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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와 일본어의 뿌리를 찾아서

by 박사력

서두

글쓴이는 학창 시절에 한국어가 '우랄 알타이어계'에 속한다고 배웠다. 그러나 우리나라 정부 수립 후 여러 번의 교과서 개정으로 현재는 '언어학상으로는 알타이어족과 가까운 관계에 있다고 본다'라며 다소 모호하게 기술(註)돼 있다. 이에 글쓴이는 우리 한국어의 뿌리와 형성 과정에 대해 자세히 탐색하고, 언어의 계통적 분류에서 한국어와 유사한 일본어의 근원도 찾아보고자 한다. 참조한 자료는 ‘KBS 특별기획 다큐 3부작(위대한 여정, 한국어)’, 마르티너 로베이츠의 연구 논문("네이처"誌), '존 휘트먼 & 알렉산더 보빈의 연구 논문', "한국인의 기원"(박정재) 등이다.


(註)

1. 1948년 문교부 교과서 중: 아시아 북방 계통은 우랄 알타이를 중심으로 아시아 동북부와 서남부 그리고 유럽 북부까지 분포하여 있는 까닭에 우랄 알타이계 민족이라고 한다. 우리 조선 민족은 아시아 북방 계통에 속하는 퉁구스족의 한 부분으로서, 역사가 있기 전에 서북으로부터 만주와 조선 반도에 들어와 이 강산을 개척한 것이다.

2. 3차 교육과정(1973~1981)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중: 동이족 중에 무늬 없는 토기 문화의 기반 위에서 청동기 문화를 성립시킨 한(韓)족은 언어학상으로는 알타이 어계에 속하는 퉁구스족의 한 갈래라 한다. 이들이 농경문화의 경제력을 기반으로 하여 크게 발전하면서 우리 민족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3. 6차 교육과정(1992~1997)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중: 언어학상으로는 알타이 어계에 속하는 우리 민족은, 오래전부터 하나의 민족 단위를 형성하고, 농경 생활을 바탕으로 하여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하였다.

4. 7차 교육과정(1997~2007)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중: 우리 민족은 인종상으로는 황인종에 속하고 언어학상으로는 알타이어족과 가까운 관계에 있다고 본다. 우리 민족은 오래전부터 하나의 민족 단위를 형성하고, 농경 생활을 바탕으로 독작적인 문화를 이룩하였다. 알타이어족: 튀르크어파, 몽골어파, 만주 퉁구스어파를 포함하는 어족이다.


1. KBS 특별기획 다큐 3부작(위대한 여정, 한국어)

2004년 10월 한글날 특집으로 방영된 KBS 특별기획 다큐 3부작(위대한 여정, 한국어)은 한국어와 일본어의 관계와 우리말의 기원을 탐색하는 여정을 자세히 다뤘다.


제1부 ‘말의 탄생-산과 바다를 너머’

한국 알타이어 학회 회원들과 함께 몽골과 시베리아 오지에서 한국어의 기원을 찾아보고, 한국어를 최초로 알타이어족에 포함시킨 핀란드 언어학자 람스테트(註)의 한국어 자료들을 최초로 공개한다. 아울러 국내에 거주하는 유라시아 대륙의 25개 나라 사람들이 모여서 비슷한 언어들끼리 모여 알타이어족을 조사하고, 한국어가 남방에서 한반도로 이주했을 가능성을 추적했다. 특히 고종에게 각별한 신임을 받던 선교사 헐버트(註)는 1905년에 저술한 "한국어와 드라비다어의 비교 연구"에서 두 언어의 유사성에 대해 자세히 기술했다. 그는 이 책에서 “두 말이 유사한 것은 한반도에 정착한 선주민이 최소 일부 지역이라도 남방에서부터 들어왔음을 입증해 주는 증거”라고 말했다. 또한 단국대 생물학과 김욱 교수는 혈연관계가 없는 한국인 표본 185명을 대상으로 ‘미토콘드리아 DNA’ 변이를 분석하고, 동아시아 10여 개국 1,200명의 유전자 표본을 추출해서 비교 분석(註)했다. 그 결과 한국인은 40%가 동남아시아의 유전자형이 포함돼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한반도에 쌀농사 남방계 유전형이 이주한 것을 시사한다. 김교수는 아시아 남방에서 기원한 쌀농사가 한반도에 유입돼 확산된 시기를 대략 3000~4000년 전쯤으로 보고 있다. 이때 쌀농사와 함께 그들의 언어를 가져왔다고 말한다. 한편 서울대 의대 이홍규 교수는 미토콘드리아 유전형질을 분석한 결과 한국인의 70%가 아시아 북방계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결론적으로 이 다큐에서는 2만 전 시베리아 혹한기를 피해 한반도에 뿌리를 내린 북방 사람들과 3000~4000년 전 쌀농사를 가지고 온 남방 사람들이 어우러져 형성된 말이 한국어라고 말한다.


