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불법 이민자 되어
삶은 때때로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14호점을 성공적으로 인수하고 새롭게 편의점을 개장한 첫날, 영무가 고생한 도은칠을 격려하며 말했다,
“은칠 씨, 역시 은칠 씨의 수완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아니, 날 만나지 않았다면 이 능력 다 어쩔 뻔했어요. 이런 능력이 묻히는 건 우리 인류사에 엄청난 손실이라고요. 워싱턴주로 진출한 14호점의 성공적인 출발을 축하하고 또 은칠 씨의 고생에도 보답할 겸 오늘 저녁 어때요? 제가 근사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잠시 화색을 보였던 도은칠이 금세 난감한 얼굴이 되어 대답했다.
“이거 아쉬워서 어쩌죠? 오늘이 마침 제 생일이라 아이들이랑 집에서 파티하기로 했어요.”
영무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오늘이 정말 은칠 씨 생일이에요? 세상에, 이런 우연이 있다니! 사실 저도 오늘이 생일입니다. 7월 7일이요.”
“네? 사장님도 오늘이 생일이라고요? 제 이름이 은칠이잖아요. 원래는 ‘은칠’이가 아니라 ‘은말’이라고 지으려 했대요. 딸만 일곱이니 이제 딸은 그만이라는 뜻으로요. 근데 7월 7일에 태어나는 바람에 아버지도 운명이려니 하고 어쩔 수 없이 이름 지으셨죠. 만약 제가 아들이었다면 ‘금칠’이라고 지었을 거래요. 정말 웃기는 이름이죠. 이건 정말 우연이라기엔 너무 대단한 우연 아닌가요?”
“그러게요.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죠? 게다가 우리는 나이도 동갑이니 정말 한 날에 태어난 거네요. 사실 혼자 외롭게 생일 보내는 게 싫어서 오늘 겸사겸사 저녁 같이하려고 했던 건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은칠 씨 아이들이랑 다 같이 파티하는 거 어때요? 은칠 씨만 괜찮다면 제가 아이들도 좋아할 만한 식당으로 알아볼게요.”
도은칠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대답했다.
“사장님, 힘들게 번 돈 허투루 낭비하지 마시고 그냥 우리 집으로 오시겠어요? 제가 오늘 특별한 한국 요리를 할 거거든요. 저 요리 꽤 잘해요. 미국에 온 지 오래됐는데도 전 여기 음식 아직도 정이 안 가요. 늘 한국식으로 해 먹게 된다니까요. 사장님도 오랜만에 고향의 맛 한 번 느껴 보세요.”
영무는 입꼬리가 귀에 가 닿을 듯 환영하며 말했다.
“우와! 집으로 초대해 주시는 겁니까? 게다가 한국 음식까지. 그렇지 않아도 은칠 씨 아이들도 한번 보고 싶었는데 잘됐네요. 좋아요. 몇 시까지 가면 되죠? 와인은 제가 특별히 아끼는 걸로 가져가겠습니다.”
말끔하게 슈트를 차려입은 영무는 넘칠 듯 가득 채운 선물 바구니를 들고 은칠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이윽고 현관문이 열리는 순간,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아이 하나와 여자아이 하나가 기다렸다는 듯 동시에 달려와 영무의 품에 안겼다. 안쪽에서는 다급한 듯 은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장님, 죄송해요. 안쪽으로 쭉 들어오세요. 얘들아, 사장님 모시고 테이블로 와!”
저녁 6시, 아직도 햇살이 남아있는 포틀랜드의 하늘은 마치 허공에 끝이 없다는 걸 증명하듯 맑고 푸르렀다. 평소 그녀의 깔끔한 일 처리처럼 집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거실을 지나 뒷마당에는 아담한 테라스가 있었고 테라스 위 테이블에는 정성 가득한 한국식 생일상이 차려져 있었다. 갈비찜, 잡채, 정성스레 엮은 산적에 정갈하게 썰어놓은 김치 위로 아낌없이 뿌려놓은 깨까지, 영무는 어린 시절 엄마가 차려주시던 생일상을 마주한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그때 단아한 청록색 드레스를 입은 도은칠이 비어있는 테이블 가운데로 케이크를 내려놓으며 영무에게 말했다.
“이 케이크는 제가 아이들이랑 직접 만든 거예요. 사장님, 이쪽으로 앉으세요. 오늘은 파티하기에 최고의 날인 거 같아요. 게다가 생일 동지까지 만났으니 기쁨이 두 배, 아니 열 배는 되는 거 같아요. 저 오늘 기분 너무 좋아요. 사장님!”
“이 많은 음식을 은칠 씨 혼자서 다 한 겁니까? 음식 솜씨가 어마어마하군요. 이런 생일상 구경한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습니다.”
영무가 다정한 눈길로 은칠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근데, 은칠 씨, 아이들 앞에서까지 사장님이라고 부르니까 제가 너무 어색합니다. 그냥 편하게 영무 씨라고 불러요. 더는 사장님 소리 못 듣겠어요. 더군다나 여긴 회사도 아니고요.”
