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 전쯤 아빠의 기일이었다.
아빠 돌아가신 지 만17년.
그전에는 아빠 기일에 어땠더라? 10여 년쯤 우리 가족에게 풍파가 몰아치기 전엔 아빠 기일마다 모여 추도예배를 드렸는지, 그냥 모이기만 했는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10여 년 전쯤 우리 둘째가 뱃속에 있을 때 친정에 큰일이 있었다. 가족인데 서로가 서로를 탓하며 세상 미운 관계가 되어버린 일이었다. 그 일로 얼마동안은 명절이나 생일에도 만나지 않았다. 각자 자기 발등에 불을 끄기에도 벅찬 시간들이어서 얼굴을 마주 보며 서로 얼마나 힘든지 확인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때, 내 발등에 떨어진 불은 ‘엄마’였다. 엄마를 그렇게 표현하는 게 좀 그렇긴 하지만 그때 내 마음은 정말 그랬다. 엄마가 살던 집을 급하게 정리하고 나와 함께 살게 된 것이다. 난 몸도 맘도 준비되지 않은 채로 엄마의 살림살이를 내 집으로 옮겼다. 지금 생각하면 ‘가족이니까’ 모두가 고통을 분담하는 일이었고, 그래서 수년이 지난 지금 이만큼이라도 안정이 된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땐 아무 잘못 없는 내가 왜 이 어려움을 감수해야 하는지 악에 받쳐 하루하루 보냈던 것 같다. 말도 안되는 그 상황에도 여전히 꼿꼿한 엄마와 함께 지내는 시간은 다시는 돌이키고 싶지 않을 만큼 상처였고, 그 상처가 낫기를 바라기보다 그저 동여매고 견디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지나고, 내가 남편 직장문제로 이사를 하게 되면서 엄마와는 다시 따로 살게 되었는데 1년 정도의 시간차가 있긴 했지만 나 이사한 곳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엄마의 집을 얻었다. 그로부터 다시 얼마의 시간이 지나 나는 지금 있는 곳으로 옮겼지만 엄마는 그곳에 남았다. 남편 하는 일 때문에 번번이 이사를 하게 되는 건데 그때마다 엄마의 집도 옮길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그렇게 엄마는 그곳에, 나는 이곳에 살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엄마가 우리 집으로 오면서부터였다.
아닌가 내가 엄마와 다시 떨어져 살면서인가?
그것도 아니면 내가 엄마를 그곳에 두고 여기로 이사를 오게 되었을 때부터인가?
암튼, 이모 고모 할 것 없이 친적들에게 나는 ‘엄마를 돌보지 않는 딸’이 되었다. 엄마가 그분들께 뭐라고 말을 했길래 내가 그런 대접을 받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암튼 나는 그런 년이 되었다. 내게 전화하셔서는 세상 다정한 말투로 ‘네가 고생이 많다’하셨지만 그 뒤에는 ‘이래야지 않겠니?’ ‘그래도...’ ‘그렇긴 하지만...’ 하셨다. 그런 전화를 받고 나면 모두들 내 탓이고, 내 책임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 늘 마음이 무겁고 힘들었다.
한 달 전 아빠 기일에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우, 정말 짜증 나 죽겠어.”
“왜요, 무슨 일 있어요?”
“고모가 또 전화해서는 아빠 기일인데 애들은 왔냐, 아빠한테 가긴 하냐, 아니 때마다 왜 이리 참견인지 모르겠어. “
그렇다.
고모는 명절이면 명절인데 자식들이 어쩌는지 시시콜콜 따져 물으시는데 엄마는 그게 너무 듣기 싫다. 그 전화 나도 한 번씩 받았었는데 내 반응이 맘에 안 드셨는지 요즘은 오빠한테 전화하신다. 엄마한테는 당연하고.
그런 전화가 왔다는 얘길 전해 듣는 나도 속이 살살 긁히는데 번번이 직접 듣는 엄마는 오죽하겠나.
“아니 아빠 돌아가신 지 벌써 십수 년이고, 자식이 50도 넘었는데 알아서 하겠지 뭘 그리 간섭이시래. 기일에 모일 수 있어서 모이는 것도 좋지만 여건이 안 되면 각자 있는 곳에서 아빠를 기억하고 추억하고 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오빠가 그렇게 그리우시면 고모가 다녀오시면 되지. 아빠 기일인 거 며칠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빠를 존경하고 기억하며 사는 게 더 중요한 거 아닌가? 나는 그렇게 사는데 매번 왜 그러시는 거야 진짜.”
내가 더 흥분해서 떠들었다.
“아우, 우리 딸 진짜. 나 눈물 나.”
“80살인데 아직도 시집살이를 시켜 아주 그냥”
“아니, 뭐 내가 그렇게 시집살이를 하진 않았지만 고모는 하여간 옛날부터 좀 그랬어.”
“아직도 이래라저래라 하는 게 시집살이지 뭐.”
다행히 나의 거침없는 고모 흉에 엄마는 위로를 받으신 것 같다.
남들 눈에 어떨지 모르지만 엄마를 가장 챙기는 건 나다. 자주 통화하며 잔소리를 주고받는 것도 나고, 그러면서 힘을 주고받는 것도 나다.
내 오빠도 아니고, 엄마의 형제들도 아니고, 엄마의 시집식구들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니 엄마를 흉볼 수 있는 사람도 나뿐이다. 그렇게 애증의 관계가 되었지만 말이다.
곧 설이 다가온다.
며칠 전에 설에는 어쩔 거냐고 고모가 엄마에게 전화를 또 하셨단다.
그날도 나는 아빠 기일에 그랬던 것처럼 엄마보다 조금 더 큰 소리로 왕왕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