(註) 구스타브 욘 람스테트(스웨덴어: Gustaf John Ramstedt, 1873~1950년)는 핀란드의 외교관이자 언어학자이다. 알타이족에 대한 비교 연구 및 저서로 잘 알려져 있으며, 특히 알타이어족 가설에 한국어를 포함시켜 하나의 어족으로 보는 주장으로 유명하다. 람스테트는 한국어, 일본어, 몽골어, 퉁구스어, 튀르크어를 포함하는 알타이계 언어학의 창시자다. 1898년부터 1912년까지 4회에 걸쳐 몽골을 중심으로 아시아 지역에 대한 조사를 해서 구어(口語) 자료를 모아 몽골어 등에 관한 저술 활동을 했다. 이후 1917년 헬싱키대학 교수와 1919년 초대 주일대사로 부임해 10년간 근무했다. 10년의 체일 기간 중 일본어, 한국어를 배우고 두 언어와 알타이제어(諸語)를 비교 연구했다. 주요 저서로 “몽골 문어(文語)와 우르가 방언의 비교음운론”(1902), “칼미크어(語) 사전”(1935),“한국어 어원의 연구”(1949), “알타이언어학 서설(序說)”(1952∼1965) 등이 있다.

(註) 호머 베절릴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는 미국의 감리교회 선교사, 역사학자,

7개 국어를 구사한 언어학자, 조선에서 영어를 가르쳤던 교육자, 독립신문 발행을 도운 언론인, 한국어 연구와 보급에 앞장선 한글학자(한국어에 능통했고, 한글의 우수성과 과학성에 매료돼 미국 언론과 잡지에 기고와 논문을 통해 한글과 한국문화를 홍보했고, 최초로 한글 띄어쓰기를 도입한 장본인)였다. 또한 고종을 도와 대한제국 말기 국권수호를 적극 도왔으며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한 독립운동가였다.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건국공로훈장 태극장(독립장)이 추서 됐다. 또한 2014년 한글날에는 금관문화훈장이 추서 됐다. 주요 저서로 "사민필지"(士民必知,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교과서), "줌나의 기적", "대동기년", "한국어와 드라비다어의 비교 연구" "한국사 드라마가 되다", "대한제국멸망사", "미라신부" 등이 있다.

(註) 단국대 생물학과 김욱 교수는 혈연관계가 없는 한국인 1백85명을 대상으로 “미토콘드리아 DNA 변이와 한국인의 기원 및 집단 형성"에 대한 연구를 한 결과 한국인은 동아시아 남방과 북방 민족의 유전자가 혼재된 것으로 나타났다고 2004. 5. 11. 밝혔다. 특히 한국인은 그동안 유사 민족으로 알려져 온 몽골인보다는 중국 동북부 및 일본인에 더 가까운 유전적 특성을 보였다고 덧붙였다. 김욱 교수는 이번 연구에서 각 조사 대상자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구성하고 있는 염기쌍 1만 6천 개 가운데 인류학적 계통분류에 주로 이용되는 3천 개의 염기서열을 분석한 뒤 중국, 몽골, 일본, 동남아시아인 등과 `하플로그룹"(Haplogroup, 같은 미토콘드리아 유전자형을 가진 그룹)의 빈도 및 종류를 비교 분석했다.


