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한국인은 알타이산맥이나 바이칼호 주변의 북방계 인종의 영향을 받아 몽골인과 유사하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최근의 고유전체 연구는 한국인에 영향을 준 북방계가 동남아시아 순다랜드(註)에서 북쪽으로 이동한 아무르강 유역의 수렵채집민에서 기원했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실제 유전적으로 한국인은 몽골인과 꽤 차이가 나며 중국 북동부 사람(만주족)과 가장 유사하고, 일본인과도 비교적 가깝다(단 현대 일본인이 보유한 10% 정도의 조몬인 유전자가 한국인에게는 거의 없다).
(註) 순다랜드는 빙기로 해수면이 낮아진 지난 260만 년 동안 노출된 큰 육지에 해당하는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인도네시아의 발리주, 보르네오섬, 자바섬, 수마트라섬과 그 주변의 작은 섬들, 아시아 본토인 말레이반도를 포함한다. 1만 1700년 전쯤 빙하기가 끝나고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대부분 바다에 잠겨 인도네시아 등이 섬이 됐다.
대략 5만 년 전쯤 아프리카에서 출발해 해안을 따라 이동하던 호모 사피언스의 한 갈래가 동남아시아 대륙에 속했던 순다랜드에 도착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적도를 향해 남쪽으로 향했고(바다 건너 사훌랜드까지 이동한 사람들은 오세아니아 원주민으로 분기), 일부는 빙기의 추운 환경 속에서도 북쪽으로 이동했다. 북진하는 과정 중에 인도차이나 지역에서 떨어져 나간 일부가 동남아시아 수렵채집민 호아빈 집단으로 이어졌다. 계속 북쪽으로 전진한 수렵채집민은 중국 북부, 몽골, 만주에 이르는 광범위한 평원의 초지에 터를 잡았다. 이들이 바로 티안유안인(註)으로 동북아시아 수렵채집민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동아시아 북부뿐만 아니라 당시 육지로 드러났던 한반도 서해 지역에도 퍼져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민물 어패류를 선호하던 티안유안인에게 어패류가 풍부한 서해 지역의 습지와 초지는 괜찮은 생활환경이었다. 반면 한반도는 높은 산지로 초지가 부족해서 한반도 내륙으로 유입된 수렵채집민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즉 한반도는 아시아 대륙의 동쪽 변두리에 있는 데다 대부분 산지로 이뤄져 기온이 낮았기 때문에 티안유안인 계통의 수렵채집민이 즐겨 찾는 곳이 아니었다. 한편 북진하던 수렵채집민 일부는 3만 8000년 전 이후 류큐 제도(오키나와 및 사키시마 제도)를 따라, 혹은 한반도를 통해 일본으로 진입했다. 이들이 바로 조몬인(註)으로 이후 대륙으로부터 거의 고립되면서 티안유안인과는 다른 집단으로 분기했다. 다만 일본의 조몬 수렵채집민은 유전적으로 유사한 여러 사람이 섞인 집단이다. 즉 순다랜드에서 남쪽 경로를 통해 일본으로 들어와 주축 세력으로 발전한 조몬인의 선조가 이후 남쪽과 북쪽 그리고 한반도를 통해 진입한 여러 수렵채집민과 섞인 것이다. 일본의 조몬인은 약 2800년 전부터 한반도에서 건너온 벼 농경민이 야요이 문명(弥生文明)을 세우자 북쪽의 홋카이도와 남쪽의 류큐 열도로 밀려났다. 홋카이도의 원주민인 아이누족은 조몬인과 이후 북쪽 사할린을 통해 들어온 아무르강 수렵채집민이 섞여 형성된 집단이다.
(註) 중국 베이징 인근 티안유안 동굴에서 채취한 약 4만 년 전의 인골을 염두에 두고서 이들을 티안유안인이라고 부른다. 동북아시아 수렵채집민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아무르강 수렵채집민도 티안유안인에서 분기됐다.
(註) 일반적으로 조몬인들이 류큐제도 등 남쪽으로부터 왔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조몬인 일부는 한반도 남부에서 수렵채집 생활을 하다가 일본에 진출했을 수도 있다. 즉 부산 가덕도 장항, 통영 연대도 8300년 전~7000년 전 인골에서 조몬인의 유전자는 15~17%를 차지했고, 통영 욕지도의 4000년 전 인골은 조몬인 유전자가 자그마치 85%를 넘어섰다. 반면 여수 안도, 서산 대죽리 유골에는 조몬인의 유전자를 거의 발견할 수 없었다. 한편 가야인과 백제인의 유골분석도 있었는데 가야인의 유골에서는 20~30%의 조몬인 유전자를 발견했으나 백제인의 유전자에서는 조몬인의 유전자를 발견할 수 없었다. 2022년 6월, 가야 고분과 김해의 패총에서 기원후 300~500년 사이 묻힌 22명의 가야인 인골 DNA 분석 결과가 발표됐다. 현대 한국인에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조몬인 DNA가 20% 정도 됐다. 한반도 남해안 신석기 인골에서도 조몬인 DNA가 높게 나타났지만, 삼국시대 초기까지 높게 유지될 것으로 예상하지 못했다. 이는 오랫동안 한반도 남해안과 일본에 살던 조몬인 집단 사이에 빈번한 왕래가 이뤄졌음을 짐작게 한다. 다만 6세기 백제의 고인골에서는 조몬인 DNA가 전혀 없었다. 반면 일본은 신석기 후기와 2800년 전의 고인골 유전체의 조몬인 기원 DNA가 100%로 당시 일본은 완전히 조몬인의 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한반도와 북동아시아 등에서 유입된 이주민으로 인해 조몬인 DNA가 급격히 희석돼 현대 일본인에게는 10% 정도만 남아있다.
