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 초격차를 만드는 "독서력 수업"

by 박사력

개요

이 책("독서력 수업")은 2008년부터 지금껏 '논술화랑'이라는 화제의 독서·논술 학원을 운영하는 김수미 대표가 올해 3월에 출간한 독서 지침서이다. 중·고등에서 조용히 성적을 역전시키는 아이는 무엇이 다를까?라는 솔깃한 프롤로그처럼 꽤 흥미롭고 유익했다. 특히 영유아뿐만 아니라 초·중등생의 독서 교육까지 단계별·체계적으로 잘 구성되어 있다. 자녀들의 독서 교육을 고심하는 부모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듯하다. 아래에서는 이 책의 영유아 및 초등과정의 독서 교육만을 요약해서 소개한다.


성적을 역전시키는 아이는 무엇이 다를까

대치동 학원가에는 1% 반, 아이큐 140반 등 갖가지 이름의 영재반이 난무할 정도로 유·초등 때부터 영재라고 불리는 아이들이 정말 많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하나둘씩 경쟁에서 밀려나고 종국에는 평범한 아이가 되는 경우가 흔하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어릴 때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지만, 중·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점점 존재감을 드러내는 아이도 있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걸까? 답은 유·초등 시기에 만들어진 독서력에 있다. 유년기 독서 정서를 잘 만들고 초등 저학년 때 활자를 정학하게 읽는 습관을 다진 아이는, 이후 고학년이 되면서 착실히 배경지식을 확장해 문학·비문학을 가리지 않고 읽는 단단한 독서가로 성장한다. 이렇게 차근차근 키운 독서력은 상급 학교로 갈수록 무시무시한 저력이 된다. 반면 유·초등기에 남다른 똑똑함으로 모두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지만, 어느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진 안타까운 사례들도 많이 보았다. 이 아이들의 공통점은 마치 인스턴트 음식을 만드는 것처럼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에만 집중하고, 쉽게 드러나지 않는 독서력과 같은 기본기를 간과했다는 점이다. 조급한 부모들은 이제 막 책에 재미를 붙인 초등 아이에게 더 어려운 지식책 읽기를 권하고, 주요 과목 문제 풀이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만든다. 결국 독서 기반이 약한 아이의 학업 성취도에는 쌓아 올리기 쉬웠던 만큼 허무하게 힘을 잃는다. 더욱이 초등학교 시기에 독서력 만들기에 실패하면 이후 중·고등 시기에는 이를 만회하기가 무척 어렵다. 그만큼 독서력은 단시간에 만들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독서력이야말로 아이의 성장과 함께하며 긴 시간 정직한 노력을 투자해야만 얻을 수 있는 능력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단한 독서력을 갖는다는 건 지극히 평범해 보이나 결코 쉽게 허락되지 않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여기에 타고난 머리나 특별한 재주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정확한 교육법을 알고, 아이와 함께 꾸준히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누려는 부모의 관심과 노력만 있다면 누구나 이를 수 있는 목표이기도 하다.


모국어의 구조가 생각의 구조가 된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듯이 국어는 모국어이기 때문에 저절로 익혀진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외국어 교육에는 시간과 정성을 과도하게 쏟아붓는 반면, 국어 교육은 한글을 가르치는 것 이외에 딱히 뭘 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는다. 여기에 더해 열성적인 부모들은 언어 능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유아기 찬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이 시기부터 한글 동화보다는 영어 동화를 읽히고 영어 영상을 반복해서 보여주며 영어 노출 시간을 늘린다. 모국어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언어라고 여기며 국어 교육은 우선순위에서 배제한다. 곰곰이 생각해 보자. 모국어 능력이 자라나는 결정적 시기에 외국어를 선행 학습한 아이가 다른 또래 아이들과 동일한 모국어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더구나 모국어인 국어 능력은 여타의 과목과는 달리 사고력의 바탕이 되는 아주 중요한 기초 능력이다. 단지 한글을 배우고 한국말로 일상적인 의사소통을 원활히 할 수 있다고 해서 국어 능력이 완선 되는 건 아니다. 더 어려운 텍스트를 읽어내고 더 높은 수준의 개념을 이해하고 활용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이런 지적 능력을 개발하는 데 있어 유아가 모국어 교육과 노출량은 아이의 출발선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가 된다.


국어 잘하는 아이가 결국 외국어도 잘한다

기본적으로 언어는 의사소통의 도구다. 사람들은 보통 다양한 언어를 습득하면 그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과 의사소통이 원활해질 거라고 생각한다. 영어를 잘하면 영어권 사람들과 자유롭게 소통되고, 일본어를 잘하면 일본 사람들과 소통이 가능할 것만 같다. 하지만 말이나 글로 소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생각이라는 사고 활동이 전제되어야 한다. 말 그대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려면 '의사(생각)'와 '소통'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의사 없이는 소통도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의사(생각)'라는 행위 또한 언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심리학자 레프 비고츠키는 "사고와 언어"라는 저서를 통해 "사고란 말에서 소리를 제한한 것"이라고 말하며, 사고(생각)와 언어(말)를 동일시하는 관점을 제안한다. 즉 영유아기 아동의 언어 발달과 사고력 발달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뜻이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아이의 언어 습득 능력이 폭발적으로 발달하는 시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시기에 표면적으로는 언어 능력이 향상하는 것만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같은 양의 사고력이 발달하는 중이다.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말이다. 비록 언어 발달로 인해 지능이 발달하는 것인지, 지능 발달로 인해 언어가 발달하는 것인지 그 선후 관계는 알 수 없지만, 아이들이 사고의 도구로서 언어 능력을 발달시키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때 습득하는 사고의 도구가 되는 언어를 우리는 모국어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아이는 양육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접하는 첫 번째 언어를 모국어로 습득하게 된다. 그리고 한번 정해지면 쉽게 다른 언어로 바뀌지도 않는다. 또한 모국어의 구조는 사고의 구조에도 크게 영향을 미친다. 그 구조 역시 한번 정해지면 쉽게 바뀌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100가지 색깔의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과, 5가지 색깔의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있다. 누가 더 풍부한 표현을 해낼 수 있겠는가. 아이들이 비록 유창하게 표현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렇다고 생각이 없는 건 아니다. 1,000개의 단어(개념)를 활용해서 생각하는 아이와 10개의 단어(개념)로 생각하는 아이의 사고력은 출발부터 다를 수밖에 없다. 마치 게임을 할 때도 아이템이 많은 사람이 레벨을 올리는 데 유리한 것처럼 말이다. 언어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유아기(3~6세)는 원활한 사고의 발전을 위해 크레파스를 수집하는 재능이 열리는 시기다. 이때 모국어 기반을 탄탄하게 다져주기 위해 아이에게 최선을 다해 책을 읽어주고 많은 대화를 해주며 모국어 노출 빈도를 높여야 아이의 사고력은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 이후 단단해진 사고력을 활용해서 아이는 여러 가지 공부를 하게 된다. 외국어를 습득할 수도 있고, 수학이나 과학 공부를 할 수도 있다. 이것이 오래전부터 최상위권 학부모들이 국어를 잘하는 아이가 결국 영어도 잘하게 된다고 말하는 이유다.


한글은 언제 가르치는 게 좋을까?

아이들이 글자를 배울 때 필요한 시각과 언어, 청각 기능의 복합적인 사용은 5세 무렵부터 발달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신경 기능을 보호하는 미엘린(myelin)이라는 막이 생기는데, 아직 미엘린이 생기지 않은 유아기 뇌를 인위적으로 사용하는 버릇을 하면 과부하가 온 것처럼 뇌세포가 타버릴 수 있다. 이 손상은 회복되지 않기 때문에 특히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많은 뇌과학자들이 아이들에게 너무 일찍 글자를 가르치고 지식 교육을 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경고한다. 그럼 아이에게 글자를 가르치는 적절한 시기는 언제일까? 따로 한글을 가르치지 않아도 아이는 약 7세를 전후해서 한글에 대한 호기심을 보이게 된다.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이름이나 '엄마' 아빠, 사랑해요'와 같이 평소 좋아하던 단어를 읽어보려고 하고, 어떻게 쓰는지 궁금해한다. 길을 지나가다가 보이는 간판에서 아는 낱글자가 나오면 콕 집어 읽고 뿌듯해한다. 이 시기 아이들은 온 세상을 참고서 삼아 한글을 배우려고 한다. 이때가 한글을 가르치는 데 있어 가장 좋은 타이밍이다. 물론 훨씬 더 어린아이도 밀어붙이면 한글은 금세 배울 수 있다. 그런데 그건 아이가 똑똑해서가 아니라, 천재적인 세종대왕이 한글을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문자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이가 조금 일찍 글자를 배운다고 해서 그걸 문해력이나, 사고력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단순히 글자를 읽고 쓸 줄 아는 능력과, 어려운 텍스트를 읽고 뛰어난 글쓰기 실력을 갖추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다. 그러니 한글 읽고 쓰기는 7세 무렵에 배워도 충분하다. 조금 늦게 배웠다고 해도 훗날 최우등생이 되는 데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을 테니, 남들보다 선행해야 아이가 앞서갈 거라는 생각은 자제하는 게 좋다.


통글자와 자모 결합 방식, 뭐가 맞을까

한글 학습은 몇 살에 시작하든 본격적인 학습을 시작하고 석 달 정도가 지나면 대부분 기본을 익힐 수 있다. 물론 노련한 수준은 아니다. 더듬더듬 혼자 글자를 읽을 수 있고, 철자가 완벽하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소리 나는 대로 쓸 수 있는 정도는 된다. 한글을 익힐 때 한 가지 주의할 점은 통글자로 가르치지 말고 꼭 자음과 모음을 구분해서 익히게 하고, 이를 조합하는 파닉스 방식으로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통글자로 배우면 파닉스 방식으로 배울 때보다 훨씬 더 수월하고 빠르게 익힐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한글을 배우면 아이는 낱글자의 결합 원리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 이 두 학습 방법은 당장 큰 차이가 없어 보여도, 훗날 아이가 중·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문법에 대한 이해도에 영향을 끼친다. 특히 품사의 경우 중학교 국어 시험에서 아이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인데, 단어에 대한 개념이 통글자로 형성된 아이들은 품사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이처럼 통글자로 한글을 익히는 아이의 경우 국어 문법을 전반적으로 어려워한다. 시간을 거슬려 올라가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에는, 4세부터 통글자로 한글을 익히는 교육 상품이 공전의 히트를 한 적이 있다. 이제 막 '애착 동화'를 통해 줄거리를 이해하는 법을 터득하고 있는 아이에게, 그것도 통글자 학습 방식으로 한글을 선행하는 건 참 쓸데없는 노력임에도 부모들은 열광했고, 한글 선행이 대유행이 되었다. 추측하건대, 아마 이 유행은 두 가지 원인에서 비롯되었을 것 같다. 하나는 부모가 아이에게 하루라도 빨리 글자를 가르쳐서 책을 읽어주는 고된 노동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열망이고, 또 다른 하나는 어린 나이부터 한글을 읽고 쓸 줄 알면 아이가 더 똑똑해질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다. 더구나 아이들도 거부감 없이 잘 따라와서 진도를 빼니 안 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 이 책의 저자와는 달리 앞서 소개한 "문해력 유치원"의 저자 최나야 교수는 아래처럼 한글을 통글자로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글쓴이가 다른 전문가의 의견도 충분히 수렴해서 '한글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라는 제목으로 별도 글을 쓸 예정이다.


