에 묻을게. 안녕 세븐, 사랑해. 너의 영혼까지도!’     




3년 후, 포틀랜드 번화가의 빌딩 17층, 사무실에서 영무가 한 여직원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말끔한 슈트를 차려입은 영무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밝았다. 서른일곱의 영무에게서 이제 제법 중년의 느낌이 났다. 불법 이민자라고 보기엔 너무나 근엄한 얼굴을 한 그가 앞에 선 직원에게 말을 건넸다.      


“도은칠 씨, 이번 계약 건은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 회사가 최초로 워싱턴주에 입성하는 계약이니까요. 포틀랜드에 있는 13개 편의점은 바닥 다지기에 불과합니다. 14호는 본격적인 확장의 시작입니다. 제 목표는 올해 안에 10개 편의점을 추가로 인수하는 겁니다. 시장에서 경쟁력이 없는 편의점은 일찍 사라지는 게 답이에요.”     


식당을 정리한 돈으로 영무가 시작한 건 꿈에 그리던 편의점 사업이었다. 영무에게는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물건을 싸게 수입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처음에는 하나의 편의점을 운영하면서 싸게 산 물건을 다른 편의점에 납품하는 일로 시작했다. 이런 아이템이 하나둘 늘어나며 수익이 발생하자 영무는 경영난에 허덕이는 편의점을 인수하기 시작했다. 3년간 13개의 편의점을 인수한 영무는 이제 명실상부한 사업가로서의 발걸음을 내디디고 있었다. 다만 아직 불법 이민자라는 낙인은 그의 자유를 방해했다. 불법 이민자는 미국의 국경을 벗어날 수 없다. 국경을 벗어나는 순간, 십중팔구는 다시는 미국 땅에 발을 디딜 수 없게 된다. 그런 가운데서도 사업에 대한 열의와 자신감은 그 어느 때보다 강했다. 과도한 제스처를 써가며 사업 얘기에 심취한 영무를 향해 한국인 직원 도은칠이 대답했다.     


“사장님, 이번 워싱턴주로 진출하는 14호점은 거의 식은 죽 먹기입니다. 강 하나만 건너면 갈 수 있는 밴쿠버지역 아닙니까. 그리고 이번에 점장으로 갈 친구는 이미 이곳에서 검증된 직원입니다. 8호점을 인수하고 불과 1년 만에 그곳 매출을 50%나 늘린 장본인이라고요. 편의점에서 50% 매출이 늘어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죠. 이번에도 걱정 붙들어 매시고 저를 믿어 주십시오.”     


도은칠, 그녀는 어린 두 아이의 교육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와 미국 시민권을 받은 기러기 엄마다. 딸만 일곱인 집안에서 막내딸로 태어나 은칠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했다. 은일, 은이, 은삼, 은사, 은오, 은유, 은칠이. 아이들과 함께 미국 시민권을 받자 외떨어진 남편은 돌연 변심했고 그녀는 남편과 헤어졌다. 바람난 남편은 아무 연락도 없이 생활비를 끊었다. 남편 이름으로만 되어 있던 모든 재산을 처분한 뒤 연락마저 끊겼다고 했다. 아이들과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시작한 편의점 아르바이트, 그곳 1호 편의점에서 영무와 만났다. 한국에서 회계학을 전공한 그녀는 영무의 사업이 확장되며 든든한 영무의 파트너이자 조력자가 되었다. 씨에떼(스페인어 7의 의미), 세븐(7)에 이어 또다시 7이 들어간 은칠(銀七)이라는 이름을 처음 봤을 때 영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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