제2부 ‘말은 민족을 낳고’

일본어에서 한국어의 흔적을 찾는다. 2300여 년 전 일본 열도를 습격한 뒤 조몬인을 몰아내고 일본의 주인이 된 야요이인(註), 그들은 쌀농사와 청동기 문화(註)로 무장한 한반도인으로 한반도어를 사용했다. 이들의 일본 열도 진출을 다룬 ‘야요이인의 열도 대 습격 사건(註)’과 한반도와 일본 열도 관계, 삼국시대와 신라의 삼국통일 등 고대사의 극적인 사건을 통해 한국어와 일본어의 상관관계를 추적한다. 또한 일본의 저명한 언어학자 시미즈 키요시(淸水紀佳, 구마모토대 언어학과)와 교포 언어학자 박영미(규슈산업대 한국어과)가 한국, 일본어의 연관성 연구를 조명한다. 이들의 연구는 근래 한국어의 비교언어학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들이 연구한 것은 한국, 일본어가 비슷하다는 단순한 어휘 비교가 아니라,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언어가 어떻게 음운변천 과정을 거치게 됐는지를 체계적으로 밝혔다는 데 의의가 있다. 무려 5,000자에 걸친 생활언어의 어근을 비교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쓰이던 한국어가 일본 열도로 건너가 일본어로 정착헀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연구를 주도한 시미즈 키요시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한국의 고유어와 일본의 고유어는 어근으로 볼 때 똑같은 게 아닐까 하는 가설을 토대로, 같은 어근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일단 500개 정도가 같다는 것을 발견했고, 1년 정도 지난 후에 5,000개 정도의 같은 어근을 찾아냈습니다. 5,000개의 공통어근을 찾아낸 결과, 그 공통어근이 매일의 일상에 없어서는 안 되는, 이른바 기초어휘의 범주라는 점을 생각하면, 언어학적으로 두 언어는 같은 언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일본인의 기원을 추적하는 마크 허드슨 박사(훗카이도대 북방 문화과)는 일본어의 원형은 고대 한반도에서 건너온 농경인의 언어라고 확신한다. 또한 허드슨 박사는 농사가 퍼져나간 길이 바로 언어의 길이라고 말한다. 그는 “일본어의 기원은 기본적으로 야요이 시대(註)의 기원과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언어라 할 수 있는 신 일본어는 야요이인이 가져온 문화와 함께 한반도에서 도착한 것입니다. 일본어는 바로 그 시기에 한반도에서 도착한 농경 집단에서 유래돼 북부, 남부, 오키나와의 순서로 확산됐다고 봅니다" 인류 역사의 변화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농경문화의 확대였다. 농경의 중심지가 새로운 지역으로 확대되면서 기존에 있던 원시적인 수렵채집 단계의 사람들을 대체해 갔다. 일본에서도 이와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그는 생각한다. 농경인들은 안정된 농사로 인구가 늘자, 새로운 경작지를 찾아 떠나는 사람들이 생겼고, 자신들의 농사 기술과 언어를 가지고 이동했다. 한반도 농경인들도 그렇게 일본으로 건너가 자신들의 언어를 뿌리내렸다는 주장이다. 이와 같은 인식은 야요이인은 조몬인과는 전혀 다른 이주민이었다는 일본의 인류학자 나카하시 다카히로 교수의 주장과도 일치한다. 고대 인골 연구로 명성이 높은 규슈대학에는 5천구에 달하는 고대 인골이 보관돼 있는데, 이들의 유전자가 한국인의 유전자와 거의 같다고 한다.


(註) 야요인은(弥生人)은 야요이 시대에 일본 열도에 살았던 사람들이다. 한반도 등 대륙에서 유래한 여러 집단이 야요이인이 됐고, 그들이 야요이시대를 열었다고 한다. 조몬인(縄文人)의 골격은 시기별이나 지역별로 큰 차이 없이 일정한 얼굴형과 체형을 보이는 반면, 야요이인의 골격은 비교적 다양하고, 지역, 시기적으로 차이가 두드러진다. 야요이인에는 조몬인과 유사한 특징을 가진 사람들(조몬계 야요이인), 한반도와 중국 지린성(吉林省) 근처 대륙 쪽에 있던 사람들과 신체적 특징이 비슷한 사람들(도래계 야요이인), 조몬계와 도래계가 혼합된 듯한 사람들(혼혈계 야요이인) 등이 있었던 것으로 구별된다.