"그런데 한글을 가르칠 때 자음과 모음을 쪼개서 가르치거나, 교재를 사용해 명시적으로 가르치는 건 문해력 발달에 맞지 않다. 부모가 아이에게 시키면 할 수야 있지만, 절대 좋은 방식은 아니다. 아이들은 어떤 문자를 익힐 때 먼저 덩어리로 인식한다. 한글이든 영어든 마찬가지이다. 그러고 나서 통계적 학습을 하는데, '저렇게 생긴 모양은 항상 저런 소리가 나는구나.'라고 깨닫는다. 그래서 어떤 말소리에 해당하는 단어를 자꾸 눈에 보이도록 해주는 게 좋다. 이때 단어 카드를 보여주라는 것이 아니다. 맥락에 맞는 인쇄물이 좋다. 즉 아이와 같이 읽는 그림책이나 아이에게 쓴 쪽지 같은 것이 좋다. 중요한 건 아이가 스스로 그 원리를 파악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가르쳐주면 그 기회를 빼앗는 것이고, 그러면 스스로 배우는 학습자가 되기 어렵다. 단어 카드나 낱말 사전을 보여주는 것도 별로 도움 되지 않는다. 이렇게 습득할 수 있는 단어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낱말 카드의 '서랍'이라는 글자는 어떤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마주하는 게 아니다. 또 실제 서랍에 '서랍'이라는 글자를 붙여 놓는 것도 인위적이고 어색하다. 집안 사물마다 그 이름을 붙여 놓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실제 상황 속에서 배우는 게 학습의 본질적인 방식인데, 그런 방법과 동떨어져 있다. 은연중에 글자를 빨리 익히라는 압력으로 작용해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그런데 서랍마다 양말, 속옷 이런 글씨를 붙인다면 그건 일상과 맥락이 있다. 서랍마다 가족의 이름을 적어 두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각각의 서랍에 든 물건의 종류, 소속을 알려주는 상황과 이유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냥 서랍이라고 붙여두는 건 아이에게 서랍이라는 글자를 알려주려는 목적 외에 아무런 맥락이 없다. 이런 방법은 길게 갈 수도 없고, 큰 효과도 없다. 반면 동네를 산책하면서 가게의 간판을 함께 읽고 써보는 것, 장 보러 가서 마트 전단 속에서 좋아하는 식품 이름을 찾고 함께 읽어 보는 것 같은 활동이 아주 좋은 방법이다. 아이는 일상의 맥락 안에서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를 배울 때 가장 재미있고, 능동적으로 배울 수 있다. 이러한 환경 인쇄물(신문, 전단지와 같은 종이 위의 글자뿐만 아니라, 가게 간판, 교통 표지판, 상표, 장난감의 로고 등)은 아이에게 매력적이고 친숙하며 즉각적인 흥미와 관심을 자극하는 효과가 있어 문해력 키우기에 효과 만점이다."


사교육의 유행에 휘둘리지 마라

한글 선행이 보여준 당장의 성과는 놀라웠다. 아직 기저귀도 못 뗀 3세 아이도 한글을 배운다는 말이 들려왔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한글을 일찍 배운 6~7세 아이들이 그림일기도 아닌 무려 글줄로 일기를 척척 써 내려가는 일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아이들도 학교에 입학하면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ㄱ, ㄴ, ㄷ'부터 배워야만 한다.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의 한글 실력을 갖추고 있다고 해서 초등 1학년을 건너뛰고 바로 3학년으로 입학하지 않는다. 만약 누가 한글을 30년 넘게 써온 나에게 'ㄱ, ㄴ, ㄷ'을 가르치려 든다면 어떨 것 같은가. 다 아는 쉬운 진도라 자신감 넘치고 무척 흥미로울까? 조금만 생각해 봐도 조기 선행을 한 아이들이 학교 수업을 얼마나 지루해할지, 그 시간이 얼마나 끔찍한 기다림 일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아이들은 이미 다 아는 걸 열정적으로 가르치는 선생님과 열심히 배우는 반 친구들을 보면서 자신이 취할 바람직한 태도를 터득하게 된다. 그건 바로 수업을 방해하지 않고 멍을 때리는 거다. 이런 태도는 습관이 되어 중·고등학교에 가서도 아이의 모든 수업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20년 넘게 사교육에 몸담으며 지금까지 이런 잘못된 유행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 한글 조기 선행 유행이 한바탕 지나가고 난 이후에는 초등학생에게 더 많이, 그리고 더 빨리 책을 읽힐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을 알려주는 속독 교육이 대유행했었다. 속독 학원이 내세운 교육 방법은 특별히 개발된 안구 운동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들이 고안한 방식으로 책을 띄엄띄엄 읽어내면 단기간에 많은 양의 책을 읽을 수 있다는 발상이다. 하지만 그렇게 책을 띄엄띄엄 읽을 거라면 차라리 10줄짜리 줄거리 요약을 읽지 무엇하러 책을 읽겠는가. 이성적으로 생각해 볼 때 말도 안 되는 교육이었지만 이 역시 대유행을 했다. 그리고 요즈음은 아이의 읽기 능력을 향상하기 위해 문제집을 푸는 새로운 교육이 유행 중이다. 문제집을 열심히 풀면 문해력이 높아진다는 근거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역시 정점을 향해 무섭게 질주 중이다. 이번 유행이 끝나면 다음은 또 어떤 유행이 시작될까? 돌이켜보면 유독 문해력 교육 분야에서 이런 반짝 유행이 빈번하다. 그만큼 높은 문해력은 모두가 탐내는 능력이지만, 쉽게 얻기 힘들어서가 아닐까. 유행이 빠르게 변하는 대치동에서 긴 세월을 보냈다. 이런 유행들은 결국 오래가지 못하고 끝나게 될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참 서글픈 우리의 교육 현실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모 목소리로 책 읽어주는 시간의 힘

아이들은 모두 책을 좋아한다. 엄밀히 말하면 책을 좋아한다기보다, 부모가 책을 읽어주는 상황을 좋아하는 것이다. 보통 부모들은 서로의 체온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아이와 교감하며 책을 읽어준다. 이 순간은 아이에게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포근함과 행복감을 선사한다. 심지어 대부분의 아이는 5세 무렵까지 책의 줄거리를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이 아직 없다. 그만큼의 두뇌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책 내용을 대부분 이해하지 못한다. 이 시기 아이들은 오직 책을 읽어주는 순간 느껴지는 부모님의 사랑과 따뜻한 분위기를 즐긴다. 이 말에 "우리 집 아이는 좀 산만하긴 해도 책을 읽어주면 분명 가만히 내용을 듣고 있는데요?"하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렇게 집중해서 듣고 있는 아이가 내용을 전혀 모른다니, 이건 좀 납득하기 힘든 사실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자. 아이 입장에서는 그만큼 부모님이 책 읽어주는 시간이 좋기 때문에 못 알아듣는 얘기를 계속하는데도 방해하지 않는 것이다.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아이를 한자리에 앉혀둘 만큼 동화책 읽어주는 시간이 아이의 안정된 정서 형성에 끼치는 위력은 크다. 그래서 아이는 귀찮을 정도로 책을 가져와서 읽어달라고 한다. 물론 이때 집중해서 듣지 않고 딴짓하는 경우도 많다. 내용과 무관한 책 귀퉁이의 나비 그림을 가리키며 나비 눈이 작다고 까르르 웃고, 갑자기 두세 장 뒤의 내용을 읽어달라고 한다. 귀찮고 목이 아픈데도 열심히 텍스트를 읽어주는 부모님 입장에서는 아이의 이런 행동이 얄밉게 느껴질 수 있다. 한편으로는 우리 집 아이가 집중력이 떨어져서 그런 건 아닐까 걱정도 된다. 그런데 아이의 이런 행동은 아주 당연한 것이다. 이건 오히려 독서 활동에 대한 능동적인 개입으로 봐야 한다. 그러므로 5세 미만의 영유아기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줄 때는 정서와 심리를 이해하며 아이 입장에서 읽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


