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황)_1. 만남

1.5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마지막 관문

by 크렁 아저씨

약을 먹기 시작하면, 금방 불안이 가라앉을 거란 기대는, 출국 날짜가 다가오면서 점점 사라져 버렸다. 대신 그 자리를 공포와 염려가 차지해 버렸고, 조금도 어떤 기대나 희망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심지어, 기존에 복용하는 약으로는 하루하루 버티기가 너무 힘들고, 돌아가는 비행에서 어떤 것이라도 도움을 받기 위해 다시 새로운 정신과를 찾게 되었다.


나름 친절한 병원이라고 해서 이미 일주일 전에 예약을 해놓은 상황이었다. 이미 진단을 받았다고 했지만, 다시 진단을 위해 몇 장의 문답지를 꽉 채워야 했다. 차분하게 환자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의사 선생님인 것 같았다. 그러나, 며칠 후면 떠나서 지속적인 치료를 받을 수 없는 나의 상황 때문인지, 임시 조치만 취해주는 것 같이 느껴졌다. 역시, 공황장애 진단과 함께, 아침, 저녁으로 자나팜 0.25mg을, 비상약으로 크로제팜 5mg, 그리고, 저녁에 불안이 더 올라와서 잠들기가 어렵다고 하니, 자기 전에 먹을 항불안제 렉사프로 5mg을 추가로 처방해 주었다.


그러나, 역시 새롭게 처방받은 약만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기가 어려웠다. 핸드폰 메모장에 불안할 때마다 적어놓은 수많은 질문에 대한 궁금증 해결과 이런 힘든 상황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살려달라는 심정으로 다시 3일 만에 병원을 찾았다.


의사에게 물어보기 위해 메모장에 적었던 내용

전반적으로 지난번 진료때와 비교해 답답함이나 불안으로 인해 삶에 질이 많이 떨어졌음. 기존 처방 용량으론 너무 힘듦. 추가적으로 비상약을 먹었을 때 평안함.

12월 31일부터 불안, 답답한 느낌이 오래 지속됨.

답답함으로 인해 식사하기가 어려움.

이틀에 한번 꼴로 새벽에 잠이 깨어 답답함이 시작되며 강한 불안이 계속되어서 잠을 못 이룸.

아침, 저녁 약을 먹었는데도 힘든 경우(약의 용량이 부족한 것은 아닌지) 추가적인 약을 얼마큼 먹을 수 있는지? 아침, 저녁 먹는 약의 용량 증량이 필요한 것은 아닌지? 불안이 시작되면, 호흡이나 이완으로는 불안의 연쇄고리를 끊어낼 수 없고 지속됨. 추가적인 약을 먹었을 때는 효과가 있음. 하루 정해진 용량 내에서 불안이 더 커지기 전에 약을 빨리 먹는 것이 좋은 것인지?

일반적으로 공황발작은 15분 정도 강한 호흡곤란이 오고 끝난다고 하는데, 세 번의 공황발작 때를 제외하곤, 약을 복용한 후부터는 한번 불안이 시작되면 기간이 길고, 공황발작까지는 아니지만, 강한 불안이 지속되고 반복됨.

예를 들어 비상용약으로 가지고 있던 클로나제팜 0.5 mg을 점심에 추가적으로 먹었더니 오후 내내 마음이 아주 편했는데, 혹시 자나팜보다 클로나제팜이 더 잘 맞는 것은 아닌지? 하루에 자나팜 0.5mg 용량이 부족한 것은 아닌지?

벤조디아핀계열 항불안제(자나팜, 클로나제팜)에 의존성과 내성이 생긴다고 하는데, 이와 관련해서 하루 최대용량이나 기간은?

항우울제 렉사프로 5mg 섭취 후 불안감이 오히려 커질 수 있는지? 2주 후면 대부분 사라진다고 하는데 자나팜으로 다스리면서 섭취하는 게 맞는지?



여러 가지 질문이었지만, 그 내용을 정리해 보면 딱 두 가지였다. '지금의 약으로는 도저히 버틸 수 없으니, 약을 늘려달라', '이렇게 약을 늘려 복용하면 약에 대한 의존성이 문제가 되지 않을까?'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것은, 내가 의사 선생님께 한 첫마디는 '지금 너무 힘들다. 도와 달라'였다. 거기다가 이런 상태로 며칠 후 다시 비행기를 타야 하니, 선생님께서 도와주실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처방해 달라였다. 그랬더니 오히려 나에게 그런 몸으로 비행기를 탈 수 있겠느냐고 반문을 했던 의사의 걱정스러운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라고 불안이 올라올 때마다 그런 고민을 안 했을 리 없다. 하지만, 아이들 개학이며, 아내의 출근이며, 모든 가족이 귀국 날짜를 미룰 수는 없고, 나 혼자 남아 있어야 하는데, 그 기간이 얼마나 될지, 또, 나중에 돌아갈 비행기에 혼자 오를 생각을 하니, 그럴 바에야 그냥 힘들어도 가족과 함께 가는 것이 낫겠다고 결론지었을 뿐이었다.


