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불법 이민자 되어
“릭, 당신에게 미리 고백할 게 있어요.”
어둠이 내린 밤하늘은 어느새 깊고 신비로운 푸른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별들이 반짝이며 마치 다이아몬드처럼 흩어져 있었고, 그 사이로 옅은 강물이 흐르듯 은하수가 흘렀다. 바람이 조용히 불어와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며 마치 세븐의 고백을 말리기라도 하듯 “쉬~쉬이~” 소리 냈다. 어둠은 빛이 사라진 세상을 모두 삼키고 고요한 세상엔 오직 세븐의 목소리만 존재하는 듯했다.
“릭, 한때 저는 저 자신을 너무나 미워했던 적이 있어요. 세상이 온통 지옥으로 느껴졌었죠. 사실, 지금 저랑 함께 사는 부모님은 두 분 다 제 친부모가 아니에요. 제가 7살 때 부모님이 이혼하면서 엄마가 저를 떠났어요. 그 후로 엄마에 대한 소식을 들은 적은 없어요. 엄마가 보고 싶어 아빠에게 울면서 물어보면 아빠는 엄마가 죽었다는 말만 반복했어요.”
영무는 말없이 세븐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영무의 어깨에 고개를 살포시 기대며 세븐이 말을 이었다.
“아빠는 엄마가 떠나고 두 번이나 새엄마를 데려왔어요. 만약 아빠가 살아있었다면 벌써 몇 번 더 이혼하고 재혼했을지도 몰라요. 아빠는 제가 대학생이 되던 해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죠. 그렇게 졸지에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엄마와의 동거가 시작됐어요. 그런데요. 릭, 도대체 사람들은 지속하지도 못할 결혼이라는 걸 왜 하는 걸까요? 그냥 지금의 우리처럼 사랑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저는 정말 죽는 날까지 마음이 변치 않을 거란 확신이 섰을 때 결혼할 거예요. 사랑은 최소한 그 정도의 확신은 있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영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세븐의 어깨를 감쌀 뿐이었다.
“그렇게 아빠가 황망하게 세상을 떠나고, 채 석 달도 지나지 않아 새엄마는 다른 남자랑 결혼했죠. 그 사람이 지금 저랑 사는 저의 아빠예요. 릭, 또 한 가지 이해가 안 가는 게 있어요. 왜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결혼하려고 하는 걸까요? 왜 가난한 사람들은 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걸까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외로움과 가난은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게 분명해요.”
영무가 기특하다는 듯 그윽한 눈빛으로 세븐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글쎄 말이야. 근데 세븐, 가난은 그 자체로 외로운 거 아닐까? 부자라면 언제든 외로움 따위는 돈으로 해결할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돈이란 참 위대한 거야.”
“맞아요. 돈은 참 위대하죠. 저는 그림 공부를 더 하고 싶었어요. 런던에 있는 세인트 마틴스 예술대학교(Central Saint Martins)는 오래된 저의 꿈이었죠. 하지만, 누가 저에게 그 많은 학비를 대줄 수 있겠어요. 미대를 졸업하고 한동안 제가 우울증에 빠져 있었던 이유도 어찌 보면 돈과 연관된 거예요. 제가 고백하려는 것도 그와 무관치 않고요.”
갑자기 표정이 바뀐 영무가 흠칫 놀라듯 대꾸했다.
“오늘 고백하려는 게 혹시 돈 문제야?”
“아니에요. 릭, 오늘 제가 고백하려는 건 죽음이에요. 저는 그림에 대한 열망이 좌절됐을 때 죽음을 선택한 적이 있어요. 죽음 직전까지 가보았죠. 음독자살을 기도했었거든요.”
세븐이 잠시 침묵에 빠져 그때를 회상했다.
포틀랜드의 2월은 하루도 쉬지 않고 비가 내린다. 10월부터 시작된 우기는 좀처럼 햇살을 보여주는 일이 드물다. 깊은 우울감에 빠진 세븐은 창이 반쯤 보이는 반지하 방에서 바로 눈높이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빗방울은 떨어져 어디론가 부지런히 흘러간다. 모든 것이 흘러가고 지나간다는 사실이 세븐을 한없는 무력감에 빠지게 한다. 반지하 창문 위에 올려진 마리화나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인다. 파티용 마리화나가 기분을 업시켜 흥분하게 만든다면, 세븐이 꺼내 피운 마리화나는 기분을 한없이 가라앉힌다. 그동안 쌓여있던 감정의 무게가 세븐을 심연으로 이끈다. 몸은 형체를 잃어 연기처럼 사라지는 느낌이었지만, 정신은 오히려 점점 또렷해진다. 세븐은 손을 내밀어 미리 준비해 둔 약물을 한 모금에 털어 넣고 주저 없이 삼켰다. 반지하 방은 어둠으로 뒤덮이고 빗소리는 끊어졌다. 세븐에게서 모든 세상이 사라졌다.
“도대체 뭘 마신 거야? 일단 혈압과 심박수는 좋아지고 있어. 의식이 돌아오지 않으면 기도삽관이 필요할 수도 있어. 위세척 준비해.”
다급한 의사의 말이 세븐의 귓가를 스쳤다. 수액과 약물 투여를 마친 세븐의 의식이 돌아오고 있었다. 의식이 확인되자 의사는 세븐을 엎드린 채로 위세척을 시작했다. 차가운 위세척 용액이 온몸을 휘감아 도는 사이 세븐은 죽음과 마주하고 있었다. 일곱 살 때 자기를 버리고 떠난 엄마, 대학생이 되던 해 심장마비로 세상을 등진 아빠가 차례로 나타나 세븐에게 소리쳤다.