영유아기에만 얻을 수 있는 독서 경쟁력

그렇다면 영유아기 아이들은 책을 어떻게 읽고 있는 걸까? 줄거리를 인지하기 이전 시기, 아이에게 책이란 그저 단편적인 장면과 장면의 나열에 불과하다. 앞에 나오는 장면과 뒤에 나오는 장면을 연결하기 위해서는 인과관계를 파악하는 능력이 필요한데, 이 시기의 아이는 기억력도 단편적이고, 인과를 연결할 수 있을 만큼의 뇌 발달이 이루어지기 전이다. 그렇기 때문에 꽃, 동물의 이름이 줄거리 없이 나열된 책과 줄거리가 있는 책을 아이는 사실상 비슷하게 받아들인다. 이 시기 아이들은 책에서 수집한 단편적인 이미지를 자신의 머릿속으로 가져와서 떠올리는 연습을 한다. 인지심리학자 장 피아제의 이론에 의하면 이때 아이들은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기초적인 지식 구조를 형성한다고 한다. 이를 '스키마(schema)'라고 부르는데 책에 등장하는 사물, 인물, 배경 등의 시각적 정보를 통해 세상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지식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비록 이 시기에는 이야기의 전개를 이해하기 어렵지만, 반복적인 책 읽기를 통해 축적된 스키마는 향후 아이가 책의 내용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시기 아이들은 평생 독서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자산인 '책'에 대한 정서를 만든다. 독서 정서가 잘 형성된 사람은 책을 좋아하는 성인으로 자랄 확률이 아주 높다. 독서 정서는 보통 열 살 이전의 독서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지는 것이니 어린 시절 책을 읽어주는 부모의 노력은 아이에게 큰 경쟁력이 된다. 마지막으로 이 시기에 아이에게 동화책을 많이 읽어주는 건 뇌 과학적으로도 도움이 된다. 아기가 태어나고 뇌가 발달하면서 신경세포에는 미엘린이라는 하얀 막이 생겨난다. 이 막이 생긴다는 건 해당 영역의 뇌 기능을 원활히 사용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가장 먼저 반사 신경세포가 발달하고 이후에 시각과 청각이 순차적으로 발달하는데, 이때 청각적인 자극을 반복하면 발달이 촉진된다. 그렇다면 동화 구연을 구연 음원을 틀어 주는 것도 괜찮을까? 이 방법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 아이들은 책을 통해 부모와 정서적 교감을 한다. 이 교감은 아이의 사회성 발달에 큰 영향을 미친다. 슬픈 동화를 읽어줄 때, 혹은 주인공이 경이로운 장면을 만났을 때, 유쾌, 상쾌, 통쾌한 이야기와 같이 인상적인 장면을 읽어 줄 때, 아이는 부모의 눈을 가만히 응시하곤 한다. 부모의 목소리에 실린 감정을 아이는 고스란히 느끼고 반응한다. 아이는 그렇게 공감하는 법을, 사람과 소통하는 법을 스며들듯 자연스럽게 배워 나간다. 하지만 동화 구연 음원이나 애니메이션으로는 아이와 교감할 수 없다. 따라서 이런 미디어에 노출하는 것보다 부모가 직접 읽어주는 것이 아이의 발달에는 훨씬 긍정적이다.


애착 인형 같은 '인생 책'의 탄생

계속해서 책을 읽어주며 정서적 유대를 쌓아가다 보면 대략 5세 전후, 아이에게는 어느 날 갑자기 '유레카의 순간'(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수학자인 아르키메데스가 목욕 중 부력의 원리를 발견하며 '유레카'라고 외친 감탄사에서 유래된 것으로 어떤 문제나 수수께끼가 갑자기 명확하게 이해되거나 해답이 떠오르는, 통찰과 깨달음의 찰나를 의미한다)이 찾아온다. 이제까지 장면과 장면으로 분리되어 인식되던 책 내용이 연결되는 경험을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줄거리가 모두 매끄럽게 연결되는 건 아니다. 처음에는 아주 미묘한 부분에서 그 연결을 눈치챈다. 마치 멈춰 있던 그림책 속 주인공이 슬쩍 움직인 걸 순간 알아챈 것처럼 말이다. 그런 움직임을 알아채는 시간이 점점 길게 이어지면서 마침내 아이는 책의 줄거리를 인식하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엄마가 "콩쥐 팥쥐"를 읽어줄 때 아이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상상해 보자.


"내가 책을 읽어달라고 하면, 엄마는 알아듣지 못하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려준다. 엄마가 책을 읽어주면 나는 아주 기분이 좋아진다. 마치 이제 막 빨아서 2시간쯤 햇빛을 흠뻑 머금은 뽀송뽀송한 이불을 온몸에 둘둘 말고 있는 것처럼 기분 좋은 엄마 목소리가 내 온몸을 따뜻하게 휘감는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아는 건 매 장면 나오는 여자애 이름이 '콩쥐'라는 것 정도다. 오늘도 엄마가 책을 읽어 주었다. 그런데 늘 멈춰있던 이야기 속 콩쥐가 울었고, 조금 후에 두꺼비가 나타났다. 한 번도 움직인 적 없는 그림들이었는데 뭔가 수상했다. 내가 본 게 진짜일까? 그래서 엄마에게 책을 또 읽어달라고 했다. 확인해 보니 역시 두꺼비가 움직인 게 맞다. 아니, 움직일 뿐만 아니라 두꺼비가 콩쥐한테 말도 건다."


아이에게 새롭게 열린 지적 능력은 신기하고도 하고 재밌기도 하다. 그래서 줄거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발달할 때 아이들은 유독 한 권의 책에 집착하며 그 책을 백번이고 천 번이고 반복해서 읽어달라고 한다. 어느 집 아니나 할 것 없이 마치 미리 짜기라도 한 것처럼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는 공통된 행동을 한다. 모든 아이는 이런 과정을 통해 책의 줄거리를 이해하는 능력을 훈련한다. 그런데 같은 책을 백 번 이상 반복해 듣다 보면 아이는 책의 텍스트를 통째로 외우기도 한다. 이런 아이를 보고 부모들은 비슷한 생각을 한다. "아! 네 살밖에 안 된 우리 아이가 벌써 한글을 깨치고 있구나"하고 말이다. 이렇게 언어력이 뛰어난 걸 보면 아이가 언어 쪽 재능을 타고났거나 영재인 건 아닌가 하는 꿈에 부푼 기대도 걸어본다. 그러나 이 시기에 아이가 보여주는 행동을 '한글 학습을 시작할 적기로'로 이해하면 안 된다. 스토리 이해 능력이 완전히 자리 잡으면 아이는 그동안 애착 인형만큼이나 좋아하며 반복해서 보던 동화책을 세상 미련 없이 쿨하게 버리고, 새로운 책들을 탐닉하기 시작한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아이는 한글을 배우려고 하지는 않고 계속해 부모에게 책을 읽어 달라고 한다. 아이의 발달을 생각해 보면 이것 역시 당연한 행동이다. 이제 막 뇌의 여러 부분이 복합적으로 기능하며 이미지화와 간접 체험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당분간 아이는 이 새로운 능력에 푹 빠져 있게 된다. 그러다 새로운 능력이 충분히 자리 잡으면 다음 단계를 향해 스스로 나아간다. 마치 가만히 누워 있던 아이가 어느 순간 뒤집기를 하고, 네발로 기는 것처럼, 아이는 쉬지 않고 다음 단계를 향해 성장한다. 이후 초등학생이 되고 책 읽기가 능숙해져도 여전히 아이는 책 내용의 20퍼센트 정도만 이해하고 이걸 토대로 나머지 내용은 재창조하는 형태로 책을 읽는다. 그러니 아이들에게 책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100퍼센트 읽어내는 능력을 처음부터 기대해서는 절대 안 된다. 적어도 초등학교 저학년 까지는 말이다.


책 읽는 재미에 푹 빠져들게 만드는 법

아이가 책에서 손을 놓지 않는 것은 모든 부모의 희망 사항이다. 그런데 왜 우리 집 아이는 책을 보지 않는 걸까? 스마트폰을 보거나 게임을 할 때 보면 집중력에 문제가 있진 않은 것 같은데 왜 책만 읽으라고 하면 채 1분도 안 돼서 주위를 두리번거릴까? 책 선정을 잘못해 줘서 그런 건 아닌가 싶어 어린이 베스트셀러를 사 줘 봐도 아이의 반응은 영 시원치 않다. 뭐라도 읽으라는 마음으로 만화책을 사 줘도 그것마저 읽지 않는다. 책이 재미있다고 푹 빠져서 읽는 그런 아이로 만들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책 보다 재미있는 건 일단 치운다)

아이가 책 읽기를 싫어한다면 먼저 두 가지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는 환경적 요인이다. 아이에게 노출된 자극이 순번을 한번 매겨보자. 책 읽기, 유튜브, TV, 게임, 노리터, 장난감…, 그중 책은 몇 번째로 재미있는 일일까? 선뜻 상위랭킹에 책을 올릴 수 있는 부모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요즈음 아이들은 책보다 재미있는 자극에 쉽게 노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책을 읽으려고 하는 아이가 몇이나 될까? 다양한 선택지가 있을 때 더 강한 자극을 추구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밥상에 사탕을 올려두고, 아이에게 건강에 좋은 시금치를 먹으라고 한들 아이는 사탕의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다. 여기에 근본적인 집중력 문제도 있다. 자연의 세계에서 인간은 지극히 약한 존재다. 인간이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서 농사를 지으며 정착한 건 불과 1만 년 전의 일이다. 정착하기 전까지 인류는 한 가지에 집중하면 안 되는 삶을 살아왔다. 골똘히 집중하며 빗살무늬토기를 만들던 신석기인은 포식자의 공격에 더 쉽게 잡아먹히고 만다. 옛날 신석기인의 집중력을 '초점성 집중력'이라고 부른다. 이건 우리가 책을 읽거나 공부할 때 필요한 집중력이다. 반면 주변의 작은 소리나 움직임에 반응하며 집중 대상을 옮기는 것을 '반응성 집중력'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긴 시간 동안 인류를 생존하게 만든 고마운 재능이었다. 그러니 우리 집 아이가 작은 자극에도 반응하며 토끼처럼 재빨리 집중력을 옮겨가는 건 뛰어난 호모사피엔스의 자손이라는 증거인 셈이다. 이런 방식으로 진화를 거듭한 인류이기 때문에 보통의 사람들은 멀티태스킹을 할 때 쾌락을 느낀다. 유튜브나 게임 같은 미디어는 실시간으로 많은 자극을 주고, 아이는 거기에 반응하며 집중한다. 마치 고양이에게 빠르게 움직이는 장난감을 주면 집중하는 것처럼, 우리 아이도 빠르게 움직이는 게임이나 영상에 길들여지게 된다. 반대로 갖고 놀던 장난감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면 고양이는 이내 흥미를 잃어버리게 된다. 하지만 인간의 초점성 집중력은 장난감이 움직이지 않아도 그 장난감을 보며 장난감의 마음, 장난감이 탄생한 과정, 장난감의 꿈과 어울릴 만한 친구 등에 대해 상상하는 사고의 유희(생각의 즐거움)를 즐기는 특별한 일을 가능하게 만든다. 무려 70만 년 동안 이어진 인간의 반응성 집중력을 억누르고 초점성 집중력을 키워줄 강력한 훈련이 독서다. 이건 아이가 독서를 싫어하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지금 시대에 독서를 꼭 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니 아이가 책을 읽길 희망한다면 우선 집 안 환경을 점검해 보고, 책 보다 더 재미있을 만한 것은 일단 눈에 띄지 않게 치워두는 게 좋다. 적어도 책 읽기 습관이 뿌리내리기 전까지만이라도 말이다(서울대 기초교육원 나민애 교수도 같은 주장이다). 그런데 막상 휴대전화나 게임기 같은 걸 치우려고 들면 아이의 반발은 상상 이상일 것이다. 세상을 빼앗긴 것처럼 쭈글쭈글해진 아이의 모습을 보면 이렇게까지 아이가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모두 끊어내는 게 옳은 건지 마음이 약해진다. 아니 게임은 그렇다 치고, 영상 콘텐츠 중에는 교육을 목적으로 제작된 좋은 내용들도 많은데 무조건 나쁘게만 보는 건 아닐까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서울대 아동가족학과 최나야 교수는 영상 콘텐츠가 아무리 잘 설계되어도 고정적이고, 아이의 반응에 맞춰 유연하게 대응할 수 없으므로 언어적으로 질 높은 공급을 해줄 수는 없다고 한다. 다만 디지털 리터러시를 위해서 부모가 아이와 함께 수준 높은 교육용 앱이나 프로그램을 고르고 대화하며 사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TV나 유튜브를 볼 때도 독서할 때와 같은 간접 체험을 할 수 있다. 더구나 이런 매체들은 영상과 소리라는 시청각 정보를 직접적으로 제공하기 때문에 독서보다 더 효과적이기까지 하다. 결론적으로 미디어 노출은 교육적으로 나쁘지 않다. 어쩌면 한 100년 후 미래에는 더 이상 활자로 된 정보를 찾지 않아도 될지 모르겠다. 이 문제에 있어서 고민할 부분은 미디어 노출을 '언제'부터 하는 것이 좋은가이다. 영상을 통해 쉽고 재미있게 정보를 취하는 데 익숙해지면 책은 점점 더 멀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더 어렵고 재미없는 독서 습관 먼저 만들고, 그 후에 선택적으로 영상을 통해 정보를 취하도록 해도 늦지 않다. 아이의 독서에 진심인 가정 중에는 거실 TV를 치우고 그 자리에 책장을 두는 집도 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TV를 치우는 건 아이에게도, 부모에게도 가혹한 일일 거라 강력하게 권유하진 못하겠다. 대신 최소한 부모는 소파에 누워 TV나 스마트폰을 보면서 아이에게만 방에 들어가서 책을 읽으라고 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부모가 책 읽는 모습을 보여주면 아이도 자연스럽게 책을 읽는다. 그래서 아이 앞에서 책 읽는 모습을 연기하는 부모들도 있다. 이건 교육적으로 훌륭한 가식이니 권장할 만하다.