진료가 끝나고, 아침, 점심, 저녁 용 자나팜 0.4mg, 비상약 클로제팜 0.5mg, 렉사프로 10mg(5mg에서 증량), 그리고, 수면제를 위한 처방전을 들고 병원을 나왔다. 비행 시에 클로제팜을 중간에 한번 더 먹고, 수면제를 먹고 최대한 자는 것이 낫겠다는 조언과 함께.


드디어, 운명의 그날이 왔다. 밤에 출발하는 비행기라서, 집에서 저녁 7시쯤 예약된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출발했다. 스위스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야 하는 긴장감이 하루 종일 지속되어서, 마음을 최대한 편하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부모님과의 이별이란 힘든 과정을 겪고 난 후라서 그런지 공항으로 가는 택시 안이 더 답답하게 느껴졌다. 겁이 덜컥 나서, 차에 오르자마자 저녁 약 0.4mg의 자나팜을 입에 털어 넣었다. 하루 종일 한국행 비행기에서 겪었던 일들이 떠올라서, 몸은 떨려왔고, 마음은 두려움으로 가득 찬 상태였다. 아직도 이런 고통이 왜 나에게 왔는지 완전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지만, '지금 느끼는 불안도 어쩌면 신께서 내게 주신 선물일 수 있다'라고 계속 되뇌었다. 벌써 한 밤 중처럼 깜깜해진 차 창밖의 풍경이 꼭 내 마음과 흡사했다. 머릿속에는 비행기 안에서 겪을 공포만 느껴져서, 다른 어떤 생각을 하는 것은 그 당시 내겐 사치였다.


코로나로 비행기 편이 많이 줄어든 때라서 그런지, 공항은 비교적 한적했다. 비행기에 오르기 전까지 오로지 긴장감으로 뻣뻣해진 몸을 최대한 이완시키려는 노력만 했다. 이미 나에게는 평소 공항에서 느꼈던 기분 좋은 설렘이나 면세점 쇼핑의 즐거움은 나의 것이 아닌 듯했다. 나에게 있어 공항은 공포를 체험하기 위해 들어가는 관문 같았다. 체크인을 마치고, 저녁 11시쯤 비행기를 타려고 할 때, 비상약으로 준비한 0.5mg 클로나제팜을 먹었다. 며칠 전부터 머릿속에서 수만 번 시뮬레이션을 했던 내용이었지만, 여전히 몸은 떨렸고, 불안은 가라앉지 않았다.


드디어, 비행기를 타고나서, 처방받은 수면제 반 알을 먹고, 눈을 감았다. 시뮬레이션대로라면 바로 잠이 들어야 되는데, 잠이 안 들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치, 수면내시경을 할 때, 마취가 안 되면 어쩌지 하면서, 스르르 의식을 잃는 것처럼, 다행히 곧 잠이 들었다. 비행기 이륙도, 비행기에서 주는 저녁서빙도 모른 채, 이륙 후 4시간 정도 지나, 잠에서 깨었다. 혹시라도 찾아 올 공황발작을 피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계속해서 온몸에 힘을 빼려고 노력했다. 그 이후에도 먹은 수면제 효과인지 평소와는 다르게 비행 중간에 잠깐씩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깨게 되면 계속해서 온몸에 힘을 빼려고 최대한 노력을 했다. 지나고 나서 보니, 이것도 큰 도움이 된 것 같았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면서 10시간쯤 지나자, 비행기 안에서 공황발작을 겪지 않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는지,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고, 출발한 지 12시간쯤 되어서는 기내식도 먹었다. 중간에 북극을 지났다며, 무슨 증명서를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나에게 북극이든 남극이든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빨리 헬싱키 공항에 도착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기내식 후 아침 약 0.4mg 자나팜을 먹었다.


드디어 14간의 비행이 끝나고 헬싱키에 도착했다. 헬싱키 공항에 내리면서 이제 살았구나 하는 마음만 들었다. 그래도, 아직 2시간가량 대기했다가, 제네바행 비행기를 타야 하는 일이 남았기에 아직 완전하게 안심하기는 일렀다.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14시간 비행기도 탔는데, 고작 3시간 남짓을 못할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역시 약기운 때문인지 제네바행 비행기에서도 계속해서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드디어 제네바에 도착했고, 주차장에 있던 차를 운전해서, 드디어 집에 도착했다.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은 아주 잠시였고, 또다시 답답함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마음속 한편에서는 모든 것이 한국보다 서툰, 이곳 스위스에서 앞으로 이어질 긴 공황과의 동행 여정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이 시작되었다.



KakaoTalk_20240406_092827137.jpg 멀리 보이는 몽블랑과 힘차게 날개짓 하는 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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