과거 아무르강 유역에 살았던 수렵채집민의 기원을 보여주는 고유전체 자료가 최근 발표됐다. 이 자료는 아무르강 유역의 수렵채집민이 동부아시아인의 형성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아무르강 유역에서 발견된 3만 3000년 전의 인골은 4만 전의 티안유안인, 3만 4000년 전의 몽골 살킷인과 유전적으로 상당히 가까운 것으로 판명됐다. 이는 티안유안인 계통이 몽골, 만주, 연해주 등의 동아시아 북부의 넓은 지역에 걸쳐 분포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다만 몽골의 살킷인은 야나의 고대북시베리안과 활발히 교잡했지만, 아무르강 유역의 수렵채집민은 내륙의 중앙이 아닌 외곽에 고립돼 있었서인지 별다른 교류가 없었다. 높은 고립도는 아무르강 집단이 티안유안인 계통에서 분기한 주요 요인이었을 것이다. 마지막 빙기 최성기의 매서운 추위는 유라시아 전역의 수렵채집민에게 영향을 미쳤다. 동아시아도 예외일 수 없었다. 아무르강 유역의 1만 9000년 전 고유전체 자료는 당시의 추위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아무르강 집단이 티안유안인 계통으로부터 분리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1만 9000년 전의 수렵채집민은 3만 3000년 전의 선조와는 유전적으로 큰 차이를 보이고, 이후에 나타난 후손과는 유전적으로 가깝게 연결된다. 마지막 빙기 최성기가 약 2만 5000년 전부터 시작됐으나 아마도 아무르강 집단이 티안유안인 계통에서 분기되는 시점은 1만 9000년 전보다는 이른 시점일 가능성이 높다. 아무르강 집단은 추위를 버터내고 생존에 성공했지만, 나머지 티안유안인 계통은 마지막 빙기 최성기의 혹독한 기후를 극복하지 못하고 대부분 소멸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아무르강 집단은 티안유안인 계통을 대신해 마지막 빙기 최성기 이후에 동아시아 북부 전역을 점유했다.
2만 5000년 전부터 마지막 빙기 최성기가 시작되면서 한랭화가 극심해졌고 한반도의 수렵채집민 인구는 빠르게 늘어갔다. 즉 북방에서 사람들이 추위를 피해 남쪽으로 내려온 것이다. 이때 한반도로 남하한 이들은 대부분 만주와 연해주의 아무르강 유역에서 살던 수렵채집민이었다.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해수면 하강으로 육지화된 서해의 초지였지만 이들 가운데 일부 무리가 동쪽의 한반도로 밀려들어 왔다. 반면 북방의 수렵채집민이 남하하면서 만주와 아무르강 유역의 인구 밀도는 현저하게 감소했다. 동아시아 전체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온 마지막 빙기 최성기의 추위도 자연스러운 기후 순환 주기를 이기지 못하고 약 1만 9000년 전부터 약해지는 조짐을 보였다. 이후 수천 년간 동아시아 북부의 인구는 증가했고, 반대로 한반도의 인구는 감소했다. 높아진 기온으로 해수면이 상승했기에 서해 평야의 수렵채집민은 내륙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해수면 변동이 없었더라도 어차피 이들 집단은 움직였을 것이다. 기후가 온난해지면서 동아시아의 대부분이 점차 삼림으로 덮였고 북쪽으로 올라가야 초지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수렵채집민 집단도 초지를 찾아 아무르강 유역으로 돌아갔다. 고립에 대한 두려움도 한반도를 떠난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 결과 대략 8200년 전까지 1만 년 넘게 한반도의 인구는 낮은 수를 유지했다. 8200년 전 갑작스럽게 기온이 떨어지자 아무르강 하류의 수렵채집민 무리가 추위와 경쟁을 피해 다시 남쪽으로 움직였다. 이때 처음으로 한반도에 토기 문화가 전파됐다. 홀로세로 접어든 이후 온난한 기후 덕에 아무르강의 인구는 빠르게 늘었으므로 8200년 전의 갑작스러운 저온 현상은 식량 위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자원을 두고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자 북방의 수렵채집민이 살 곳을 찾아 동해안을 거쳐 한반도 남동해안까지 내려왔다.