(註) 일본의 논농사는 2700년~2800 전 한반도에서 이주한 야요이인이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2500년 전의 수도작 벼농사 유적(나바타케 논 유적)이 있는 곳은 규슈(九州) 사가현(佐賀縣) 가라쓰시(唐津市)이다. 가라쓰는 부산까지의 거리가 약 180km로 일본에서 한국과 가장 가까운 도시다. 가라쓰의 ‘가라’는 일본말로 ‘외국’이란 뜻으로 본래는 한국을 의미한다는 게 일본 학계의 정설이다. 현재 가라쓰를 표기하는 한자 당진(唐津)은 옛날에는 한진(韓津)이라고 쓰고 가라쓰라고 불렀는데, 이후 당나라와의 교역이 늘어나면서 ‘韓’ 자만 ‘唐’으로 바뀌었다고 일본 고서들은 기록하고 있다. 눈에 띄는 것은 이곳 유적 발굴 과정에 다양한 석기와 함께 세형단검, 청동거울 등 청동기 문화 유적도 나온 것이다. 또한 후쿠오카의이타즈케 유적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2400~2500년 전의 벼농사 취락이 모여있는 곳이다. 이 유적에는 취락, 저장 창고, 논을 가진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해발 11~12m의 낮은 토지에 취락을 건설하고, 충적지를 논으로 사용했으며 취락지 둘레에는 깊고 넓은 해자를 두르고 있다.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벼농사와 취락 형성은 점차 일본 열도 전체로 확산됐다. 야요이인에 의한 일본의 벼농사와 청동기 문화의 도입은 수렵과 채집에 의존하던 조몬인들을 농경문화에 기반을 둔 야요이 시대(弥生時代)로 이끌었다.

(註) 기존 일본 열도에 거주하던 조몬인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종이 갑자기 출현해 일본 열도를 점령해 나갔다. 야요이인들을 추적하면서 새로운 비밀이 드러났다. 그들의 출발지는 한반도, 그들의 문화는 한반도의 쌀농사와 청동기였다, 그리고 그들의 언어는 한반도어. 훗날 고구려어가 되는 원형의 언어를 가진 채 일본으로 건너간 야요이인과 그들의 언어, 그것은 현대 일본어 최대의 미스터리(일본어 안에는 왜 고구려어가 남아 있는가?)한 언어학적 난제를 설명해 주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註) 일본의 신석기시대를 조몬시대라고 하는데, 다음에 이어진 시대가 야요이 시대(기원전 7세기~기원후 3세기 중반, 청동기, 철기시대)다. 일본에서는 야요이인이 오늘날 일본들의 직접적인 선조이며, 본격적인 고대국가를 형성한 사람들로 공인돼 있다.


한편 고구려어와 일본어의 유사성에 대해, 고려대 국문학과 정광 교수의 말도 들어 보자. "주목할 것은 현재까지 발견된 고구려의 수사(數詞) 네 개를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찾아냈습니다. 고구려어로 알려진 이 네 개의 수사가 일본어와 일치합니다. 민족의 언어의 계통을 찾는데 가장 중요한 증거가 수사의 일치인데, 고구려와 일본의 수사가 일치한다고 하는 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겁니다." 대륙 언어라 명명된 고대 한국어란 삼국시대 이전, 북방에 있었던 부여와 고구려어를 말한다. 삼국어의 뿌리도 여기에 있으며, 고구려 백제 신라의 언어 차이는 서로 다른 나라로 지낸 700년 동안의 기나긴 시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정리하면, 오랜 옛날 한반도에 한 줄기의 언어가 있었는데, 그 갈래에서 나온 말들이 오랜 세월 동안 조화를 이뤄 지금의 한국어를 이룬 반면에 일본어는 따로 떨어져 저 혼자의 길을 걸어 지금의 일본어가 됐다는 얘기다. 따라서 일본어의 뿌리는 한국어이며, 고대 한국말을 모태로 해서 오늘날의 일본어가 태어났다고 요약된다.


제3부 ‘말의 길-한국어의 선택’

언어의 생성과 소멸, 발전을 거듭하는 과정을 추적한다. 특히 남북한의 언어가 서로 다르게 발전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 깊이 우려하고, 외래어에 오염돼 있는 우리말의 현실에 대해서도 지적(註)한다.


(註) 1970~90년까지 북한 장편 소설을 조사한 결과, 남북한이 다른 뜻으로 쓰고 있는 단어가 2,500여 개다. 또한 남북한의 언어 소통을 막고 있는 가장 심각한 것이 외래어다. 우리말에 들어와 있는 외래어로 인해 현재 북한 사람들이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외래어 단어가 8,000여 개에 이른다.