(읽기 독립에 성공하는 2가지 비결)

아이가 책 읽기를 싫어할 때 두 번째로 점검해보아야 할 점은 책의 난이도다. 아이들은 자신의 읽기 능력으로 술술 읽을 수 있는 책에 재미를 느낀다.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는데도 재미를 느끼는 건 어른에게도 힘든 일이다. 그러니 아이가 어려운 책을 읽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인해 책 읽기를 공부처럼 시키고 있는 건 아닌지 한 번쯤 생각해보아야 한다. 더구나 이런 식의 책 읽기는 흥미뿐만 아니라 자신감도 없앤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어려운 책을 영원히 읽지 않을 순 없다. 하지만 독서 난도를 올리는 데는 적절한 시기와 노련함이 필요하다. 책 읽기에 푹 빠진 아이는 어려운 책 읽기도 망설임 없이 도전한다. 이런 아이로 만들기 위해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쉽고 재미있는 책을 충분히 읽히는 것이다. 매번 재미있는 책을 골라주는 게 어렵다면 차라리 쉬운 책을 여러 번 읽히는 것이 좋다. 이마저도 어려운 아이라면 읽기 능력이 현저히 부족해서 읽기 독립 자체를 할 수 없는 경우일 수도 있다. 이럴 땐 아이가 초등 고학년이더라도 마치 어린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듯이 부모가 책을 읽어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책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오롯이 다 읽어보는 걸 목표로 하는 것이 좋은데, 이때 비문학 도서보다는 감동을 느낄 수 있는 문학 장르의 도서가 좋다. 도전할 책 한 권을 정했으면 그다음에는 매일 읽을 분량을 챕터 단위로 미리 나눈다. 처음 한두 장은 부모가 읽어주는데, 이때 아이가 책 내용에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적절한 대화 및 부연 설명을 해주는 것이 좋다. 이후 부모가 아이가 분량을 나누어 번갈아 가며 읽고, 조금씩 아이가 읽는 분량을 늘려간다. 이때도 마찬가지로 오늘 읽은 부분에 대한 대화를 꼭 해주며 진도를 나가는 게 좋다. 이런 방식으로 책 한 권을 다 읽는 건 무척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지만, 아이가 책 읽기에 제미를 붙이고 자신감을 갖기 때문에 무척 효과적인 방법이다. '부모가 함께 읽기'를 통해 아이가 책에 대해 어느 정도 흥미와 자신감이 생겼다면 이후 두 번째 단계로 읽기 독립을 시작해야 한다. 성공적인 읽기 독립을 위해서 이제부터는 읽을 때 선정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아이마다 흥미를 느끼는 분야가 제각각이기 때문에 무조건 추천 도서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의 관심사를 잘 관찰해서 찾아내야 한다. 읽을 책을 선정하는 한 가지 방법은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아이의 관심사에 해당하는 단어를 검색창에 넣어보는 것이다. 그런 다음 아동 분야를 선택해 상위권에 있는 도서를 선택하면 재미있는 책일 확률이 높다. 영화나 연극, 뮤지컬을 본 후, 같은 내용의 책을 선정해 줘도 아이가 흥미롭게 읽을 가능성이 크다. 하나의 주제를 선정해서 쉬운 저학년용 그림 동화부터 읽히고, 같은 주제로 점점 글밥과 책 난도를 높이며 읽어가는 방법도 도전해 볼 만하다. 이 모든 방법에는 적지 않은 품이 들어간다. 하지만 책 읽기를 싫어하던 아이의 흥미와 자신감은 이제 막 자라기 시작한 새싹과도 같이 여리기만 하다. 그러니 이 여린 새싹이 비바람이 몰아쳐도 끄떡없는 튼튼한 나무로 자랄 수 있도록 지금은 예의주시하며 부모가 조심스럽게 잘 키워줄 필요가 있다.


공부의 기초, 정독 습관 키우기

대다수 사람은 평소 습관의 존재를 잘 의식하지 못하며 산다. 하지만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원인을 찾다 보면 의외로 작은 습관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더구나 간단해 보이는 작은 습관도 한번 만들어지면 고치기란 쉽지 않다. 이처럼 습관은 우리의 삶에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스며들지만 실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문해력에 있어서 중요한 첫 단추 역시 바로 정확히 활자를 읽는 습관을 만드는 데 있다. 활자 읽기 습관이 잘 만들어지지 못하면 글자를 볼 때마다 띄엄띄엄 대충 읽게 된다. 앞부문 몇 문장만 일고 뒤에 나오는 내용은 짐작하는 습관, 중요한 단어만 읽고 조사 같은 부분은 빼먹고 읽는 습관, 글을 읽을 때 집중하지 못하고 딴생각을 하는 습관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습관을 지닌 아이들은 시험 문제를 읽을 때도 자꾸 실수한다. 잘못 들인 읽기 습관이 문해력 발달에 커다란 걸림돌이 된 탓이다. 실제로 대치동의 고등학생 부모들 사이에서 100퍼센트 문해력 시험이라고 할 수 있는 수능 국어 성적은 아파트를 팔아도 살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유·초등 시기에 문해력의 기본 습관을 단단히 잡아주지 않으면 중·고등학교에 가서 바꾸기 어렵다는 의미다.


(정독 습관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아이가 한글을 뗀 직후부터 3년 동안은 앞으로의 문해력 실력에 있어서 중요한 갈림길이자 골든타임이다. 첫 단추라고 할 수 있는 읽기 습관을 얼마나 단단하게 만들었냐에 따라 향후 읽기 능력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읽기 능력이 잘 만들어진 아이는 책 읽기가 재미있어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책을 자꾸 읽으려고 한다. 반면 읽기 능력이 잘 만들어지지 못한 아이는 책 읽기가 재미없기에 책을 더욱 안 읽으려고 한다. 이렇게 몇 년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두 아이의 격차는 눈에 띌 정도로 벌어진다. 양극화는 학년이 올라갈수록 따라잡기 힘든 수준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부터 목표로 해야 할 건 좋은 활자 읽기 습관인 정독 습관을 아이에게 장착해 주는 일이다. 이 습관은 앞으로 아이가 책을 읽을 때뿐만 아니라, 전 과목의 공부를 할 때와 시험을 볼 때 기본기가 될 중요한 습관이니 아주 공들여 만들어 줄 필요가 있다. 정독 습관은 아이가 글자를 배워 스스로의 힘으로 책을 읽기 시작한 때를 기준으로 이후 3년 동안 만들어진다. 5세에 한글을 뗀 아이는 5~7세가 습관 형성기이고, 7세에 한글을 뗀 아이는 7~9세가 습관 형성기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 봤을 때 사고 역량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영유아기에 한글을 일찍 떼는 건 정독 습관을 만드는 데 있어서도 불리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막 한글을 배운 아이는 이후 3년 동안 부모님과 함께하는 동화 구연과 아이가 스스로 읽는 두 가지 형태의 독서를 병행하는 것이 좋다. 이때 아이가 혼자 읽는 건 독서라고 부르기 어렵다. 독서는 책을 읽고 그 내용을 이미지화해서 간접 체험하는 활동인데, 아이들은 아직 자신의 힘으로 글자를 읽으며 이와 동시에 이미지화까지 수행하진 못한다. 그러니 아이의 혼자 읽기는 독서라기보다는 훗날 아이가 혼자 책을 읽기 위한 준비 과정의 독서 훈련이라고 정의 내리는 게 정확하다. 독서 훈련을 할 때에는 책 내용을 파악하거나 재미를 느끼는 독서에 집중하기보다는 낱글자 한 글자 한 글자를 정확히 읽는 훈련에 중점을 두고 정독 습관을 강화해 주는 게 좋다. 중·고등학교에서 배구를 배웠을 때를 떠올려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배구는 네트 너머로 공을 강력하게 쳐내서 상대 팀 바닥에 떨어 트리는 역동적인 게임이다. 그런데 정작 체육 시간에 주로 배운 건 운동장에 가만히 서서 팔목으로 공을 하늘로 통통 튕기는 동작이었을 거다. 이 동작이 완전히 몸에 배면 그다음부터 진짜 배구 경기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독서 교육도 마찬가지로 정독 습관을 완전히 몸에 배게 만들고 난 후 진도를 나가면 훨씬 더 단단한 문해력을 확보할 수 있다.


