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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상작가 해원 Dec 06. 2024

2-3. 롱다리 스시맨

<소설 영주권, Green Card> 2장. 불법 이민자 되어


“Shit, Oh my fucking goodness!”     


놀란 씨에떼가 소리치며 흐트러진 이불을 당겨 벌거벗은 몸을 감쌌다. 이불이 한쪽으로 당겨지자 또렷하게 드러난 흑인 남자의 알몸을 보며 영무는 또 한 번 소스라치게 놀랐다.     


“Richard, are you?”      


건장한 흑인 남성의 온몸은 먹이를 쫓아 초원을 달리는 한 마리 들짐승처럼 발기되어 있었다. 몸은 땀으로 젖어 검은 살빛이 더욱 검게 빛났다. 남자의 검은빛을 보자 영무는 신기하게도 아버지 공장의 화재가 떠올랐다. 시커멓게 타 재만 남은 공장에서 망연자실 바라보던 부모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보험마저 만료되어 보상받을 길 없었던 그 상황이 비자가 만료되어 불법 이민자가 된 자신의 현실과 겹쳐졌다. 살기로 가득했던 영무의 눈에 스르르 힘이 빠졌다.      


“지금부터 아무 말도 하지 마. 빨리 옷 입고 둘 다 내 집에서 나가. 당장!”      


씨에떼가 옷을 들고 욕실로 뛰어간 사이 흑인인 리처드가 급하게 옷을 주워 입으며 영무에게 말했다.     


“릭, 미안해요. 처음엔 이 집이 당신 집인 줄 몰랐어요. 당신이 씨에떼와 같이 살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고요. 나중에야 알게 됐어요. 사실 씨에떼와 제가 만난 건 릭이 씨에떼를 만나기 전부터예요. 그러니 절 너무 나쁜 놈으로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     


리처드는 영무가 편의점에서 일할 때 같이 일하던 직원이었다. 20대 초반에 키가 크고 골격이 다부져 온갖 궂은일과 힘쓰는 일을 도맡아 하던 한없이 착하고 성실한 친구였다. 하지만 술에 취하면 흑인인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 앞에서 그의 폭력성은 절제를 잃었다. 여러 번의 폭행 전과가 그의 삶을 대변했다. 흑인 특유의 어슬렁거림으로 현관을 빠져나가는 그를 보고 영무는 말문이 막혔다.     




두 사람이 각각의 방향으로 사라진 침대의 머리맡에는 우연인 듯 베개 두 개가 사람 인(人) 자 모양으로 맞대고 서 있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이 아닌 무언가에 의존하여 살아간다. 인간뿐만이 아니라 이 우주는 모두 서로에 의존하여 존재한다. 지금 살아있는 모든 생명도 과거의 어느 한순간이 사라지면 지금의 모습 그대로 존재할 수 없다. 우리 역시 부모라는 존재에 의존하여 이 땅에 있고 모든 생명에 예외는 없다. 의존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우리의 삶에서 무엇에 의존하여 사느냐는 행복과 불행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맞대고 선 베개를 보며 영무는 생각했다.     


‘나는 씨에떼에게 의존하여 무엇을 얻으려 했는가? 그녀를 통해 불법 이민자의 신분을 벗으려는 나의 욕심이 문제였다. 가난한 이민자의 딸인 어린 씨에떼를 통해 외로움을 달래고 때로는 욕정을 해소하며, 영원히 사랑하기보다는 나의 목적이 채워지면 언제든 떠날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가. 이 모든 것은 철없는 씨에떼에게 의존하려는 나의 욕심에 대한 하늘의 단죄일 지도 모른다. 미련 없이 보내자.’     


옷을 입은 씨에떼가 욕실에서 나와 영무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릭, 정말 미안해요. 제가 차마 리처드를 뿌리치지 못했어요. 나만큼 리처드도 소외되고 불쌍한 사람이에요. 다시는 그를 만나지 않을게요. 제발 저를 내쫓지 말아 주세요 릭. 전 정말 갈 곳이 없어요. 당신 영주권 받는 그날까지 만이라도 머무르게 해 주세요. 다른 건 요구하지 않을게요. 저도 이제 나가서 돈 벌게요. 제발요. 릭.”     


씨에떼의 큰 눈망울에서 참회의 눈물이 끝없이 흘러내렸다. 뿌리치고 돌아서는 영무의 몸에 이끌려 씨에떼가 바닥에 쓰러졌다. 노란 카펫 위에 쓰러져 우는 씨에떼를 보며 영무는 영주를 떠올렸다. 노란 은행잎 위에 연보랏빛 봉투와 함께 쓰러져 울던 영주의 모습이 눈물 맺힌 영무의 눈동자를 노랗게 물들였다. 영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씨에떼, 난 처음부터 우리가 영원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어. 그건 씨에떼도 마찬가지일 거야. 처음부터 무리였고, 처음부터 나의 욕심이었어. 넌 아직 어리고 예뻐. 그러니까 열심히 살다 보면 나보다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거야. 어차피 나 이 집에서 나갈 생각이었어. 이미 빠져나간 이번 달 월세랑 보증금을 합치면 여기서 석 달은 살 수 있을 거야. 네가 여기서 살아. 난 당분간 편의점에서 지내다가 새로운 집 얻으면 돼. 사실, 여기서는 조금도 더 머무르고 싶지 않아. 잠도 잘 수 없을 거 같고. 그러니 우리 여기서 그만 헤어지자. 내가 나갈게. 행복하게 잘 살아, 씨에떼!”     