2. 마르티너 로베이츠의 연구 논문

이 연구 논문은 2021년 11월 “네이처”誌에 독일 막스플랑크 인류사과학연구소 마르티너 로베이츠(벨기에 출신 언어학자, 알타이어족 역사 연구) 박사의 주도로 발표했다. 이 논문에는 한국을 포함한 10개국의 35개 연구기관에서 언어학, 고고학, 유전학 전공자로 구성된 41명의 연구진이 참여했다. 이 논문의 요지는 한국어를 포함한 일본어, 몽골어, 퉁구스어, 튀르크어를 트랜스유라시아어족으로 분류하며 모두 농경의 확산과 연결된다고 한다. 지금까지는 트랜스유라시아어가 4000년 전 중앙아시아 동쪽 스텝 지대 유목민에서 기원하며, 이들이 동서로 이동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넓은 범위에 걸쳐 언어를 퍼뜨렸을 것이라는 이른바 ‘유목민 가설’이 전통적으로 인정됐다. 반면 이 논문은 핵심을 언어의 확산과 농업의 전파 그리고 인구 이동 간의 상관관계로 보고, 언어학⋅고고학⋅유전학 세 학문의 교차 연구인 삼각측량법(triangulation)으로 ‘농경민 가설’을 제시했다. 삼각측량법이란 어떤 한 점의 좌표와 거리를 삼각형의 성질을 이용한 삼각함수를 통해서 알아내는 방법으로, 언어학⋅고고학⋅유전학의 교차연구를 통해 트랜스유라시아 언어들의 확산 이유와 경로, 그리고 트랜스유라시아 문화벨트와 그 시원 등을 밝히고 있음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이 논문에서 제시한 트랜스유라시아어족의 대표적인 특징은 ① 주어-목적어-서술어의 어순 ② 접속사나 관계대명사가 없는 점 모음조화 ④ 두음법칙 ⑤ 문법적 성별 구분이 없는 점 등이다. 이 연구 논문에 사용된 주요 논거들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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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과 목축에 대한 트랜스유라시아어의 기본 어휘들[언어학]과 동북아시아의 신석기에서 청동기에 이르는 255개 유적의 고고학적 데이터[고고학]와 한국과 류큐 열도, 일본 초기 곡식 경작자들의 고대 유전자들을 수집하고, 이전 발표된 동아시아 게놈들[유전학]을 보완해서 이러한 세 분야의 학문적 연구 결과에서 얻은 광범위한 데이터를 토대로 교차 검증⋅분석한 결과, 트랜스유라시아어족의 뿌리는 초기 신석기시대인 약 9000년 전 랴오허강(遼河) 유역에서 기장 농사를 짓던 경작자들의 언어였음을 밝혀냈다. 기장 경작 초기인 9000∼7000년 전 인구가 늘어나면서 인구의 분산을 유발했고 이들의 이동과 함께 농경의 전파와 언어의 확산이 일어났으나, 청동기시대 이후의 광범위한 문화교류로 인해 이러한 사실들이 가려져 왔다는 것이다. 이 논문은 트랜스유라시아어의 초기 확산이 이제까지 믿어 왔던 ‘유목민 가설’, 즉 유목민들의 이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농경의 확산'에 의한 것임을 주장하고 있다. 동시에 고대 DNA 배열에 관한 최근의 연구 성과는 유라시아를 가로지르는 인구이동과 언어와 문화 전파 사이의 연관성을 새로 생각할 수밖에 없게 하지만, 서유라시아에 비해 동유라시아, 특히 내몽골(内蒙古), 황허강(黃河), 랴오허강(遼河), 아무르강 유역, 러시아 극동지역,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아우르는 광대한 지역인 동북아에 관한 연구와 이해가 아직 많이 부족하고 학제 간의 연구 접근이 거의 없음도 지적했다. 이번 연구를 주도한 로베이츠 박사는 “오늘날의 국경을 넘어서는 언어와 문화의 기원을 받아들이면 정체성을 재정립할 수 있다.”라고 했다. 특히 이 논문은 트랜스유라시아어족과 신석기∼청동기 문화벨트, 그리고 고대 유전자에 대한 데이터 분석을 통해 중원과의 연관성을 끊어냄으로써 중국 동북공정의 기반을 통째로 흔들고 있는 것이다. ① 언어학에서는 트랜스유라시아어가 그보다 천여 년쯤 뒤늦게 황허강에서 발생한 중국어 뿌리인 지나-티베트어족(Sino-Tibetan)과는 전혀 상관이 없음을 밝히고 있다. ② 고고학적으로 랴오허강 유역의 문명을 신석기시대에는 한국의 빗살무늬토기 문명과, 청동기시대에는 한국의 무문토기 문명과 엮고 있지만 그 문화벨트에 중원은 연결돼 있지 않다. ③ 유전학적으로도 트랜스유라시아 언어 사용자 모두에게 아무르계 혈통이 공통된 시원의 유전적 요소로 보면서, 원 트랜스유라시아어와 유전자에 황허강의 영향이 없음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이에 더해 로베이츠 박사는 랴오허강 유역의 트랜스유라시아어족의 조상과 황허강 유역의 지나-티베트어족의 조상은 같은 시기에 서로 다른 종의 기장(황허강: 조, 랴오허강: 기장)을 재배했으며, 이로 인해 서로 다른 언어 확산 경로를 밟아가게 됐다고 언급함으로써, 중국 문명의 기원인 황허 문명(黃河文明)은 랴오허 문명(遼河文明)과는 언어와 문화가 완전히 다른 이질적이고 독자적인 문명권이었음을 확인해주고 있다. 이 논문에서 트랜스유라시아어족의 시원(始原)으로 삼고 있는 9000년 전의 랴오허강 유역은 중국이 자기네 시원 문명으로 삼는 랴오허 문명의 시발점인 신석기시대 가장 오래된 샤오허시 문화(小河西文化, 기원전 7000∼6500)에 해당한다. 그런데 랴오허 문명과 중국의 황제족(중화민족의 시조로 전해지는 전설적 집단)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 중원의 황허 문명과 랴오허강 유역의 랴오허 문명이 섞이는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1. 언어학