(정독 습관을 다지는 3단계 교육법)

화랑의 저학년 읽기 교육도 이런 원리로 설계되어 있다. 화랑에서는 저학년 수업을 '정독 과정'이라고 부르는데 이 시기 독서교육의 핵심 목표를 정독 습관을 확보해 주는 데 두기 때문이다. 정독 과정 수업을 듣는 1~2학년 아이들은 '깊이 읽고 혼자 쓰기'라는 슬로건 아래 한 권의 책을 3단계에 걸쳐 정독한다. 우선 첫 번째 정독은 책을 9번 반복해서 읽어오는 거다. 100권의 책을 한 번씩 읽은 아이보다. 1권의 책을 100번 읽은 아이가 정독 습관 만들기에 훨씬 더 유리하다. 하지만 아이들은 반복해서 읽기를 무척 지루해한다. 새로운 스토리를 찾아 즐거움을 얻는 건 비교적 쉬운 일이지만 반복해서 음미했을 때 얻어지는 깊은 공감의 즐거움은 쉽게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쉬운 방법을 선택하고자 한다. 그렇기 때문에 숙제로 해야 하는 이 과정에서는 무작정 9번을 읽게 하지 않고 '엄마가 나에게 읽어주기' '아빠가 나에게 읽어주기'를 반복한 후 '내가 ○○에게 읽어주기' '마음속으로 3번 읽기'와 같이 다양한 방법을 제시한다. 책을 꼭꼭 반복해서 읽는 첫 번째 정독 과제를 잘한 아이는 수업 시간 선생님의 질문에 책의 문장을 그대로 외워서 대답하기도 한다. 이렇게 한 권의 책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보는 경험을 하고 난 후에는 두 번째 정독 과정인 책 메시지에 대한 대화와 독후 활동이 이루어진다. 아이들은 친구들과 자신의 경험, 또는 알고 있는 지식을 책 내용과 연결해서 이야기한다. 그런 다음 세 번째 정독 과정인 글쓰기가 진행된다. 이 시기에 이뤄지는 화랑의 글쓰기 교육은 일반적인 글쓰기 교육과는 다르게 구성과 표현, 맞춤법 등 글짓기 기술을 가르치는 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 이런 부분의 교육은 아이가 좀 더 성장한 이후로 미뤄두는 것이 오히려 좋다. 정독 과정에서 글쓰기는 책의 내용을 더 깊이 있게 생각해 보고 혼자 몰입해서 글을 써 보는, 말 그대로 세 번째 정독의 일환으로 진행된다. '독서(讀書)'라는 단어는 읽을 독(讀)과 쓸 서(書)가 합쳐진 단어이다. 즉 읽고 썼을 때 비로소 독서가 완성되는 것이다. 글쓰기 실력은 책을 많이 읽고, 생각을 많이 해보고, 많이 써보면 늘게 되어 있다. 저학년 아이들에게 글쓰기 스킬보다 훨씬 중요한 건 활자를 정확히 읽어내는 정독 습관을 획득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책의 내용에 대해 혼자 몰입해서 글을 써보는 경험은 글의 완성도 여부를 떠나서 책 내용을 이해하는 가장 밀도 높은 정독이 된다. 책 한 권을 이렇데 세 단계로 정독하게 되면 아이들은 그 책을 더할 나위 없이 깊이 이해하게 된다. 책의 텍스트나 문장부호가 전달하는 바를 읽어낼 뿐만 아니라 맥락에 담긴 메시지까지 샅샅이 파악하는 것이다. 이렇게 깊이 있게 정독한 경험이 아이에게 한 권, 두 권 쌓였을 때 정독 습관이 단단하게 뿌리내린다. 결국 정독 습관이란 올바른 경험을 켜켜이 쌓아 높은 탑을 만드는 일이다. 이건 분명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일이지만, 그만큼 가치 있는 명품 능력이다. 그리고 오로지 습관이 만들어지는 골든타임에만 할 수 있는 특별한 교육이기도 하다.

(아이의 편독을 방해하지 마라)

화랑에서는 앞서 설명한 3단계 정독 교육을 통해 정독 습관을 통해 정독 습관을 만들지만, 꼭 이런 교육을 통해야만 정독 습관이 자리 잡히는 건 아니다. 정말이지 신기하게도 활자 읽기 습관이 만들어지는 시기가 되면 아이들의 본능은 정독 습관을 만들 수 있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자연이 아이에게 시키는 그 행동이 바로 '편독이다. 물론 한 가지 장르의 책만 반복해서 보는 편독은 편향된 독서이기 때문에 추천할 만한 독서 방식이 아니다. 하지만 정독 습관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는 반드시 거치게 되는 독서 유형이다. 본래 저학년 시기 아이들은 좋아하는 분야의 책만 읽으려고 하는 편독 경향성을 갖고 있다. 전래 동화에 꽂힌 아이는 전래 동화만 읽으려 들고, 창작 동화에 꽂힌 아이는 창작 동화만 읽으려고 한다. 그중에는 특이하게 자동차나 공룡 같은 주제에 꽂혀 이 분야의 과학책을 좋아하는 아이도 있다. 내가 본 아이 중 가장 특이한 친구는 볼링에 대한 책을 좋아했다. 아이의 어머니는 "우리 아이는 아무래도 볼링을 시켜야 할 건가 봐요. 이왕이면 야구나 축구처럼 돈 되는 스포츠면 좋았을 텐데 왜 하필 볼링인지 …"하고 걱정했는데 다행히 아이는 커서 볼링이 아닌 건축을 전공하는 중이다.


(아이가 편독기를 거치는 이유)

사실 아이들의 판독을 그냥 내버려만 둬도 아이는 저절로 정독 습관을 획득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가 편독하는 걸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은 편치 않다. 세상엔 좋은 책이 많고, 알아야 할 지식도 다양한데 왜 매일 비슷비슷한 책만 읽으려 드는 건지, 더구나 쉬운 책만 읽으려 하니 그것 역시 걱정이다. 여기에 초등학교 저학년인데도 역사, 과학, 수학 같은 책을 척척 읽어내는 어느 옆집 아이 이야기라도 듣게 되면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비장한 결심을 하게 된다. 그렇게 정독 습관을 향해가던 아이는 위기를 맞게 된다. 저학년 아이들이 편독하는 이유는 아직 활자 읽기가 미숙하고 배경지식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스스로의 힘으로 읽기 적합한 수준의 책을 선택해서 정독의 경험을 쌓아간다. 만약 이 시기에 아이 수준보다 어려운 책을 읽힌다면 당연히 책 내용을 온전히 읽어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는 내용만 띄엄띄엄 읽고, 그렇게 읽은 내용을 토대로 책 전체의 내용을 유추해서 줄거리를 조합하는 방식으로 이해하게 된다. 정독 습관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이런 식의 읽기는 정말 독이 되는 일이다. 이런 독서 경험이 계속해서 누적되면 자연스럽게 습관으로 몸에 밴다. 그리고 이후 80년 동안 아이는 이 습관으로 책을 읽게 된다. 그러니 아이에게 정독 습관을 만들어주기 위해서 지금 부모님이 해야 할 중요한 일은 아이의 편독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다. 그릭 혹시라도 아이가 허세를 부리며 자신의 읽기 수준보다 높은 난도의 책을 읽으려고 하면 좀 말리는 게 좋다. 아니 그런 책을 꼭 읽혀야겠으면 먼저 부모님과 함께 일고 난 다음 아이가 혼자 읽게 하는 게 좋다. 적어도 정독 습관이 완전히 자리 잡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이의 읽기 난도를 높이는 건 정독 습관이 자리 잡고 난 이후 초등학교 3~4학년 때 시작하는 게 적당하다.


(정독기에 만화책을 멀리해야 하는 이유)

정독 습관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한 가지 꼭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바로 만화책 읽기다. 다양한 지식을 쉽고 재미있게 얻을 수 있는 만화책은 참 매력적인 유혹이다. 어려운 지식도 만화로 접하면 더 쉽게 읽을 수 있고, 기억도 잘된다. 그리고 만화책도 책이니 독서의 일종인 것도 맞다. 단지 정독 습관이 완전히 자리 잡기 전까지는 안 읽히는 게 낫다. 만화는 기본적으로 아이들이 보는 그림책과 구성 원리 자체가 다르다. 그림 동화는 이미지(삽화)와 텍스트가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전달하지 않는다. 스토리를 끌어가는 주된 요소가 이미지이고, 텍스트는 이를 보조한다. 하지만 만화의 경우 이미지와 텍스트가 같은 내용을 중복해서 표현한다. 그렇기 때문에 만화를 읽을 때 뇌는 이미지와 텍스트 둘 중 하나를 선택적으로 취한다. 한 마디로 책에 담긴 내용을 다 읽을 필요가 없다. 이렇게 만화책을 띄엄띄엄 읽는 경험도 당연히 습관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만화책을 읽히는 건 정독 습관을 획득한 이후에 시작해도 늦지 않다. 더구나 저학년 때에는 단지 많은 지식을 확보하려고 하기보다 적은 지식으로 다양한 생각을 해보는 경험을 누적해야 할 때이다. 선과 후를 잘 따져보지 않고 과정을 무시한 채 흉내 내려한다면 결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다.