흐느끼는 씨에떼의 등을 두드리며 돌아서는 영무의 눈에 서러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하지만, 한 편으로 밀려드는 알 수 없는 편안함과 행복감에 영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롱다리 스시맨(Mr’ Sushi Long Legs), 오늘도 매출 신기록이야. 역시 당신이 만드는 스시는 최고야. 이러다가 금세 부자 되겠는걸!”     


홀 서빙을 담당하는 백인 여자 세븐(Seven)이 마감 전표를 들고 주방에 있는 영무를 향해 다가서며 말했다.      


“오! 세븐, 그래? 이제 금융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모양이야. 경기가 좋아지는 게 피부로 느껴져. 내가 스시를 잘 만드는 게 아니라 운이 좋았던 거지. 게다가 세븐 같은 멋진 여자도 만났고 말이야.”     


3년 전 편의점을 그만두며 모은 돈으로 영무는 작은 스시 가게를 시작했다. 영무가 인수한 식당은 한국인이 운영하던 포틀랜드(Portland) 변두리의 허름한 식당이었다. 불황과 매출 부진으로 부도 위기에 몰린 전 식당 사장은 밀린 세도 내지 못하고 한국으로 도피했다. 영무의 성실함을 알고 있던 한국인 건물주가 영무에게 식당 운영을 제안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신분증과 사회보장번호(Social Security Number)만 있으면 불법 이민자라도 사업할 수 있다. 심지어 주에 따라 다르게 운영되는 운전면허 제도를 활용하면 만료된 면허증을 갱신할 수도 있다. 다만 이민국의 단속에만 걸리지 않으면 된다. 그런 내용을 잘 알고 있는 영무에게 적은 인수금액과 월세 조건은 매력적인 기회로 다가왔다. 따지고 보면 불법 이민자 신분을 벗어나기 위해 돈만큼 좋은 수단도 없다.     


한국에서 부모님을 도우며 정육식당에서 배운 칼질과 음식 솜씨는 영무의 식당 운영에 큰 도움이 되었다. 넉넉한 인심과 더불어 특유의 부지런함과 친절함으로 다가가는 영무에게 손님들은 금세 호의를 가졌다. 손님이 점점 늘어나며 나름 유명세를 치르던 영무에게 ‘롱다리 스시맨(Mr' Sushi Long Legs)’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영무의 큰 키와 식당의 스시 맛을 한꺼번에 홍보할 수단이 된 ‘롱다리 스시맨’으로 인해 식당 매출은 하루가 다르게 최고액을 갈아치웠다. 영무에게 ‘롱다리 스시맨’이라는 별명을 지어 준 사람은 바로 지금 영무를 도와 서빙하는 백인 여자 세븐(Seven)이었다.     


포틀랜드 예술대학교를 졸업한 세븐은 마땅히 취직할 곳을 찾지 못했다. 그림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던 그녀였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은 그녀의 공부를 허락하지 않았다. 늘 우울감에 빠져 살던 그녀가 생활비를 벌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찾은 곳이 바로 영무의 식당이었다. 2015년 봄, 영무가 식당을 시작한 지 1년 반이 지났을 때였다. 늘 밝은 모습으로 성실하게 일하는 영무와 함께하면서 그녀도 점점 활기를 되찾아갔다. 어느 날 한가한 오후, 세븐은 영무가 저녁 손님을 맞기 위해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스케치북을 꺼냈다.     


“릭, 제가 스케치하는 동안 잠깐만 멈춰 줄 수 있을까요? 잠깐이면 돼요. 정말 잠깐이요.”     


“세븐, 나 바빠. 세븐이 예술대학 졸업했다는 건 알았지만 그림을 그리는 줄은 몰랐네. 미안하지만 난 주방에서 일하는 후줄근하고 쓸쓸한 모습 싫어. 나중에 더 멋진 모습 그려 줘. 그때는 내가 그림값을 톡톡히 치를게.”     

영무는 한사코 손사래를 쳤다.     


“릭, 당신이 요리할 때 얼마나 멋진데요. 후줄근하고 쓸쓸하다는 건 말도 안 돼요. 당신도 알다시피 내가 처음 일하러 왔을 때 우울증이 심했잖아요. 근데 당신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 보면서 나도 힘을 얻었어요. 당신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겨 오랫동안 보고 싶어요. 그러면 늘 힘이 나고 용기를 얻을 것 같아요. 그러니 릭, 정말 잠깐만 멈춰서 포즈를 취해주세요. 네?”     


그렇게 스케치가 끝나고 며칠 후 세븐이 한 편의 완성된 그림을 들고 식당에 들어섰다. 너무나도 잘 그려진 한 편의 수채화에 영무의 모습과 스시가 모양별로 특징을 갖추고 진짜인 듯 들어있었다. 그림을 잘 보이는 곳에 걸며 세븐이 말했다.     


“이 그림이 있어야 할 곳은 여기예요. 집에다 두었더니 릭, 당신의 에너지가 소멸하는 느낌이었어요. 이 그림은 이곳에서 손님과 함께해야 해요. 그래도 되죠 릭?”     


그림을 붙이는 세븐을 뒤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던 영무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림의 오른쪽 하단에는 <Mr’ Sushi Long Legs>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릭, 그림을 그리고 나서야 당신의 다리가 길다는 걸 알았지 뭐예요. 키가 큰 줄은 알았지만, 다리가 이렇게 길 줄이야. 그래서 당신의 별명을 이렇게 지었어요.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어느덧 34살이 된 영무, 지난 몇 년간은 하루하루 삶에 지쳐 앞만 보고 달려왔던 세월이었다. 씨에떼와 헤어진 후 다시는 여자에게 의존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하지만, 이제 27살이 된 세븐은 영무에게 더 이상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천사였다.     


“오, 세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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