트랜스유라시아어족은 일명 ‘알타이어족’으로도 불리며 서쪽 튀르키예(터키)부터 몽골을 거쳐 동쪽 한국과 일본, 캄차카반도에 이르는 드넓은 지역에 걸쳐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는 대규모 언어그룹을 말하며 서쪽의 튀르크어, 중앙아시아의 몽골어와 시베리아의 퉁구스어, 동아시아의 한국어, 일본어로 구성된다. 이 다섯 그룹이 하나의 공통 조상에서 유래했는지, 그 시원과 확산에 관한 문제는 오랜 논쟁의 주제였다. 결론적으로 한국어는 튀르크어, 몽골어, 퉁구스어, 일본어와 함께 9000년 전 신석기 초기에 중국 동북부 랴오허강유역에서 비롯된 것으로 밝혀졌다. 연구진은 이 지역 98개 트랜스유라시아 언어에서 사투리를 포함해 다양한 시대 254개의 기본 개념을 나타내는 3,193개 어휘 데이터를 수집해 트랜스유라시아 언어들의 계통 발생을 추론했는데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었다. ① 트랜스유라시아어족의 기원은 9000년 전 랴오허강 유역의 기장 경작자들의 언어이다. ② 신석기시대에 '원시 한국어-일본어'(5500년 전)와 '원시 몽골어-퉁구스어'(5000년 전)로 1차 분화됐고, ③ 청동기 시대에는 원시 한국어, 원시 일본어, 원시 몽골어, 원시 퉁구스어, 원시 튀르크어(돌궐어)로 2차 분화됐으며, ④ 이후에 각 지역으로 다양하게 분화돼 현재 트랜스유라시아어로 분류된 언어는 98개에 이른다.즉 트랜스유라시아어는 신석기시대 랴오허강 유역에서 비롯되어, 9000∼7000년 전 신석기 초기에 처음으로 인구 분산이 일어나며 어족이 갈라진 이후, 신석기 후기와 청동기에는 더욱 확산되며 원시 몽골어는 북쪽 몽골고원으로, 원시 튀르크어는 동부 스텝을 넘어 서쪽으로, 다른 가지들은 동쪽으로 갔는데 원시 퉁구스어는 아무르 유역(아무르-오소리-칸카호)으로 갔고, 원시 한국어는 한반도로, 원시 일본어는 한국을 지나 일본 열도로 갔다. 신석기시대에 갈라져 나온 언어들에는 다음 표와 같은 핵심어들이 공통으로 전승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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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대조적으로 청동기 시대에 갈라져 나온 튀르크어, 몽골어, 퉁구스어, 한국어, 일본어 같은 각각의 부차적인 어족은 거기에 새로운 생활용어들, 즉 쌀⋅밀⋅보리 경작에 관련된 말, 소⋅양⋅말과 같은 가축과 관련된 말, 농경⋅주방도구, 비단과 같은 직조에 관련된 말이 추가됐다. 이러한 말들은 청동기시대 다양한 트랜스유라시아 언어와 비트랜스유라시아 언어 사용자들이 서로 교류해 생긴 결과로 차용된 말이다. 그래서 3300년∼2800년 전 랴오둥, 산둥 지역 주민이 한반도로 이주해 와 쌀과 보리, 밀에 관한 어휘가 추가됐고, 이 쌀농사가 3천 년 전 일본 규슈로 전파돼 이를 계기로 조몬시대에서 야요이시대로 넘어가면서 일본어로의 언어 전이가 이뤄졌다. 요약하면 트랜스유라시아어족의 발생 시기, 발생 지역, 첫 농경 어휘들, 그리고 접촉 모습은 트랜스유라시아 언어의 시작과 확산이 ‘유목민’에 의한 것이 아니라 ‘농경인’에 의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2. 고고학