갑자기 찾아온 8200년 전의 한랭화가 잦아든 후 기후는 급하게 제자리를 찾아갔다. 당시 기온의 상승 속도가 상당히 빨랐기 때문에 한반도의 생태계는 수백 년간 기후에 맞지 않는 모습을 띨 수밖에 없었다. 대략 7600년 전에 이르러서야 온대 우림이 크게 확장하면서 한반도는 이른바 ‘홀로세 기후 최적기’로 들어서게 된다. 이후 온난 습윤한 기후가 3000년 가까이 이어지면서 한반도 생태계의 생산성은 정점에 올랐다. 따뜻한 기후 덕분에 ‘최적기’라는 단어가 무색하지 않게 한반도의 동식물 개체 수는 급증했다. 북대서양 열염순환의 교란이 1000년 주기로 기후 변화를 불러왔던 홀로세 초기, 그리고 태평양의 장주기 엘니뇨가 500년 주기로 기후 변화를 가져왔던 홀로세 후기와는 달리, 홀로세 중기의 최적기에는 뚜렷한 변동 없이 기후가 안정적으로 유지됐다. 이러한 경향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만주, 연해주, 일본, 등지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났다. 최적기의 따뜻한 기후와 참나무 원시림은 한반도의 수렵채집 사회가 성장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수렵채집민들은 도토리와 같은 열매나 야생 동물, 어패류 등을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었다. 과거와 달리 먹거리를 위해 멀리 움직일 필요가 없다 보니 이들의 이동 반경은 지속해서 감소했고, 결국 해안이나 하천을 중심으로 정주하는 문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반도 유적의 탄소 연대 자료를 모아 시기별 주거지 수를 추정한 연구 결과는 대략 5700~5500년 전부터 인구가 증가하고 정착 수렵채집민의 수가 늘어났음을 보여준다. 이때는 랴오허강(遼河) 유역이나 랴오둥반도(遼東半島)에서 한반도로 조/기장 농경문화가 처음 전파된 시기와 가깝다. 최적기의 온화한 기후 덕에 정주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던 한반도의 수렵채집민 중 일부가 남들보다 먼저 농경이라는 새로운 실험을 시도했다. 먹거리는 풍부했으므로 실패에 대한 부담은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다. 조, 기장, 팥, 콩 등의 초기 농경은 들이는 시간에 비하면 얻는 것이 그리 많지 않았지만 야생 먹거리가 부족할 때 보조 생계 수단으로 요긴하게 활용됐다. 농경이 시작된 후에도 주거지가 크게 늘지 않았음을 고려할 때 기후 최적기에 조나 기장 재배가 본격적인 농경으로 이어지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농경이라는 새로운 문화가 더해지면서 수렵채집민의 삶이 더욱 풍족했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럼 최적기에 한반도로 최초의 농경문화를 전달한 사람들은 도대체 누굴까? 북방의 조/기장 농경이 한반도로 유입될 때 대규모 집단의 이동이 있었을까? 아니면 소수의 사람에 의해 문화만 전파된 것일까? 이와 관련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홀로세 기후 최적기에는 전체적으로 온난 습윤한 환경이 조성되면서 전 세계 여러 곳에서 초기 문명이 발생하고 인구가 늘어났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한반도의 생태계 또한 최적기 내내 풍요로움을 유지했다.
3000년 가까이 이어지던 홀로세 기후 최적기도 결국 4800~4700년 전 지구의 세차 운동과 장주기 엘니뇨 등의 변화로 끝이 났다. 이때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는 어려울 정도로 북반구의 여러 곳에서 뚜렷한 사회 변동이 일어났다. 흥성하던 문명과 집단이 갑작스러운 쇠락을 겪었고 집단 구성원들의 대규모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빈번한 이주는 집단 간 갈등으로 이어졌고 소멸한 기존 문화를 대신해 새로운 문화가 들어섰다. 한반도에서는 4800년 전 이후로 먹을 것이 부족해지면서 수렵채집민이 식량 확보를 위해 더 멀리, 더 자주 이동해야 했다. 정주 생활을 지속하기에는 위험 부담이 컸으며 이동성의 강화는 주거지 수의 감소로 이어졌다. 이들은 과거에 경험하지 못한 추위와 가뭄에 빨리 적응해야 했다. 중국 랴오허강 유역의 랴오허 문명(遼河文明, 註)의 정점인 훙산 문화(紅山文化, 註)와 황허강(黃河) 유역의 양사오 문화(仰韶文化, 註)가 비슷한 시기에 쇠퇴할 정도로 기후 변화의 여파는 컸다. 최적기가 끝나며 야기된 변화가 한반도를 포함하는 동북아시아 전역에 광범위한 혼란을 몰고 온 것이다. 최적기 이후 장주기 엘니뇨가 차츰 강해지면서 적도 서태평양의 해수면 온도는 떨어졌고 한반도는 가물어졌다. 최적기가 끝난 4800년 전과 유사하게 4200년 전과 3700년 전에도 기후가 건조해지면서 한반도의 수렵채집 사회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렇지만 4200년 전의 기후 변화가 북반구 전역에 심각한 파장을 일으킨 것과 비교할 때 한반도에 미친 영향은 별로 크지 않았다. 당시까지만 해도 정주 인구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지역에서는 대 가뭄의 위력이 엄청났다. 당시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 중국의 황허강, 랴오허강 등을 주도하던 대 문명(註)들이 모두 이때 한꺼번에 무너졌다. 4200년 전에 이어 3800~3700년 전에 발생한 기후 변화는 한반도의 정주 수렵채집민 사회를 거의 소멸 직전까지 몰고 갔다.