“좋아요. 영무 씨, 그렇지 않아도 사장님이라는 말이 너무 먼 사람처럼 느껴져서 저도 싫었어요. 이제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면 저 그냥 영무 씨라고 부릅니다.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예요! 편하게 대해줘서 고마워요. 사장, 아니 영무 씨!”
네 사람이 모두 테이블에 앉자 은칠은 케이크의 초에 성냥을 그어 불을 붙였다. 이윽고 아이들의 선창으로 시작된 생일 축하 노래가 테라스를 넘어 정원에 울려 퍼졌다. 노래가 끝나자 옆에 앉은 은칠이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영무의 귀에 대고 다정하게 속삭였다.
“영무 씨, 우리 촛불 같이 꺼요!”
두 사람은 사인을 주듯 서로 눈을 찡긋거리며 입술을 모아 함께 촛불을 껐다. 눈이 초롱초롱해져 바라보던 여자아이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귀여운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왜 촛불을 같이 꺼요? 아저씨가 엄마 남자친구예요?”
영무가 무안하다는 듯 얼른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하하하! 아니야, 아니야. 사실, 아저씨도 오늘이 생일이란다. 아저씨가 여기 온 이유도 엄마랑 생일이 같아서야. 신기하지?”
“아! 그렇구나. 저는 오늘이 아저씨 생일인 줄 알았어요. 근데 엄마는 생일이 두 번이야? 저번에 눈 왔을 때도 엄마 생일이….”
아이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도은칠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어머, 얘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때는 눈이 와서 눈사람 케이크 만들어 먹은 거지. 영무 씨, 우리 얼른 같이 케이크 잘라요. 이제 본격적으로 파티를 시작해야죠.”
멀리 하늘엔 어슴푸레 땅거미가 지며 붉게 타는 노을을 밀어내고 있었다. 테라스 위로 어느새 밝아진 조명 불빛이 시샘하듯 두 사람을 비추고 영무와 은칠은 마주 앉아 와인 잔을 기울였다. 조명에 비친 두 사람의 얼굴이 져가는 노을을 닮아 발그레 달아올랐다. 입꼬리에 가득 미소를 머금은 채 영무가 말을 꺼냈다.
“제가 늘 꿈꾸던 가족의 모습이 이런 거였어요. 오늘은 정말 많은 걸 생각하게 하는 날이네요. 미국에 온 지도 벌써 10년이 다 되어갑니다. 그놈의 영주권이 뭔지, 도대체 무얼 위해 돈을 벌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인간은 항상 결핍 속에서 살다가 결국 결핍 속에서 죽어가는 동물인 거 같아요. 하나가 채워지면 또 다른 결핍이 생기고 또 무언가를 채우면 무언가는 사라지고, 돈을 벌면 세월은 이미 저만치 가 있고, 이제 살만하다 싶으면 건강이 속을 썩이고, 이게 사랑이다 싶으면 사랑은 금세 식어버리죠.”
영무는 영주를 떠올렸다. 은칠의 아이들을 보며 영주가 보여줬던 초음파 사진 속의 아이를 떠올렸다. 지금쯤이면 저 또래로 자라 있을 아이가 떠오르자 가슴에 바윗덩이 하나가 짓눌러 오는 듯했다. 뒤이어 씨에떼와 세븐이 떠올랐다. 가슴 한편에 불안과 또 한 편에는 죄책감이 번갈아 가며 영무를 괴롭혔다.
“은칠 씨, 당신의 아이들을 위해 제가 작은 보탬이라도 되고 싶네요. 사실 저도 저만한 아이 하나가 있을 뻔했거든요. 딸인지 아들인지도 모르지만요. 이제 회사도 이 정도면 자리를 잡은 셈이니 개인사업자를 법인으로 전환해야겠어요. 사업도 조금 더 확장하고 수익성이 좋은 다른 사업에도 진출해 볼 생각입니다. 은칠 씨의 도움이 전적으로 필요합니다. 결국 믿을 사람은 한국 사람이죠. 은칠 씨,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영무 씨, 저 조금 섭섭한데요!. 저는 그냥 한국 사람 아니잖아요. 우린 이미 친구 아니었어요? 아니, 우린 한 가족이나 다름없죠. 전 영무 씨가 잘 되는 일이라면 뭐든 할 거예요. 이 회사는 제게도 소중한 곳이라고요. 저를 믿으세요. 정말 좋은 아이디어도 몇 개 있어요. 믿을 사람 하나 없는 이 차별의 땅, 외로운 땅에서 우리 멋지게 성공해 봐요. 저는 이미 모든 마음의 준비 끝났습니다. 영무 씨, 우리의 희망찬 미래를 위해 멋지게 건배 할까요?”
와인 잔을 치켜든 영무의 입가에 든든한 미소가 번졌다. 가족이라는 말이 영무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느새 땅거미는 내려앉고 세상은 어스름 속에 모습을 감추는데, 영무의 눈에 비친 은칠의 청아한 모습은 점점 더 또렷해져만 갔다. 예기치 않은 은칠과의 만남이 영무의 삶에 “똑똑” 노크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