문헌 자료에 의하면 중국 북부와 연해주, 한국과 일본의 신석기와 청동기 유적 255곳이 172개의 고고학적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탄소연대 측정된 269개 곡물 유물 목록을 갖고 있다.〔랴오허 문명, 싱룽와 문화, 싱룽구 유적에서 발견된 8000년 전의 '세계 최초 재배종 기장과 조'는 UN식량농업구(FAO)에서 ‘세계 중요 농업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문화적 유사성에 따라 255개 유적지를 분석한 결과, 랴오허강 유역의 신석기 문명 클러스터의 기장 농경에서 한국의 빗살무늬토기 문명과 아무르연해주랴오둥의 신석기 문명 두 갈래가 갈라져 나왔음을 알아냈다. 이 발견은 기장 농사가 지금으로부터 5500년 전 한국으로, 5000년 전에는 아무르를 거쳐 연해주로 전해졌다는 것을 확인해 주며, 더 나아가 청동기시대 랴오허강 유적과 한국의 무문토기 유적⋅일본의 야요이 유적을 엮어주고 있다. 또한 4000년 전에는 랴오둥-산둥 지역의 농업에 쌀과 밀이 보완돼, 초기 청동기시대(3300∼2800년 전)에 한반도로 전해졌고 이것이 다시 3000년 전에 일본으로 전해졌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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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라시아에서는 길들인 가축과 낙농이 신석기 문화의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한 반면, 이 연구 자료에 따르면 청동기 이전 동북아에서는 개와 돼지를 제외한 다른 동물을 가축화한 증거는 거의 없다. 그리고 농경과 인구이동과의 링크는 한국과 서부 일본의 토기, 석기, 거주지와 무덤의 유사성을 보면 특히 명확하다.

이 연구는 연구 대상지역 전체에서 기장농사가 도입됨으로써 일어나는 인구 변화에 대해서도 살펴서 덧붙였다. 벼농사는 집약적인 노동이 필요하기 때문에 늘어난 인구를 흡수하고 한 곳에 정착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기장은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지만 단위면적당 수확량은 적어 훨씬 더 넓은 정착형태를 채택했다. 신석기시대 인구 밀집도는 동북아 전체에서 높아져 가다가 신석기 후기 인구가 한 차례 격감을 겪은 후 청동기시대에 이르자 중국, 한국, 일본에서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3. 유전학