(랴오허 문명의 훙산 문화, 황허 문명의 양사오 문화)
(註) 랴오허 문명은 만주 일대의 서쪽인 랴오허강 유역을 중심으로 새롭게 발견된 고대 문명이다. 샤오허시 문화(小河西文化, 기원전 7000~6500년), 싱룽와 문화(興隆窪文化, 기원전 6200~5200년), 훙산 문화(紅山文化 기원전 4700~2900년), 샤오허옌 문화(小河沿文化, 기원전 3000~2000년), 샤자뎬 문화(夏家店文化, 하층 기원전 2300~1600년, 상층 기원전 1000~600년)를 통합해 부르는 명칭이다. 1995년 중국의 고고학자인 궈다순(郭大順)이 랴오허 문명으로 명명했다.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에 만주 일대 랴오시 지역을 중심으로 새롭게 발견된 랴오허 문명의 유적과 유물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발달된 형태를 보여 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동안 아무도 모르고 잊혀진 고대문명이 이 지역에서 찬란하게 꽃을 피웠던 것이다. 중국 학계는 이를 본격적으로 연구해 그들의 상고사를 완전히 재편하고 있다. 한편 2021년 11월 세계적인 과학학술지인 "네이처"에 랴오허 문명에 관한 학술논문이 발표되었다.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의 마르티너 로베이츠 박사가 중심이 되어 독일, 미국, 중국, 러시아와 한국의 언어학, 고고학, 유전생물학자 등 41명이 참여한 논문이었다. 이 논문에서는 3천~4천 년 전 유목민들이 몽골과 만주를 거쳐 한반도로 이주했다는 기존의 유목민 가설을 뒤집고, 당시 신석기시대 랴오허강 일대에서 기장 농사를 짓던 농민들이 한반도로 이주했다는 농경민 가설을 주장했다. 이 논문에서 기원전 4500년경 기장을 농사짓는 랴오허강 사람들이 만주를 거쳐 한반도로 내려왔으며, 기원전 1500년경에는 쌀농사가 전해졌는데, 기장은 사람들이 함께 이동했으나 쌀은 종자만 전래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의 논거는 고대 언어, 유전인자와 농업종자를 근거로 분석하고 있다. 특히 한반도 남해안 4개 섬의 주민들 유전인자를 랴오허강 사람들과 비교해 확인했다는 점이다. 놀랍게도 남해안 4개 섬 중 전남 안도는 100%, 경남 장항도와 연대도는 80% 이상이 랴오허강 사람들과 같았고, 다만 경남 욕지도 한 곳은 85% 이상이 고대 일본인(조몬인)과 같았다.
(註) 훙산 문화는 기원전 4700~2900년경 지금의 랴오닝성(遼寧省) 서부에 위치했던 선사시대의 고고 문화를 가리키는 말이다. 홍산 문화의 큰 특징인 빗살무늬 토기는 한반도 전역에 발견되는 빗살무늬 토기와 거의 같고, 적석총이라는 특이한 매장 방식도 한반도와 동일하다, 또한 옥기는 한반도 강원도 고성군 패총에서 출토된 옥 귀걸이(7천 년 전)와 전남 여수 안도리(6천 년 전) 등에서 발견된 옥 장신구, 귀걸이와 유사하다. 이에 훙산 문화가 고조선 등 한반도 초기 역사와 많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주목받고 있다.
(註) 양사오 문화(기원전 5000~2700년)는 중국 황허강 중류 지역의 대표적인 신석기시대 문화이다. 허난성(河南省) 양사오(仰韶)촌에서 처음 유적이 발견됨에 따라 이름이 붙여졌다. 양사오 문화 유적은 황허강(중류 유역과 위(渭), 분(汾), 낙수(洛水) 등의 황허강 지류 유역 등 이른바 중원(中原) 지역을 중심으로 분포하는데, 동으로는 허난성 동부, 서로는 간쑤성(甘肅省)과 칭하이성(靑海省) 접경지대, 남으로는 후베이성(湖北省) 서북지방, 북으로는 만리장성(萬里長城) 지대까지 이른다.
(註 과거에는 세계 4대 문명으로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 황허 문명을 꼽았으나 근래에 이들 문명보다 시기가 앞선 랴오허 문명이 발굴됨으로써, 인류 문명사가 랴오허 문명을 포함하는 것으로 재편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유적(유지), 문화, 문명에 대한 구분은 특정 지역에 유물이 발견되는 곳의 최소 행정단위를 붙여 유적(유지)이라고 하며(예: 암사동 유적, 우하량 유지 등), 같은 시기의 유물이 여러 곳에서 발굴되면
최초 발견지의 명칭을 붙여 문화라고 한다(예: 훙산 문화, 양사오 문화 등). 문명은 신석기문화 + 청동기 문화 + 국가 단계(법률, 문자)에 이르면 이를 관통하는 강의 이름을 붙여 명칭 한다.