음독 훈련이 가져다주는 3가지 능력

음독 훈련은 부모들에게 퍽 납득이 되지 않는 교육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유독 음독에 대한 질문을 자주 받는다. 안 그래도 더듬더듬 읽는 아이가 그나마 묵독으로 읽으면 조금이라도 내용을 아는 것 같은데, 음독으로 읽으면 도무지 무슨 말인지는 모르고, 말 그대로 글자만 읽는다는 하소연을 하는 부모가 많다. 억지로 음독을 시키는 것도 진이 빠지는 일이지만 아이가 너무 싫어하는데 강요하는 게 옳은 건지, 이러다 자칫 책에 대한 흥미를 잃게 만드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자꾸 소리 내 읽기 연습을 많이 시키라고 하니 난감하다. 세계 모든 나라의 국어(모국어) 교육에 있어서 음독 훈련은 필수이며 매우 강조되고 있다. 그리고 화랑의 저학년 정독 과정에서도 음독 훈련은 강조되는 부분이다. 물론 아이들이 무척 힘들어하는 건 알고 있다. 그럼에도 해야 할 만큼 음독 훈련은 이점이 많다. 음독 훈련의 이점은 크게 3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글자 읽기의 집중력이 높아진다)

우선 음독은 활자 읽기에 대한 집중력을 크게 향상해 준다. 묵독의 경우 활자라는 시각 정보가 바로 뇌로 들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묵독은 효율적인 읽기 형태이다. 하지만 음독의 경우 활자가 시각 정보로 뇌로 들어간 후 입을 통해 뇌로 들어가게 된다. 이렇게 음독은 묵독에 비해 복잡한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비효율적인 독서 형태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점이 음독 훈련을 하는 이유이다. 음독은 묵독에 비해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음독 훈련을 통해 글자 읽기에 대한 집중력을 강화할 수 있다. 활자를 읽을 때 눈의 집중력이 있어야지만 이후 내용을 이미지화해서 이해하는 작업을 할 수 있다. 마치 야구 선수들이 전지훈련을 가면, 평소 야구 경기 모습과는 다소 거리가 먼 타이어를 메고 뛰는 훈련을 하는 것처럼 음독은 읽기의 기초 체력을 키워주는 훈련이 된다. 하지만 음독은 타이어를 메고 뛰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다. 그러니 아이들이 음독을 싫어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다. 만약 그동안 아이가 음독을 좋아했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것이다. 나의 양육 태도가 강압적이진 않았는지, 아이가 의사 표현을 잘 못하는 건 아닌지 살표 볼 것을 권장한다. 물론 음독을 좋아하는 독특한 아이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MBTI가 초거대 E(외향성)로 시작하는 적극적인 아이들은 책을 큰소리로 읽어서 상대방의 주의와 관심을 끄는 걸 좋아하기도 한다.


(정확한 발음 습관을 갖게 된다)

음독 훈련의 두 번째 이 점은 발음을 정확하게 교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발음은 의사 전달을 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다. 오바마나 오프라 윈프리와 같은 사람의 유명한 연설을 다른 사람이 낭독했을 때 대중에게 똑같이 전달될까? 말의 영향력은 내용, 말하고 있는 사람의 신뢰도 같은 기본 요소도 중요하지만, 전달 방식 자체에도 영향을 받는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직업인 아나운서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아나운서를 뽑을 때 방송국에서는 뉴스의 내용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을 선발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우선 신뢰가 가는 이미지와 프로필을 가진 사람을 선발한다. 그리고 발음 시험을 본다. 그래서 아나운서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발음 연습을 하는데, 주로 볼펜을 물고 낱글자의 정확한 발음을 익힌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음독 훈련을 비중 있게 하는 7~8세 아이들은 볼펜을 물고 연습하는 아나운서 지망생처럼 발음을 교정하는데 최적의 신체 조건을 갖게 된다. 바로 앞니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앞니는 다른 이에 비해 빨리 자라지도 않는다. 앞니가 빠진 아이는 마치 볼펜을 문 것처럼 발음이 샌다. 그래서 낱글자를 정확히 발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발음이 새는데도 불구하고 정확한 발음을 하고자 낱글자 하나하나의 발음에 집중한다. 그렇게 앞니가 자라는 1~2년 동안 음독 훈련을 반복하면 다시 앞니가 났을 때 자연스럽고 정확한 발음 습관이 남는다.


(맞춤법을 저절로 터득한다)

음독 훈련으로 얻을 수 있는 세 번째 이점은 맞춤법이다. 한글을 익히는 초등학교 1~2학년 아이들은 학교에서 받아쓰기 시험을 본다. 어른에게는 쉬운 일이지만 아이들은 글자를 정확히 써 내려가는 것을 힘들어하기 때문에 부모는 받아쓰기 연습을 위해 노트에 글자를 반복해서 써보게 한다. 하지만 아직 글씨 쓰기에 필요한 손의 소근육이 발달하지 않은 아이에게는 무척 지루하고 힘든 방식이다. 우리 한글의 맞춤법은 약 95퍼센트가 발음에 의해 정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발음만 정확하게 익혀도 대부분의 맞춤법은 정확히 쓸 수 있다. 화랑에서는 1~2학년 아이들에게 선정 도서를 정확한 발음으로 소리 내 읽기를 반복하는 숙제를 내주는데, 숙제를 성실하게 한 아이들은 맞춤법을 틀리지 않는다. 발음으로 해결되지 않는 5퍼센트 미만의 단어는 쓰임에 의해 맞춤법이 정해진다. 주로 아이들이 헷갈리는 'ㅔ, ㅐ'같은 모음자나 'ㄶ' ㄺ', ㅄ'같은 쌍받침들인데, 이는 발음으로는 구분되지 않는다. 어른들은 이런 단어를 틀리지 않고 사용하지만 그렇다고 헷갈린다고 하는 아이에게 정확한 사용 법칙을 설명하기도 모호하다. 이걸 '체화'라고 하는데, 몸에 익어서 나도 모르게 저절로 되는 걸 말한다. 자전거 타기는 체화의 대표적인 예이다. 정확히 말로 설명할 순 없지만 그냥 타다 보면 몸에 익어서 잘하게 되는 것처럼 5퍼센트 미만의 맞춤법은 이런 체화 과정을 통해 습득된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자꾸 쓰다 보면 어느 순간 그냥 알게 된다. 부모도 모두 그렇게 배웠고 아이들도 역시 그렇게 배우는 영역이다. 따라서 이런 단어는 아이가 '아이(ㅐ)예요? 어이(ㅔ)예요?"라고 물어볼 때마다 가르쳐주면, 반복을 통해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다. 고학년이 되어서도 맞춤법을 틀리는 아이가 있는데, 체화를 통해 익히는 어려운 단어를 틀리는 경우는 흔치 않고 주로 어이없을 만큼 쉬운 단어를 반복해서 틀린다. 이건 발음 습관이 잘못 잡혔기 때문인데 이로 인해 학교 서술형 시험에서 맞춤법 실수로 점수를 깎아먹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한 예로 'ㅁ 받침'을 빼고 쓰는 실수가 잦은 아이의 발음을 잘 들어보면 습관적으로 'ㅁ 받침'을 빼고 발음하는 경우가 많다. 음독 훈련기에 발음을 교정해 주면 이런 실수를 예방할 수 있다.


(음독 훈련 전에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

아이에게 음독 연습을 시키기 전에 부모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음독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공감해 주는 것이다. 음독은 효과가 강력하지만 타이어를 메고 운동장을 뛰는 것만큼이나 가혹하게 재미없는 일이다. 그러니 아이가 음독을 좋아할 거라는 기대나 당연히 잘할 거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그리고 음독 연습을 완수한 아이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해낸 건지 기억하자. 그래야 고래도 춤추게 할 좋은 동기부여를 해줄 수 있다. 이러한 마음가짐을 장착했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아이와 음독 훈련을 시작해 보자. 음독의 목표는 낱글자 하나하나를 정확히 읽어내는 것과 발음에만 집중하면 된다. 그러기 위해 음독을 할 때 부모가 아이 곁에서 발음이 정확한지, 조사와 같은 글자를 빼먹고 읽지는 않는지 확인하고, 잘못된 부분을 교정해 주면서 천천히 읽는 게 바람직하다. 그리고 되도록 글자 읽기가 부담스럽지 않은 책을 골라주는 편이 좋다. 아이가 평소 자주 보는 책을 택하거나 또는 처음 읽는 책이라면 음독을 시키기 전에 부모가 생생한 동화 구연을 두어 번 정도 하면서 미리 글의 내용을 익히는 것도 좋다. 음독을 시킬 때는 최대한 아이에게 재미가 될 요소를 찾아내야 한다. 많은 부모가 사용하는 방법으로 '한 페이지씩 번갈아 읽기'나 '한 문장씩 번갈아 읽기'가 있다. 화랑에서는 수업 시간에 어려운 발음이 나오는 페이지를 지정해서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누가 더 길게 읽을 수 있는지와 같은 게임을 하기도 한다. 게임을 할 때 긴장감을 조성하면 평소 활자 읽기가 정확한 아이도 의외의 실수를 하곤 한다. 아이들이 한글을 막 배울 때 집에 붙여 두었던 '가갸거겨' 같은 한글 파닉스 글자판을 이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부모님과 함께 '발음을 정확하게 해서 대각선으로 읽기' '거꾸로 읽기'와 같이 어떤 순서로 읽을지를 정한 후 누가 더 빨리, 정확히 읽어내는지 게임을 하는 것이다. 이 글자판의 경우 마주하는 글자들의 발음이 아주 조금씩만 변하기 때문에 정확하게 발음하지 않으면 금방 실수하게 된다. 관심을 두고 찾아본다면 지금까지 말한 것 이외에도 생활 속에서 아이와 할 수 있는 더 다양한 읽기 게임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음독을 시킬 때 꼭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음독을 정확하게 하는 일은 많은 집중력이 필요하므로 너무 욕심을 부려서 오래 하려고 하면 안 된다. 저학년 아이들의 경우 보통 7분 정도가 한계다. 그 이상은 집중하기 힘들다. 그래서 3~7분 정도로, 하루에 3~4번 연습하는 걸 권장한다. 학교에서는 음독 훈련을 1~2학년 때 활발히 하고, 3학년 이후가 되면 수업 중에 교과서를 대표로 읽는 것 이외에 따로 음독을 시키지는 않는다. 하지만 음독 훈련은 고학년이 되어서도 꾸준히 해주는 것이 좋다. 문해력을 향상할 수 있는 직접적인 훈련으로 음독만큼 기초 체력을 만들어주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문해력이 높은지, 낮은지는 음독을 시켜보면서 가늠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아이의 활자 읽기 습관도 확인할 수 있다. 보통 아이들에게 1,000 단어 정도로 구성된 텍스트를 음독하게 하고 낱글자를 몇 번 틀리는지 확인하면 아이의 정독 수준을 알 수 있다. 여담으로 하나 버릴 것 없는 음독 훈련은 어른에게도 문해력을 향상하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 어른의 경우 보통 묵독으로 책을 읽는데, 이때 읽기 속도를 조절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어서, 마치 내리막길을 뛰어 내려가는 것처럼 사고의 속도보다 읽기 속도가 더 빨라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건너뛰는 경우가 생긴다. 그래서 내용을 천천히 이해하면서 읽어야 할 경우, 음독을 하면 읽는 속도를 늦춰주기 때문에 활자에 대한 이해력을 높일 수 있다. 그러니 가족이 함께 운동하듯 음독 훈련을 해보는 것도 좋겠다.