“세븐, 지금 어딜 찾아온 거야? 여긴 아직 네가 올 곳이 못 돼. 어서 돌아가. 그리고 다신 여기서 얼씬거리지 마. 알았어? 정신 차려!”
“엄마, 아빠. 저 너무 춥고 무서워요. 여기가 이런 곳인지 몰랐어요. 이렇게 춥고 괴로운 곳인 줄 몰랐다고요. 저 돌아가고 싶어요. 따뜻한 곳으로, 제발 절 보내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엄마, 아빠!”
의사가 위관을 통해 용액을 주입하는 동시에 세척된 액체가 잘 빠져나오도록 세븐의 몸을 뒤척였다. 세븐은 삶인지 죽음인지 모를 혼돈 속에서 끝없이 외쳤다.
“살려주세요. 제발 절 살려 주세요. 이렇게 죽을 순 없어요.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간절히 소리쳐도 목소리는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죽음과 마주한 순간, 삶에 대한 세븐의 욕구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렬했다. 육체에 흐르는 온기, 빗방울 소리, 사람들의 재잘거림과 바람이 내는 소리가 그리웠다. 고통이 아닌 순간 속에서 정상적으로 흐르는 시간이 그리웠고 생명의 호흡을 알아차릴 수 있는 자연 공간이 그리웠다. 춥고 캄캄한 미지의 세계를 벗어나고 싶었다. 어느새 세븐의 영혼은 빛과 온기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으로 가득 찼다.
“이제 정신이 좀 드세요? 늦지 않게 병원에 도착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삶에 대한 세븐의 의지도 한몫 단단히 했어요. 의식이 없는 순간에도 살려달라고 얼마나 외쳤는지 몰라요. 추가적인 중독 증상이 없는 걸로 봐서 조만간 퇴원할 수 있을 거 같아요. 퇴원하면 바로 집으로 갈 수 없다는 건 알죠? 당분간 요양원에서 심리상담과 함께 예후를 지켜봐야 합니다. 아무튼 다시 돌아온 걸 축하해요. 세븐!”
“릭, 그 순간 제가 얼마나 살고 싶었는지 당신은 모르실 거예요. 진짜 죽음 앞에 서 보지 않은 사람은 삶의 소중함을 몰라요. 이 순간, 이 광경과 소리가 얼마나 소중한지요. 입에 들어가는 달콤한 초콜릿과 코를 자극하는 커피 향, 지금 당신에게서 느낄 수 있는 냄새와 촉감 같은 감각들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몰라요. 그리고 사랑, 평생을 미워하며 살았던 엄마와 아빠, 전 그분들이 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게 됐어요.”
영무가 세븐을 깊게 끌어안았다. 세븐 특유의 향기가 영무의 코를 타고 들어왔다. 영무는 향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천사의 향기가 있다면 바로 이런 향일 거야.’라고 생각했다.
“세븐, 내가 널 지켜줄게. 비록 내가 지금은 초라한 불법 이민자 신세지만, 너와 함께라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을 거 같아. 너의 외로움과 우울, 이젠 내가 다 짊어지고 갈게. 넌 그냥 나에게 기대기만 해. 그리고 지금부터 너의 삶과 꿈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거야. 네가 죽을 고비를 넘고 얻은 두 번째 삶이라면 나에게도 두 번째 삶이나 다름없어. 너나 나나 덤으로 사는 인생, 까짓 거 멋지게 살아보자. 어때 세븐? 나랑 함께 할 거지?”
“고마워요. 릭! 그리고 사랑해요. 사실 오늘 당신에게 고백하려던 건 죽음이 아니라 사랑이에요. 저 처음부터 당신에게 빠졌어요. 당신 식당에서 면접을 보던 그 순간부터요. 당신에게서 알 수 없는 고독과 슬픔이 느껴졌어요. 그리고 알 수 없는 깊은 사랑도 함께요. 죽음의 문턱을 다녀온 후로 그런 것들이 보이고 느껴져요. 저는 당신이 꼭 행복해질 거라 믿어요. 어쩌면 행복은 당신의 운명인지도 모르겠어요. 물론 지금도 행복하지만, 혹 또 다른 불행이 온다 해도 당신은 반드시 행복해질 거예요. 제 말을 끝까지 믿으세요. 릭, 알았죠?”
둘은 서로를 깊이 껴안으며 키스했다. 어느새 초승달이 삐죽 떠올라 두 사람을 시샘했다.
“세븐, 그럼 잘 가. 운전 조심하고. 내일 지각하면 안 된다. 데려다준다는 데도 하여간 고집은 세단 말이야. 지각하지 말라는 건 농담이고, 정 피곤하면 내일은 하루 쉬어도 돼. 화요일엔 손님이 그다지 많지 않으니까.”
영무의 제안에 세븐이 빙긋이 웃으며 가르치듯 대답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사장님,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하셔야죠.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돌아서 가는 세븐의 차량 불빛을 한동안 바라보던 영무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흘렀다. 어둠이 내린 허공 가득 세븐의 모습이 별빛인 양, 달빛인 양 내려앉았다. 허공에 대고 영무가 나지막이 말했다.
“잘 가, 내 사랑, 나의 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