이후 기후가 다시 온화해지면서 한반도 사회는 3500년 전경부터 살아나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에 북쪽의 랴오동반도를 통해 한반도에 벼 농경문화가 새롭게 전파됐다. 양호해진 기후의 도움으로 벼 농경이 주된 생계 방식 중 하나로 자리 잡자 정주 인구가 빠르게 늘기 시작했다. 홀로세 중 후기 한반도로 들어오는 신문화는 보통 랴오허강 유역에서 출발해 랴오동반도를 거쳐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랴오허강 유역에서도 최적기 이후 주기적으로 나타난 엘니뇨의 영향으로 한반도와 비슷한 시기에 사회 변동을 겪었다. 최적기가 끝난 4800년 전에는 훙산 문화가 쇠락하고 대신 샤오허옌 문화(小河沿文化, 註)가 성장했고, 4200년 전에는 가뭄의 충격으로 샤오허옌 문화의 세력이 크게 위축되는 모습이 나타났다. 4000년 전에는 근근이 이어지던 샤오허옌 문화가 결국 쇠퇴하고 샤자뎬 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 註)가 랴오허강 유역을 차지했다. 이 샤자뎬 하층문화 집단은 농경 기반의 사회였는데 일부 구성원이 기후 악화를 피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연쇄적인 이주의 물결을 일으켰고 그 과정에서 한반도에 벼 농경이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기후 최적기 이후 한반도는 꾸준히 추워지고 건조해지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3500~3400년 전 들어 기후가 조금씩 양호해지더니 3400년 전에는 강수량이 급증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동시에 인구수도 가파르게 늘었다. 인구의 빠른 증가 속도를 감안할 때 이즈음에 밭벼 재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이후 3200년 전쯤 400~600년 주기의 장주기 엘니뇨에 의해 동아시아 전역에 추위와 가뭄이 몰려들었다. 이 추위로 당시 랴오허강 유역을 주도하던 샤자덴 하층문화가 무너졌고, 기후 난민이 랴오허강을 건너 남동쪽의 랴오둥으로 이동하자 이곳에서 잡곡 농사를 기반으로 살아가던 소규모 사회들은 대혼란에 빠지게 된다. 마치 도미노와 같은 이주의 물결이 남쪽을 향해 연쇄적으로 퍼져나갔다. 랴오둥의 농경민은 북쪽에서 내려온 외부인과의 갈등과 기후 위기에 따른 사회 내부의 혼란을 피해 한반도 남부로 이동해 최초의 수도작 문화인 송국리형 문화를 발전시켰다. 다른 한랭화 시기와 달리 3200년 전에는 기후가 나빠졌음에도 한반도 남부에서 인구가 줄어드는 움직임을 볼 수 없다. 외부 세력이 대거 진입한 후 수도작 농경을 기반으로 빠르게 규모를 키웠기 때문이다. 한반도 남부의 인구는 2800년 전 정점에 이르렀다. 이후에도 기후 변화의 주기에 따라 난민이 들어오고 신문화가 전파되는 과정이 반복됐다. 3200년 전의 가뭄이 끝난 후 한반도의 기후는 2800년 전까지 온난 습윤함을 유지했다. 이 덕에 한반도 사회는 안정을 되찾았고 사람들의 이동은 잦아들었다. 3000년 전경부터 시작된 한반도의 송국리형 문화는 2800년 전 절정을 맞았다. 그러나 좋았던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2800~2700년 전 철기 저온기의 시작과 함께 기후는 다시 한랭해졌고 송국리형 문화인은 원래 터전인 금강 중하류 지역을 벗어나 따뜻한 남쪽으로 확산하기 시작했다. 이들 중 일부는 바다 건너 일본 규수까지 진출해 일본의 야요이 문화(弥生文化)를 열었다. 한반도에서는 2300년 전에 재차 닥친 기후 변화의 여파로 인구가 다시 한번 큰 폭으로 감소했고, 송국리형 문화는 종말을 맞았다. 수도작 농경민 집단이 사라지고 남은 공간은 역시 같은 시기의 한랭화를 피해 랴오시와 랴오둥에서 내려온 점토대토기 문화인이 들어와 서서히 채워갔다. 철기 저온기 내내 이어지던 추위가 끝이 나고 기원전 3세기부터 기온과 강수량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후 대략 300년간 온난한 환경이 유지되면서 한반도 사회는 안정을 되찾았다.
(랴오허 문명의 샤오허옌 문화와 샤자덴 하층 문화)
(註) 샤오허옌 문화(기원전 3000~2000년)는 훙산 문화에 이어 혼란기에 나타난 여러 소규모 집단 문화로 훙산 문화의 제사터와 비슷하다. 샤오허옌 문화 사람들 역시 자신의 집 안에 제단을 만들고 훙산 문화의 전통을 이어가며 살았다. 다만 기후가 상당히 추워져 식량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샤오허옌 문화 사람들은 거대한 돌무지를 만드는 대신 작은 마을 단위로 사방에 흩어져 거주했다. 즉 훙산 문화 사람들은 기아, 전염병 등으로 전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문명을 포기하고 새롭게 바뀐 환경에 적응해 위기를 극복한 것이다. 1000년 가까이 이어진 샤오허옌 문화 시기가 지나고 기원전 2300년경에는 이 일대에 화려한 청동기문화인 샤자뎬 문하가 등장한다.
(註) 샤자뎬 하층문화(기원전 2300~1600년)는 랴오허 문명의 중심지인 내몽골(內蒙古) 츠펑시(赤峰市)와 랴오닝성(遼寧省) 짜오양시(朝陽市)를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선양(瀋陽) 일대까지 확대되어 랴오허강 유역까지, 서쪽으로는 베이징(北京)을 지나 숴저우(朔州) 지역까지, 남쪽으로는 보하이만(渤海灣)을 끼고 서남쪽으로 톈진시(天津市)와 허베이성(河北省) 바이딩시(保定市) 지역까지, 북쪽으로는 시라무렌강(西拉木倫河)을 넘어 츠펑시 바린유치(巴林右旗) 지역까지 분포한다.