그림 동화의 놀라운 힘

유아기 아이들의 정서는 유리처럼 약해서 쉽게 깨질 수 있다. 아직 객관적인 인식 능력이 발달하지 않아서 현실에서 느끼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이성적으로 처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자주 슬프다. 해 질 무렵이니 이제 그만 놀고 집에 가자고 말해도 슬프고, 아이스크림을 더 먹을 수 없다는 사실에도 슬프다. 급식으로 나온 우유갑 아래 적힌 숫자가 반 친구들은 모두 한 자리 숫자인데 자기만 10이었다며 하루 종일 시무룩한 아이를 본 적도 있다. 여기에 억울한 것도 무척 많다. 동생을 꼬집거나, 나쁜 말을 하는 등 혼날 짓을 하고도 혼내는 부모의 태도를 납득하지 못한다. 단지 혼나는 상황이 두려우니 다시 그 행동을 반복하지 않을 뿐이지 잘못을 반성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조금 전까지 친절한 얼굴로 나를 귀여워하던 부모가 화를 내는 종잡을 수 없는 상황이 혼란스럽기만 하다. 아이의 정서는 이토록 연약하지만 그렇다고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번에도 자연은 아이에게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아주 강력한 방어 시스템을 미리 탑재해 두었으니 말이다. 아동기의 특징인 무적의 상상력은 이렇게 탄생한 능력이다. 특히 그림 동화에 자신의 상황과 감정을 투영한 상상은 아이 마음을 강력하게 치유해 줄 능력을 갖춘다.


(아이의 정서를 책임지는 상담 치료사)

부모에게 혼났을 때 아이의 방어기제는 자신을 혼낸 부모와 귀여워하는 부모를 분리하고 서로 다른 존재로 여긴다. 그리고 자신을 혼낸 나쁜 부모는 그림 동화에 등장하는 마녀 또는 괴물에게 투영해서 통쾌한 복수를 한다. 그런 아이의 마음에는 다시 자신을 사랑해 주는 좋은 부모만 남게 되고 온전히 부모를 사랑할 수 있다. 그러니 지금까지 우리가 읽어준 동화책에 등장했던 마녀, 괴물, 계모 등 온갖 악당은 모두 부모였던 것이다. 이렇게 동화는 오랜 시간 동안 아이의 부정적인 감정을 깨끗하게 털어주는 상담 치료사로 아이 곁에 함께했다. 더구나 부작용 걱정조차 없으니 대단한 명의가 아닐까. 그림 동화가 아이의 정서에 미치는 영향은 이 밖에도 많다. 동화는 항상 아이에게 용기를 북돋아 준다. 동화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용기 하나면 족하다. 그럼 모든 일이 척척 해결된다. 더구나 그림 동화에 등장하는 착한 요정 또한 언제나 주인공의 편이다. 세상의 법과 원칙도 모두 정의로운 심판자가 되어 주인공을 승리로 이끌어준다. 동화의 다소 판에 박힌 결론이 시시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아이들에게는 세상을 신뢰하는 데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정이다. 아이는 그림 동화에 자신을 투영해서 매일 용기를 내보고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를 통해 자신감을 얻는 과정을 반복하며 단단한 아이로 성장해 나간다. 이렇게 그림 동화는 아이의 정서를 깨끗하게 정화해 주고, 자존감을 만들어주는 고마운 존재다. 이 밖에도 아이들은 그림 동화를 통해 모험하고 갈등을 해결하며 이루고 싶은 소망을 성취하기도 한다.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자세를 배우고, 모든 변하는 것들과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느끼는 상실의 슬픔을 극복하기도 한다. 또한 꿈에 대해 고민해 보며, 자아실현의 무대가 되기도 한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림 동화를 너무 만병통치약처럼 여기는 게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이 모두가 그림 동화의 능력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이들은 그림 동화를 보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현실에서 타협하는 법을 터득한다. 그리고 현실을 잘 살아갈 수 있는 강하고 지혜로운 사람으로 매일매일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힘, 이미지 리터러시)

과거에는 대부분 정보가 텍스트에 의존해서 전달되었다. 하지만 인터넷이 널리 보급되면서 인간은 지난 4,000년 동안 사용해 오던 정보 전달의 체계를 완전히 바꿔버렸다. 지금까지의 물리적인 제약은 대부분 사라졌고 이제 사람들은 언제든지 다수의 사람들에게 소리, 이미지, 텍스트 등의 메시지를 손쉽게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사회를 정보화 사회라고 부른다. 이렇게 바뀐 리터러시 환경에서는 많은 정보가 텍스트가 아닌 이미지, 혹은 영상(이미지+소리)으로 만들어진다. 비유하자면 나치 독일 치하에 숨어 살던 안네는 글자로 된 일기를 썼지만, 현대의 안네는 인스타에 사진을 업로드한다. 이렇게 이미지 정보를 잘 만들거나 읽어낼 수 있는 이미지 리터러시 능력은 텍스트 리터러시 능력(문해력)보다 현대 사회에서 유용한 재능이 되고 있다. 이런 시대 흐름을 일찍이 간파한 오바마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에 이미 이미지 리터러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생각해 보자. 미래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 아이들에게 활자와 그림 중 무엇이 더 중시되어야 할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텍스트 리터러시 능력의 유용함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이 능력은 사고력 발달에도, 좋은 대학에 가는 데 있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단 아이가 세상과 소통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발돋움하는 데 있어서는 분명 이미지 리터러시도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능력이다. 그림 동화는 아이들이 가장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는 이미지 리터러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림 동화의 삽화를 유아기 아이가 타던 네발자전거의 보조 바퀴처럼 생각한다. 아직은 미숙한 독서가이기 때문에 삽화가 있는 그림 동화를 읽지만 숙련된 독서가로 성장하게 되면 보조 바퀴를 떼는 것처럼 삽화가 없는 줄글 책을 읽게 되는 거라고 여긴다. 그러나 이미지 리터러시의 위상이 달라진 만큼 이제 그림 동화는 줄글 책을 보기 전, 잠시 머물러 가는 유년기 독서의 수단이 아닌, 이미지에 담긴 메시지를 읽어내고 창조해 내는 예술 감각을 일깨워줄 중요한 수단으로 여길 필요가 있다.


(엄마표 이미지 리터러시 교육법)

화랑의 저학년 교육 과정에서는 이미지 리터러시를 무척 중시한다. 대표적으로 아이들과 함께 삽화에 그려진 인물의 표정과 행동을 보며 인물이 느끼는 감정과 살아온 삶, 가치관에 대해 이해해 본다. 또한 작가가 삽화에 숨겨둔 상징을 찾아보고 이를 통해 작품의 주요 메시지를 읽어내기도 한다. 대표적인 사례 몇 가지를 들어보면 우선, 전쟁터에서 도망친 장군과 변함없이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해내는 농부의 이야기가 담긴 창작 동화 "장군님과 농부"(권쟁생, 창비)에서는 큼지막하게 그려진 투박한 농부의 손을 보며, 농부가 살아온 삶에 대해 질문한다. '왜 이렇게 굳은살이 생긴 걸까? 흉터는 무엇 때문에 생기게 된 걸까? 에 대해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고사리 같은 아이들의 손과 농부의 손을 비교해 본다. 이후 세상에는 많은 손이 있는데 농부와 비슷한 손을 가진 사람은 누가 있을지 찾아보기도 한다. 두 번째 사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지하철 노선도를 디자인한 디자이너 비넬리에 대한 인물 동화인 "마시모 비넬리의 뉴욕 지하철 노선도"에서는 복잡한 과거의 지하철 노선도와 미니멀한 노선도의 디자인을 비교 감상해 볼 수 있다. 그러고 난 다음 '미니멀'이 담고 있는 삶과 철학에 대해 이야기해 본다. 이후 더 확장해서 각자의 디자인 취향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하고, 미니멀이 필요한 곳을 찾아보는 등 실용 예술에 대한 자기만의 철학을 정립해 볼 수 있다. 세 번째 사례, 추상화가인 바실리 칸딘스키에 대한 미술 동화인 "소리를 그리는 마술사 칸딘스키"에서는 '추상화 특별 훈련 활동!'이라는 추상화 감상 훈련을 한다. 이때 1단계로 칠판에 빨간색, 파란색, 검은색 점을 찍고 감상한 후 서로의 느낌에 대해 이야기해 본다. 이후 2단계로 불규칙한 직선, 불규칙한 곡선을 그리고 이런 선을 보았을 때의 느낌에 대해 감상해 본다. 각각의 선에서는 어떤 소리가 들리는지, 어떤 계절을 표현한 거 같은지, 보고 있으면 어떤 기분이 드는지 등 떠오르는 경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이런 훈련을 통해 아이들은 예술 작품을 볼 때 사람마다 모두 다른 느낌을 받고, 나만의 메시지를 찾아가며 작품을 감상해야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런 기초 훈련을 마치고 난 후 본격적으로 칸딘스키 추상화 감상을 하게 되는데 아이들은 소리를 그림에 담아 시각적으로 표현한 칸딘스키와 교감하며 작품의 소리를 기울여 듣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철학 동화인 "벽 타는 아이"(최민지, 모든요일그림책)에서는 아이들이 직접 세상에 대한 진실을 알려주는 뉴스를 만들고 앵커가 되어 발표해 본다. 작품의 배경인 '보통 마을'사람들은 높은 담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세상에 대한 정보를 단절한 채 살아가는데, 이 마을의 '보통'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자유와 개성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수단이다. '보통 마을'에서 벽을 타는 사람은 탄압의 대상이 되는데, 이들은 벽 너머 세상의 진실을 볼 수 있는 지성을 상징한다. 이같이 다소 무거운 주제를 다룬 작품임에도 동화스러운 귀여운 관점과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결말에 드러나야 할 핵심 메시지를 앞 면지 삽화를 통해 미리 알려준 후 이야기를 시작하는 독특한 구성도 눈길을 끈다. 갖가지 다양한 미술 기법으로 표현한 예술성 높은 삽화의 그림 동화를 읽어보고, 작가가 삽화에 정성스럽게 담아둔 크고 작은 메시지를 마치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읽어내며, 나를 투영해 보는 훈련은 아이들의 미래에 큰 아비투스(문화자본)가 될 것이다. 그러니 오늘 저녁에는 아이와 함께 그림 동화의 삽화를 공들여 읽고 대화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


