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털처럼 가벼운 독설
나에게는 장점인 동시에 단점인 면이 있다.
‘상대방의 말을 흘려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떨 땐 다른 사람을 세심하게 챙길 수 있어 좋은데 또 어떨 땐 상대방이 깊이 생각하고 한 말이 아님에도 나 혼자 끙끙 앓을 때가 있다는 것.
엄마와 통화한 지 며칠 된 것 같아 전화를 드렸다.
“응, 딸 어쩐 일이야.” 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늘 그렇듯 짱짱하다.
“별일 없죠? “로 시작해 명절엔 언제 친정으로 가는지, 오빠네는 어쩌는지, 식구들 건강부터 친척들 건강얘기까지 한참을 통화했다.
명절 일정을 얘기하다 엄마가 집으로 가실 표를 미리 사놨다 말씀드렸더니
“벌써 샀어?”
“네, 버스가 자주 있는 게 아니어서 표가 있네 없네, 밥을 먹네 마네 할 것 같아서 미리 샀어요. 명절 연휴라 그때 닥치면 사정이 또 어떨지 모르기도 하고요.”
“내가 뭐 급할 게 있나, 아래층 아이들 돌보던 일도 방학이라 안 해서 안 바쁜데.”
“응, 그건 엄마가 그런 거고 우리가 바빠요.”
1차 독설 발사.
‘내가 뭐 급할 게 있냐’는 엄마의 말이 무슨 뜻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 말속에는 우리가 친정에 가는 건 가는 거고, 엄마를 모시고 오빠네로 가는 건 가는 거고, 그런 거와 상관없이 우리 집에서 며칠 머물고 싶은 마음을 말씀하고 싶으신 거다. 그걸 단박에 알아들었지만 단칼에 'NO'를 외쳤다. 예전엔 참 못 하던 ‘NO' (지금도 남들한테는 잘 못 한다.) 그러고 나서 며칠 동안 마음이 불편하다. 대답을 단호박으로 해 놓고도 엄마의 말이 흘려들어지지 않은 거다. 불편한 마음에 엄마가 우리 집에서 며칠 동안 머물 수 없는 이유들을 머릿속에서 연신 찾아내고 있는 나를 본다. 또 한 번 ‘나는 참 모진 딸이야’라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나도 몰라, 어쩔 수 없어.’라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잡고(?) 있다.
내 건강, 남의 건강 얘기하다가 이번엔 ‘치매’ 얘기가 나왔다.
엄마는 자주 말씀하시곤 한다. 자식들 얼굴도 못 알아보는 치매는 걸리지 말아야 할 텐데 하는 걱정에 날마다 기도하신다고. ‘그렇죠’하고 넘어가면 될 일을 나는 또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암 같은 질병은 괜찮고, 치매는 안 되는 건가? 뭐 다 똑같지. 나는 어떻게 생각하면 잊고 싶은 거 잊어서 좋을 것 같기도 하더구먼. “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한 스푼 얹어 2차 독설 발사.
자식이 여럿인데도 요양원에 계신다는 지인 얘기를 하시길래 자식이 여럿인 게 무슨 상관이냐고, 일상생활을 하기 어려우면 전문기관의 도움을 받는 게 당연하다고, 병에 걸리면 치료하느라 입원하는 게 당연한데 치매는 왜 다르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고, 그렇다고 자식들을 못 만나는 것도 아니니 슬프게만 생각할 일 아니라고, 길게도 말했다. 이쯤 되면 엄마가 아무 말도 못 하게 하는 3차 독설.
내가 암만 마음에도 없는 독설을 퍼부어도, 때로 독설에 진심을 담아봐도 엄마는 이미 내공이 있어서 흔들림이 없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이미 뱉어 놓은 말에 엄마가 많이 섭섭해하진 않을까 끙끙 앓는다. 엄마가 너무 아무렇지도 않은 것도 싫고, 너무 섭섭해하는 것도 싫으니 내 맘도 참 알 수가 없다. 엄마에게 빈말로도 여지를 주지 않는 이유는 내가 자신이 없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엄마와 함께 지냈던 시간이 너무 힘들었는데 한참 지난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나를 자꾸 웅크리게 만든다. 엄마는 여전히 꼿꼿하고, 짱짱하다.
엄마에게 미안하지만 이제 나는 참아낼 자신이 없다. 그러고 싶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