한반도 최초의 수도작 문화인 송국리형 문화의 기원과 형성은 다음 몇 가지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랴오허강 (유역의 샤자뎬 하층문화는 3200년 전에 나타난 기후 변화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에 랴오허강 집단은 살아남기 위해 이주를 거듭했고 그 여파로 랴오둥과 한반도는 혼란에 빠졌다. 이미 랴오둥반도 끄트머리에는 산둥반도에서 건너온 벼 농경민 집단들이 산재해 있었다. 이들은 원래 양쯔강(揚子江) 하류에서 중국의 동해안을 따라 올라온 벼 농경민이 황허강 하류의 조/기장 농경민과 섞여 형성된 집단의 후손들로 산둥반도에서 거처를 잡고 살아가던 농민들이었다. 산둥반도는 바다 맞은편인 랴오둥반도와 섬들이 징검다리같이 점점이 놓여 있어 서해를 횡단하는 기점으로 안성맞춤인 곳이다. 황허강 유역의 룽산 문화(龍山文化) 말기, 인구 밀도가 크게 높아진 상태에서 기후마저 나빠지자 적당한 농지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다. 이에 일부 사람들이 산둥반도를 버리고 새로운 곳을 찾아 바다를 건너는 모험을 단행해 랴오둥반도 끝에 자리를 잡는 데 성공한다. 산둥반도와 달리 랴오둥반도는 인구가 많지 않아 자기가 원하는 만큼 땅을 차지할 수 있었다. 황허강 유역의 룽산 문화가 쇠퇴한 3900년 전부터 산둥 지역을 차지한 황허강 사람들도 틈틈이 랴오둥 지역으로 넘어오면서 황허강 유역의 선진 농경 기술이 동쪽으로 꾸준히 유입됐다. 그러던 와중 3200년 전 즈음 기온이 점점 내려가고 강수량이 줄어드는 듯하더니 서북쪽에서 많은 사람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추운 곳이긴 하지만 동쪽으로 넓은 평원을 면하고 있어 부러움을 사던 랴오시 지역의 샤자덴 하층문화 사람들이었다. 산둥에서 랴오둥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샤자덴 하층문화의 북방민과 부딪혀 봐야 수에서 밀리니 좋을 것이 없었다. 이들은 애써 갈아놓은 랴오둥의 땅이 아까웠지만 손해가 큰 물리적인 충돌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기로 한다. 산둥에서 지속적으로 황허강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벼 농경에 조예를 갖춘 사람이었던 이들은 어디가 벼 농경에 적당한 곳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다가 금강 중하류, 지금의 부여, 공주, 논산, 익산 등지에 자리를 잡았다. 북방의 농민들은 따뜻한 남쪽 기후에 만족하며 노련한 솜씨로 논을 조성하고 곧 쌀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바로 우리 학계에서 한반도 최초의 벼 농경 집단이라 부르는 송국리형 문화의 주인공으로 추정된다. 이렇듯 북방에서 밀려 내려온 사람들에 의해 수도작 문화가 전달됐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만, 송국리형 문화가 정확히 어떠한 과정을 거쳐 금강 중하류에 나타났는지는 여전히 미궁 속에 있다. 즉 랴오둥 지역에서 벼 농경민이 한반도 남부까지 바로 내려와 금강 유역에 정착한 것일 수 있다. 아니면 중간에 여러 곳을 거치면서 다양한 문화에 영향을 받아 점진적으로 변한 결과 송국리형 문화가 나타난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산둥의 벼 농경민이 랴오둥을 거치지 않고 서해를 건너 한반도 중부 지역으로 직접 건너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송국리형 문화의 시작이 언제였는지도 불분명하다. 대체로 그 시작을 3000년 전으로 잡고 있으나, 먼저 3200년 전에 발생한 다른 문화들(가락동 유형, 역삼도 유형, 흔암리 유형 등)의 변형된 결과가 송국리형 문화일 수도 있다. 우리나라 고고학계에서는 송국리형 문화가 외래 집단의 유입에 의해 나타난 것인지, 아니면 기존에 있던 문화가 자체적으로 변화한 결과인지를 두고 의견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송국리형 문화의 시작 연대를 감안하면 이 유형으로 이어지기 전 한반도에 중간 단계가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송국리형 문화인의 전형적인 주거지, 토기, 묘지 유형이 이전 문화에서는 찾기 힘들다는 점과, 무엇보다도 이들이 수전 농경을 최초로 시작했다는 점은, 선진 농경 기술을 갖춘 외부인이 금강 유역으로 바로 이주해 들어왔음을 시사한다. 어떠한 가설이 맞든 간에 중요한 것은 기후가 열악해졌을 때 다수의 북방 농경민이 온난 습윤한 곳을 찾아 한반도로 이동했다는 점이다.