전래·명작 동화를 읽어야 하는 이유

인간은 본래 선한 본성을 갖고 있을까? 악한 본성을 갖고 있을까? 이 같은 논쟁의 진리가 무엇이건 간에 내 자녀가 선한 마음을 갖고 주변 사람들과 조화롭게 어울리며 사랑받는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모두 한결같다. 이런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능력이 바로 윤리, 가치관, 규범 같은 태도다. 다소 고리타분한 단어로 여겨질 수 있겠으나 자신이 속한 사회가 추구하는 윤리관, 가치관을 함께하고 규범에 순응하고자 하는 태도는 상당히 중요하다. 우리 사회는 이런 태도가 잘 형성된 사람을 존경하지만, 반대로 잘 형성되지 못한 사람을 사회로부터 격리하곤 한다. 그런데 가치관과 윤리관은 지금까지 어떻게 전달되어 왔을까? 이 문제에 대해 프랑스의 철학자 푸코는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와 같은 교육기관이 그걸 가르치는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동 교육기관이 없던 시절, 이를테면 삼국시대 초기라든가 그 이전 시대에도, 그 시대에 맞는 가치관이 전수되어 온 걸 보면 콕 집어 교육기관만이 전수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전래 동화는 신뢰의 바탕을 만든다)

선사시대 이래 오늘날까지 아이들에게 자국의 문화를 전수해 온 건 바로 전래 동화이다. 우리는 책으로 만들어진 전래 동화를 접해왔지만, 전래 동화의 원래 모습은 책이 아닌 구술로 전해지는 이야기였다. 이야기는 인간이 이해하고 기억하기 쉬운 형태를 하고 있다. 사람들은 오랜 시간 동안 이야기에 자기 문화권의 가치관과 윤리관을 담아 입에서 입을 통해 전달해 왔다. 우리 아이들 역시 전래 동화를 통해 우리 문화가 추구하는 인간상을 자연스럽게 배우고 그에 걸맞은 아이로 성장해 나간다. 한 예로 "콩쥐 팥쥐"를 생각해 보면, 엄마는 팥쥐만 예뻐하고, 콩쥐는 차별한다. 보통의 부모가 아이들을 지극히 공평하게 대했을 때, 오히려 아이들은 차별받았다고 느낀다. 아이가 양육자에게 갈구하는 사랑은 나에게만 절대적인 사랑이기 때문에 누군가와 나누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반영되는 것이다. 거기에 새엄마는 콩쥐에게만 해결하기 어려운 힘든 과제를 주고, 동생 팥쥐에게는 아무것도 시키지 않는다. 아이의 입장도 똑같다. 엄마는 나에게만 해결하기 어려운 학습지, 영어 학원, 사고력 수학 숙제 같은 할 일을 준다. 그리고 동생은 놀기만 한다. 동생의 나이가 2세든 4세든 아이에게 그런 건 고려 대상이 아니다. 동생이 없는 아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언니에게는 뭐든지 새 걸 사 주고, 나에게는 언니가 쓰던 옷, 장난감을 준다. 그러니 콩쥐의 처지는 나와 정말 똑 닮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 동화에서 콩쥐의 태도는 지극히 비현실적이다. 보통 아이들은 이런 상황에서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린다. 표현하건 하지 않건 말이다. 하지만 마을 잔치에서 한참 더 놀고 싶지만 집에 가야 했을 때도, 꽃신을 한 짝 잃어버렸을 때도 콩쥐는 결코 짜증 내는 법이 없다. 그런 콩쥐의 고운 마음씨를 아주 잠깐 보고 어떻게 안 건지 영문을 알 순 없으나, 아무튼 그 마음씨에 반한 원님과 결혼하는 결말로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콩쥐 팥쥐"뿐만 아니라 선행의 가치를 가르치는 "은혜 갚은 까치", 정직을 가르치는 "금도끼 은도끼", 효에 대해 알려주는 "효심 깊은 호랑이" 등 모든 전래 동화에는 지난 수천 년의 시간 동안 우리 문화권이 추구해 온 가치관과 윤리관이 담겨 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아주 오랜 시간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졌고, 이제는 전래 동화라는 책에서 담겨 아이들에게 전파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이 전래 동화를 보는 건 그 문화권에서 신뢰받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드는 일이다. 준비물을 갖고 오지 않은 친구에게 기꺼이 연필을 나눠줄 수 있는 아이와 내 걸 조금이라도 나누면 속이 쓰린 아이, 두 아이 중 누가 더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먼 미래는 차치하고 당장 누가 반회장이 될 확률이 높겠는가?


(선악 구도가 가르쳐주는 것들)

이런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부모들은 전래 동화를 편독하는 아이에 대해 불안함을 느낀다. 주요 이유는 전래 동화의 구조가 너무 단순한 권선징악 구조이며, 선악 구분이 지나치기 때문에 논리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흥부 놀부"를 읽을 때 동화는 흥부를 절대 선, 놀부를 절대 악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세상에 순도 100퍼센트의 선 또는 악은 없다. 굳이 찾으러 든다면 신의 선한 마음, 어머니의 사랑 정도가 있겠지만 그건 처음부터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고들 하지 않는가. 빛이 있으면 그늘도 있는 것처럼 선에도 그 이면이 있는 거고, 악에도 다 사연이 있다. 이런 양면을 모두 고려해서 올바른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논리적 사고다. 동화에서 흥부는 형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고, 형을 질투하지 않는 선한 측면이 있는 반면, 미래를 지혜롭게 설계하고 스스로 환경을 극복하고자 노력하지는 않는다. 놀부의 경우 부모가 주신 모든 것을 동생과 사이좋게 나누지 않고 독점했다. 그뿐만 아니라, 부자임에도 주위 사람들과 나누지 않고 욕심을 부린 악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스스로 부자기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부를 계속 키워간 자수성가형 인물이라는 점은 본받을 만하다. 이런 점을 고려하지 않고 절대 선, 절대 악으로 나눈 것 자체가 동화의 논리적 결함이다. 이러니 부모들은 장차 논리적인 판단력을 길러야 할 아이가 비논리적인 동화를 계속해서 보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그런데 이런 흑백논리는 오히려 열 살 이전에 아이들이 전래 동화나 세계 명작 동화를 많이 읽어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이 시기 아이들은 객관적 사고를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주로 이항 대립(註)의 흑백논리로 사고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는 한쪽이 선이면 반대쪽은 자연스럽게 악이 되는 것이다. 선과 악 사이에 중간에 있다는 걸 이 시기 아이들은 아직 이해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흑백논리로 구성된 전래 동화의 전형적인 구조는 아이들에게 있어서 오히려 더 납득되는 세계가 된다.


(註) 이항 대립(二項 對立, binary opposition)은 의미적으로 대립하는 관련된 용어나 개념의 쌍이다. 즉 빛과 어둠, 선과 악, 남성과 여성, 주체와 객체, 중심과 주변, 참과 거짓과 같이 세상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방식은 이러한 쌍으로 나뉘며 정돈된다. 서구 철학은 오랫동안 이항 대립 구조 위에 세워져 왔다. 플라톤은 이데아와 현상계를 대립시켰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과 질료, 능성과 현실성을 구분했다. 중세 신학은 천상과 지상, 육과 영, 죄와 은혜의 긴장 속에서 신학적 체계를 정립했다. 근대에 이르러 이성은 감성을 억누르며 중심의 자리를 차지했고, 주체는 객체를 지배하며 세계를 해석해 왔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도 그 밑바탕에는 ‘생각하는 자’와 ‘생각되지 않는 것’이라는 구분이 있다. 이항 대립은 사고를 정리하고 체계를 구성하게 하지만, 동시에 그 구분에서 벗어나는 것은 비합리적이고 비정상적인 것으로 배제되어 왔다. 이러한 이항 대립은 위계와 우열을 포함하고 세계를 고정된 질서로 구획해 다양성과 혼종을 억압한다는 지적이 있을 뿐만 아니라 회색지대 배척과 우열 판단을 낳는다는 비판이 있다. 그래서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1930~2004)는 이항대립의 위계를 해체하는 등의 '해체론'을 주창했다.


(논리적 판단만 자라날 때의 부작용)

자칫 이 시기 아이에게 논리를 선행하려는 목적으로 "흥부가 아무리 형한테 양보했어도 스스로의 힘으로 가족을 책임지려고 했어야지. 그리고 놀부가 부자가 되기 위해 무척 노력한 점은 옳은 태도야"라고 한다면 어떨까? 아직 논리가 발달하기 이전이라 이항 대립의 사고를 하는 아이는 '아! 놀부의 행동이 옳은 거구나'라고 학습하게 된다. 하지만 그 반대편에는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괴롭혀도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세트처럼 따라온다. 그 결과 아이는 가치관에 큰 혼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항 대립의 독특한 사고 체계 역시 하얀 도화지 같은 아이에게 선한 심성의 바탕을 심어주기 위한 자연의 의도된 설계다. 헷갈릴 일 없이 선한 것은 절대 선이고, 악한 것은 절대 악이었을 때 아이는 악을 멀리하고 선을 추구한다. 생각해 보자. 아이의 논리력이 무척 강해서 모든 것이 옳은지 틀렸는지를 판단하고자 한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상이 정말로 논리적인 곳인가? 억울한 일을 당했지만 참아야 할 때도 많고, 손해가 되는지 알지만 양보할 줄 아는 태도도 필요하다. 단돈 100원을 손해 보았다고 부들부들 떨고 어쩔 줄 몰라하며 하루의 기분을 모두 망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내 아이가 그런 부류의 판단력이 뛰어난 사람으로 크길 원하는가? 사람들 중에는 단지 논리를 위한 논리를 찾는 사람이 있다. 소설 "레미제라블"에 나온 자베르 형사, "주홍글씨"의 칠링 위즈 같은 사람이 그런 인물이다. 반면 모두에게 유익한 선한 결말을 위해 논리를 활용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관용적인 사람 혹은 현명한 사람이라고 부르며 존경한다. 논리의 종이 되어 섬기는 삶을 살지, 논리의 주인이 되어 지배하는 삶을 살지는 유년기에 만들어진 선한 바탕에 의해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여러분의 아이가 어느 쪽에 속한 사람이 되길 희망하는가. 오늘도 아이는 선을 향해 부지런히 달려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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