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이색과 한덕수의 부작위(不作爲)

by 박사력

공민왕의 죽음과 우왕의 즉위

이색(李穡, 1396~1396)은 호가 목은(牧隱)으로 고려 말의 정치가이자 대학자이다. 그의 제자인 정몽주(포은, 圃隱), 길재(야은, 冶隱)와 더불어 고려의 삼은(三隱)으로 불린다. 이색은 고려 말 성리학의 거두(巨頭)인 이제현에게 사사(師事)했고 정몽주, 길재, 정도전, 권근, 이숭인, 남재, 하륜, 윤소정을 비롯한 수많은 문하생을 배출해 이제현을 이은 조선 성리학의 정통 계보로 평가받는다. 고려 31대 공민왕(1351~1374)은 즉위 초기에는 개혁 군주로 백성들로부터 많은 신망을 받았다. 그러나 1365년 왕비 노국공주의 죽음 이후 방황하다가 1374년 9월(음력) 자제위 홍륜 등에게 시해됐다. 이후 우왕이 즉위하자 고려의 현실은 더욱 피폐해졌다. 공민왕의 아들인지 신돈의 아들인지 의심받으며 정통성에 약점이 있던 우왕은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 그 대신 우왕을 옹립하는데 앞장섰던 이인임(1312~1388)이 권력을 차지했다. 우왕은 그를 절대적으로 따랐고, 이인임은 우왕이 정치에 멀어지도록 주색잡기에 몰두케 했다. 이에 우왕은 암군(暗君)이라는 말조차 무색할 만큼 방탕한 생활로 일관했다.


이인임 일파의 전횡과 몰락

1374년 9월 우왕 즉위 후 권력을 독점한 이인임은 인사를 마음대로 했고, 안팎의 요직이 모두 그의 수족들로 채워졌다. 특히 그의 심복인 임견미는 잔혹하고 악랄해 백성들의 땅을 수탈(收奪)하고 양민을 모함해서 노비로 만드는 일을 일삼아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아무튼 이인임 일파는 권력자가 전횡할 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을 저질렀다. 따라서 우왕을 앞세워 이인임 일파가 권력을 행사한 13여 년(1374년 9월~1388년 1월)은 고려의 암흑기였고, 결국 고려 멸망의 계기가 됐다. 1386년 이인임이 늙고 병이 들어 사직하고 그의 일파인 임견미와 염흥방이 실권을 차지한 후에도 이인임을 능가하는 악행이 계속됐다. 임견미와 염흥방은 노비들을 풀어서 백성들의 논밭뿐만 아니라 관리들의 토지까지 강탈했다. 더구나 1388년 1월 염흥방에 의해 토지를 빼앗긴 관리 조반의 옥사 사건까지 일어났다. 이에 그동안 이인임 일파의 부패를 싫어하면서도 눈감아 줬던 우왕의 장인(최영의 서녀가 우왕의 후궁)이자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최영이 측근 이성계와 함께 이인임 일파를 일망타진하는 ‘무진피하’(註)를 일으켰다.


(註) 1388년 정월에 우왕의 명령을 받은 최영과 이성계 등이 이인임을 실각시킨 뒤 임견미, 염흥방 등을 숙청한 사건이다. 무진년에 일어났다고 해서 '무진피화'라 하며, 정월(正月)에 처벌했다고 해서 '정월지주'(正月之誅)라고도 한다.


정도전의 이색에 대한 탄핵

'무진피하' 직후인 1388년 5월(음력) 이성계가 우왕과 최영의 요동 정벌에 대한 불만으로 위화도에서 회군해 실권자인 최영을 숙청하고 권력을 잡았다. 하지만 기득권 세력의 저항도 만만치 않아서 수년 동안 권력 투쟁이 이어졌다. 이때 이성계의 핵심인사 정도전은 이색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색은 성균관 신흥사대부의 좌장이었고, 두루 존경받는 학자였다. 하지만 신흥사대부가 이인임과 치열하게 싸울 때 도외시했고, 우왕의 실정을 비판하지 않았으며, 위화도 회군 후에는 이성계의 반대 진영을 결집하는 인물이 됐다. 특히 정도전, 조준 등이 주도한 전국의 토지를 모두 국유화한 다음 직접 농사짓는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전제개혁(田制改革)에 반대했다. 이는 토지를 많이 보유하고 있던 기득권 계층 이색의 한계였던 것이다. 이성계파에서는 여러 가지 구실로 그를 죽이려 했지만 뚜렷한 명분이 없었다. 이에 정도전은 이색이 우왕 때 판삼사사(정1품) 등의 재상으로 있으면서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으니 죽여야 한다는, 이른바 부작위(不作爲)의 책임론을 제기했다. 전에 없던 논리라서, 이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권력자의 책임 문제를 가볍게 보지 않은 정도전의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한덕수의 뻔뻔한 부작위

이색의 부작위 사건 이래로 630여 년이 흐른 2022. 5. 21. 한덕수는 윤석열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로 취임했다. 한덕수는 2024. 12. 27. 직무가 정지됐지만 1987년 민주화 이후 2025. 1. 3. 기준으로 최장기 국무총리의 기록을 세우고 있다. 한덕수는 정도전에게 신랄하게 탄핵당했던 고려말의 재상 이색보다도 훨씬 더 심각한 부작위를 저질렀다. 첫째, 한덕수는 국무총리로서 윤석열의 12.3 내란 때 마땅히 해야 할 책무인 불법 비상계엄 선포를 끝까지 막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당시 경제 불안과 대외 신인도 하락을 이유로 반대했다고 하나,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불법 비상계엄 선포를 막아야 할 책무가 있다.) 국무회의 심의사항에 대한 의안도 제출하지 않고 심의도 제대로 거치지 않았다. 이는 부작위의 죄를 넘어 내란 공범으로까지 처벌될 수도 있다. 둘째, 한덕수는 2024. 12. 26. 국회가 가결한 헌법재판관을 임명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보류했다. 그는 헌법재판관 임명 보류에 대해 구구한 변명으로 일관했지만, 그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억지와 궤변에 불과하다. 한덕수의 헌법재판관 임명 보류에 대해, 2024. 12. 28. 김정환 변호사(법무법인 도담)가 ‘헌법재판관 임명권 불행사 부작위 위헌확인’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해 2024. 12. 31. 전원재판부에 회부됐다. 조만간 헌법재판소가 합리적인 심판 결과를 도출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읽을 만한 중앙일보 사설과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