기원전 194년 위만의 배신으로 왕위에서 밀려난 고조선의 준왕 세력이 남하했고 80여 년 후(기원전 108년)에는 위만조선이 무너지면서 유민들이 한반도로 다수 내려왔지만, 이를 제외하면 대내외적으로 평온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이때 북방에서 유민이 발생한 이유는 기후와 관계있는 것이 아니라 전성기를 누리던 위만조선이 한 제국에게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원 원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기온은 떨어지기 시작했고 이후에는 약 200년 주기로 한랭화 경향이 두드러지는 시기가 반복됐다. 홀로세 후기의 한반도는 400~600년의 장주기 엘니뇨뿐 아니라 200년의 흑점 주기에도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 200년 주기의 기후 변화는 한반도에서 초기 국가 체제가 갖춰지던 첫 밀레니엄의 초중반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대략 1세기, 3세기, 4~5세기 등에 있었던 한랭화가 이주나 전쟁의 배경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기원 전후로 1세기까지 온조 집단과 김수로 집단이 한반도 남부로 이주해 각각 백제와 금관가야를 건국했다. 3세기에는 기온의 하강으로 농업의 생산성이 낮아지자 한반도 해안에 패총이 확산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3세기 후반 한반도는 동아시아 유목 민족의 대대적인 움직임 속에서 선비와의 전쟁에서 패한 부여인 집단의 유입으로 혼란을 겪는다. 그러나 3세기가 끝나갈 무렵부터 시작된 기온 상승은 다시금 사회의 안정을 가져왔다. 기후가 비교적 온난했던 4세기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체제가 갖춰지면서 한반도 내 대치 구도가 완성된다. 삼국 외에 부족 연맹체 성격이 강했던 가야와 마한의 인구 또한 빠르게 늘었다. 특히 백제인(혹은 마한인)은 이때 엄청난 규모의 대형 수리 시설을 축조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대역사는 김제를 중심으로 해당 지역에 인구가 꽤 많았음을 방증한다. 4세기 후반부터 한반도의 기온은 다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5세기 중반 너머까지 추위가 이어졌다.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에 패한 가야의 유민과 427년 장수왕의 평양 천도로 압박을 받은 백제인과 마한인이 일본으로 넘어갔다. 이어 660년 백제가 멸망하면서 발생한 백제의 도래인(渡來人)까지 더해 5세기와 7세기에 다수의 한반도인이 일본으로 이주했다. 이들이 현대 일본인에게 유전적으로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들이다.
한반도 지역은 대부분 산지로 이뤄졌고 동아시아 외곽에 위치해 구석기시대에 수렵채집민 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기온이 떨어질 때면 북쪽에서 많은 사람이 내려오곤 했는데, 가령 2만 5000~1만 8000년 전의 마지막 빙기 최성기나 8200년 전과 같이 강력한 추위가 덮친 시기에는 그러한 이주의 흐름이 뚜렷했다. 반면 기온이 오르자 이들은 익숙한 북방의 초원지대로 다시 돌아갔다. 홀로세에 접어든 후 온난 습윤한 환경이 한동안 이어졌고 이주의 흐름은 잦아들었다. 그러나 4800년 전 기후 최적기가 끝나면서 다시 동북아시아 전역에서 변화의 움직임이 감지되기 시작한다. 이후 발생한 대부분의 이주는 500년 주기의 장주기 엘니뇨와 200년 주기의 태양 활동 변화가 이끌었다. 장주기 엘니뇨가 강하되고 흑점 수가 감소할 때마다 가뭄과 추위가 동북아에 닥쳤고 사람들은 더 나은 땅을 위해 움직였다. 사람들의 이동은 대부분 랴오시 지역에서 시작해 랴오둥을 거쳐 한반도 남부로 그리고 일본으로 넘어가는 경로를 따랐다. 대략 1000년마다 나타나는 온난기에는 외부인의 유입이 적어 사회가 안정적으로 유지됐지만, 그 사이사이에 나타난 한랭기에는 북쪽에서 내려오는 이주민에 의해 한반도는 큰 혼란을 겪었다. 가령 중기 청동기 저온기(3800~3400년 전), 철기 저온기(2800~2300년 전), 중세 저온기(1900~1200년 전)에는 랴오시와 랴오둥에서 많은 사람이 한반도로 내려왔다. 반면 청동기 최적기(3400~2800년 전), 로마 온난기(2300~1900년 전), 중세 온난기(1200~750년 전)에는 온화한 기후의 도움으로 사회는 안정을 찾았다. 저온기가 찾아올 때마다 북방민이 남하해 한반도 남부 사회는 대내외적인 갈등에 휩싸였지만 동시에 이들이 선진 문물을 전해주면서 지역이 발전하는 순기능 또한 누릴 수 있었다. 중기 청동기 저온기에는 벼 농경문화가, 철기 저온기에는 동검 문화와(아마도) 원시 한국어가, 중세 저온기에는 철기 기마 문화가 전파돼 한반도의 부족 사회가 고대 국가 체제를 갖추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결론적으로 약 8200년 전 추위를 피해 아무르강 유역에서 내려온 수렵채집민 집단, 중기 청동기 저온기와 약 3200년 전 산둥, 랴오둥, 랴오시 등에서 이주한 농경민 집단, 철기 저온기에 랴오시와 랴오둥에서 남하한 점토대토기 문화 집단, 중세 저온기에 북방에서 내려온 고조선과 부여의 유민이 혼합해 현대 한국인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여기에 조금 더 덧붙이자면 8200년 전 아무르강 수렵채집민이 내려올 당시 한반도에는 만빙기 때 북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눌러앉은 토착 집단이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또 한반도 남부에는 조몬 수렵채집민도 일부 살고 있었다(현재 한국인에게는 그 흔적을 거의 찾을 수 없지만). 홀로세 기후 최적기에는 랴오시 지역에서 소규모의 기장 농경민이 한반도로 내려왔을 가능성도 있다. 특히 중세 저온기 초반부에 내려온 고조선과 부여의 유민이 현대 한국인에 유전적으로 크게 기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조선의 준왕 세력, 황허강 집단의 유전 인자가 높은 위만조선의 유민, 선비족과 고구려에 밀린 부여 유민이 꾸준히 한반도 남부로 이주하며 기존의 삼한 사람과 섞였다. 물론 이 외에도 여기서 언급되지 않는 수많은 인적 이동이 과거 한반도인의 형성에 관여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중요한 이주는 한랭화가 진행될 때 발생했다고 본다. 그러나 기후 변화와 관계없이 움직인 소규모 무리도 분명 존재했을 것이다. 기온이 떨어지는데 오히려 북쪽으로 이동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기온이 온화한 시기임에도 다른 땅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한편 4세기 초 김제에 축조된 거대한 벽골제는 한반도, 더 나아가 동아시아 농경민이 기후 변화에 굴복해 이주하는 상황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고 강변하는 듯하다.
