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생활)_가을에 드는 생각

by 크렁 아저씨

내가 사는 이곳 스위스에도 가을이 왔다. 지난 2주간 비바람이 몰아쳐서, 바로 겨울로 넘어가는 줄 알았는데, 다행히 아직 가을의 정취가 조금은 남아있어서 정말 행복하다.


가을이 오고, 서머타임도 끝나고 나니, 벌써 올 한 해도 다 지나가는 듯해 많은 생각들이 떠오른다.

인생에서의 나도 가을쯤 지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어, 이 가을이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


가을은 저절로 여러 가지 생각이 많아지게 만드는 마력이 있는 계절임에 틀림이 없다. 나도 모르게 가을의 정취에 푹 빠져 상념에 쌓이다가 보면, 혹시 이러다가 불안이 고개를 들지 않을까, 다시 정신을 차려보게 되지만, 여전히 가을은 참 매력적인 계절이다.


생각이 많아지게 되면, 처음 시작은 분명 순수한 사색이었지만, 얼마 후 바로 염려로 이어지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 나 같은 사람들은 슬프게도 가을의 낭만마저 조심해야 한다.


혹시라도 이미 몸과 마음이 무거워졌다면, 겨울이 오기 전 최대한 가볍게 만들어야, 유럽의 긴 겨울을 무사히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도 계절의 흐름과 비슷한 것 같다. 10대 어떻게 보냈느냐에 따라 우리의 20대와 30대가 결정이 되고, 20대와 30대에 어떻게 일했느냐에 따라 40대와 50대가 결정이 된다. 이젠 수명이 점점 길어져서, 80이 평균 수명이라고 하니, 지금 나의 이 중년시절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이전보다 많이 길어진 노년을 어떻게 보낼지 결정이 되겠지?


가을이 되면, 나무는 여름철 풍성했던 잎들을 망설임 없이 내려놓고, 몸을 최대한 가볍게 만들어 겨울을 준비한다. 때론 너무 앙상해 보여서 저런 모습으로 추운 겨울을 어떻게 보낼까 하는 안타까움도 들지만, 겨우내 쌓이는 눈을 감당해 내고, 모진 바람에 버티기 위한 최고의 전략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어떻게 노년을 맞이해야 할까? 나무가 알려준 것처럼, 우리의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로 놓아주어야만 하는 것들은 무엇일까?


하굣길 아들을 차로 데리고 오면서, 내가 하루 종일 품고 있던 질문을 고2 아들에게 했다. 먼저, 나무가 겨울을 준비하면서 여름 내 꽉 쥐고 있던 나뭇잎을 다 내려놓으며 겨울을 맞이하는 사실과, 그럼 아빠는 앞으로 겨울과 같은 노년을 위해 어떤 걸 내려놓아야 할까 하고 물어봤다.


차 창밖을 잠시 보더니, 특별한 답을 주었다.


아빠는 이제 가족에 대한 책임감을 좀 내려놓아도 될 것 같다며, 이제 누나도 컸고, 자신도 컸으니, 이젠 그렇게 할 때가 되었다는 게 아닌가. 전혀 생각지 못했던 대답에, 순간 울컥했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아들에게 엄지 척을 해주었다. 그리고, '이 녀석 많이 컸네'라고 말을 건네며, 내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마음을 담은 칭찬을 해주었다.


저녁에 런던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 딸에게 화상전화가 와서, 아들에게 처럼, 먼저 나무가 어떻게 겨울을 맞이하는지와 아빠가 인생의 가을에 와있다고 말하는 순간... 딸은 갑자기 소리 내며 울기 시작했다.


내가 인생의 가을쯤에 와있다는 말이 자기를 울게 했다는 것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울음에 놀라기도 했지만, 딸에게 아직 문제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울기부터 하면 어떡하냐고 농담을 건넸다. 그리고, 낮에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면서, 똑같은 질문을 했다. 물론, 질문하기 전, 아들이 무어라고 했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딸도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제까지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사셨는데, 이제부터는 중심을 아빠를 위해 돌리는 게 아빠에게 있어서 겨울을 준비하는 방법이다라는 것이었다. 평소 워낙 살갑고, 나를 끔찍이도 위하는 녀석이라서, 아들 녀석이 대답할 때보다 덜 울컥했지만, 마음이 따뜻해져 옴을 느낄 수 있었다.


나도 못 풀었던 어려운 문제를 두 녀석이 대신 풀어주어서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아직도 잘은 모르겠지만, 예전 어른들이 하신 말씀과 여러 생각들(유연성, 베풂, 자녀로부터 독립, 부모로부터 독립, 내려놓음 등등)이 떠올랐다.


겨울을 잘 맞이하기 위해서는, 가진 것들을 더 꽉 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놓아줘서 몸을 가볍고 유연하게 해야 한다는 나무의 교훈이 나에게도 큰 메시지를 주는 것 같다. 그리고, 예전 어른들이 나이가 들면,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고 하신 이야기도 생각이 났다.


입을 닫으라는 말은, 지금껏 내가 옳다고, 맞다고 고집했던 것들을 계속 주장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의 생각들을 잘 들어, 다른 생각과 의견에 대해 유연함을 기르라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지갑을 열라는 것은, 내 것인 양 나만을 위해 쌓아놓고 쥐고 있던 것들을 주위로 흘러가게 한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내가 이 가을, 단지 이 두 가지만이라도 제대로 준비할 수 있다면, 나중에 맞이하게 될 겨울을 좀 더 따뜻하게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