4세기 후반부터 대규모 이주를 주도한 건 전쟁의 패잔병이나 난민이었다. 이때는 왕권의 강화로 한반도에서 고구려, 신라, 백제가 고대 국가로 발전하는 시기이다. 광개토왕과 장수왕이 압박해 들어온 5세기 초반이나 백제가 멸망한 7세기 중반처럼 정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갈 때면 한반도 남부에서 일본으로 도망치듯 떠난 사람이 많았다. 이들은 기후 변화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철기 저온기에는 기후 변화를 피해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사람이 넘어갔다면, 중세 저온기의 후반부터는 전쟁에서 패한 유민이 일본으로 넘어갔다. 물론 전쟁의 미세한 발발 원인까지 따져 들어가면 그 배경에 기후와 식량 문제가 도사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어떠한 이유든 이주민들은 일본의 고대 문화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지대한 공을 세웠다. 철기 저온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벼 농경을 토대로 야요이 문화(弥生文化)를 창출했고, 중세 저온기에 이주한 사람들은 일본의 고훈(古墳) 시대와 아스카 시대(飛鳥時代)를 열며 야마토 문화(大和文化)를 일궜다. 한편 북반구의 기온이 800년경부터 완연한 상승세로 돌아섰다. 이 시기 동아시아에서는 송나라가 전성기를 누렸다. 온화해진 기후 덕에 농업 생산성이 급증하면서 인구가 빠르게 늘었고 화약, 나침반, 활자 인쇄술 등 위대한 발명이 이어졌다. 송은 군사력이 취약한 탓에 북방 유목민 세력에 항상 시달렸지만 안정적인 내수와 활발한 교역을 통해 많은 부를 쌓기도 했다. 한반도의 고려 또한 송나라와 활발히 교류하면서 선진 문물을 적극 받아들였고 국력을 신장시켰다. 발해를 멸망시키고 전성기를 향하던 이웃 나라 거란은 송나라와 가까이 지내는 고려를 못마땅해하며 견제 헸지만, 고려는 대놓고 친송(親宋)과 북진을 표방할 정도로 강력함을 풍기는 국가였다. 그러나 이후 전개된 무신정권의 미숙한 국정 운영과 13세기 몽골군의 침입으로 고려는 급격한 쇠퇴기로 접어들게 된다. 결국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들어섰지만, 조선은 개국 초기의 안정은 사라지고 유학을 숭상한 사대부의 나라로 전락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미증유의 참상을 겪는다.
단일민족의 허상과 다양성의 힘
살펴본 바와 같이 오늘날의 한국인은 양쯔강, 황허강, 랴오허강, 아무르강 등의 4개 유역에서 기원한 사람들이 이동하고 섞인 결과로 형성됐다. 이는 한국인의 유전자 분석 결과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따라서 일부가 주장하는 한국인이 단일민족이라는 개념은 구시대적인 사고일 뿐 아니라 그 실체를 찾을 수도 없는 허상에 불과하다. 오히려 여러 지역에서 기원한 다종, 다수 사람의 결합으로 형성된 한국인은 유전 형질 측면에서 매우 긍정적인 결과를 얻었다. 이와 같은 한국인의 우수한 유전 형질로 인해 한국은 지난 수십 년간 유례가 없을 정도의 경제 발전을 이뤄 거의 선진국 수준에 도달했다. 아울러 K팝, K무비, K드라마, K문학 등을 망라하는 K-Culture의 열정과 독창성은 전 세계인을 매료시키고 있다. 앞으로도 우리나라가 지속적인 발전을 하기 위해서는 근거 없는 폐쇄적인 단일민족이라는 허상은 버리고, 창의적인 다문화 정책과 유연한 외교 정책을 수립해서 다인종, 다문화, 다자외교 등의 다양성이 가져다 주는 힘을 구축하는데 심혈을 기울어야 할 것이다.
※ 이 글은 "한국인의 기원"(박정재, 2024년)과 "네이처"(마르티너 로베이츠 연구 논문, 2021년) 등을 참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