연구진은 아무르, 한국, 규슈와 류큐 열도에서 가져온 고대인 19명의 게놈에 9500∼300년 전 동쪽 스텝지대, 랴오허강, 아무르강, 황허강, 랴오둥, 산둥, 연해주와 일본에서 발표된 게놈을 합하고, 그것들을 현대 유라시아 주민 149명과 동아시아 주민 45명의 게놈에 투사했다. 그러한 연구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알게 됐다. 고대 주요 주민들이 5개 유전적 요소가 복합돼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① 자라이누얼(Jalainur)은 아무르 유전자를, ② 양사오는 황허강 유전자를, ③ 로쿠츠는 조몬 유전자를 대표하는 반면, ④ 랴오허강의 훙산과, ⑤ 샤자뎬 상층은 아무르강 유전자와 황허강 유전자로 이뤄져 있다.(그림 3b) 신석기시대 랴오허강의 기장 경작자들은 아무르계 혈통의 비율이 꽤 높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황허강 게놈으로 점차 옮겨감을 보여준다. 신석기 초기의 랴오허강의 게놈이 부족하긴 하지만 아무르계 혈통은 구석기 후기의 바이칼, 아무르, 연해주, 동남부 스텝과 랴오허강의 수렵채취인들의 오리지널 한 토종 게놈 형질을 대표하고, 이후 이 지역 초기 농부들에게도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몽골의 신석기인들은 아무르계 혈통의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고, 중요한 점은 몽골과 아무르의 고대 게놈에서 황허강의 영향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르 혈통은 한국과 일본을 비롯, 트랜스유라시아 언어를 사용하는 모두에게 ‘공통된 시원의 유전적 요소’로 보인다. 한반도의 남쪽 끝에 있는 4개의 섬 -안도, 연대도, 가덕도(장항), 욕지도-의 고대 게놈 분석 결과 안도는 100%,연대도는 85%, 장항은 80% 정도가 랴오허강 서부의 훙산계인 반면, 욕지도의 경우는 조몬이 거의 95% 섞여 있어(그림 3b에는 욕지도의 조몬 비율이 85% 정도로 표시돼 있으나, 원문에는 95%로 표기돼 있다), 조몬 혈통이 지금부터 6000년 전 한반도에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반면 중부 서해안의 태정리는 100%가 샤자뎬 상층 계통이었으며 조몬 요소는 없다. 이것은 신석기 한국인에게서 이질적인 조몬 혈통이 관찰되기는 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사라져 가 현대의 한국인에게는 그 요소가 무시해도 될 정도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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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이츠의 언어학⋅고고학⋅유전학의 교차연구는 트랜스유라시아어족의 기원이 신석기 동북아에서의 기장 경작 시작과 초기 아무르 유전자 풀(Gene pool)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트랜스유라시아어족의 전파에는 농경과 유전자의 확산을 반영해 주는 두 단계가 있다. ① 1단계는 트랜스유라시아어족이 최초로 나뉘는 신석기시대 초기∼중기에 아무르계 혈통인 랴오허강 유역의 기장 경작자들이 인접 지역으로 퍼져나간 것이고, ② 2단계는 후기 신석기와 청동기⋅철기에 갈라져 나온 5개 가지 언어들의 상호 접촉이다. 이들 시기에 아무르계 혈통 비중이 상당했던 기장 경작자들이 점차적으로 황허강과 서유라시아, 조몬인들과 섞이며 농경 패키지에 쌀, 서유라시아의 곡식과 유목이 추가됐던 것이다. 그러므로 9000년 전 시작된 랴오허강의 기장 농사는 아무르계 혈통과 상당한 관계가 있으며 시간적⋅공간적으로 트랜스유라시아어 언어공동체 조상과 겹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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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중국어의 뿌리인 지나-티베트어족은 황허강 중상류 신석기시대 농부들에게서 8000년 전 발생했다. 그러므로 동북아의 기장 농사의 두 중심에서 두 주요 어족이 탄생했다. 랴오허강의 트랜스유라시아어족(9000년 전)과 황허강의 지나-티베트어족(8000년 전)이다. 원시 트랜스유라시아어와 유전자에 황허강 영향은 없다. 이것은 두 지역의 기장 농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기장 경작 초기단계인 9000∼7000년 전 이후 인구 성장이 이뤄져 랴오허강의 인구가 환경적⋅사회적으로 하위집단으로 갈라졌으며, 알타이어 사용자와 한국어-일본어 사용자들 간의 연결도 끊어지게 됐다. 그리고 5500년 전쯤에 랴오허강의 기장 농부들 중 소수가 동쪽으로 서해를 건너 한반도로 이동하면서 한국어를, 북동쪽 연해주로 이동하면서 퉁구스어를 전파했고, 랴오허강으로부터 연해주로 아무르 혈통을, 아무르와 황허강이 섞인 혈통을 한국에 가져왔다. 또한 후기 청동기시대에는 유라시아 스텝을 통해 광범위한 문화교류가 일어난 결과, 랴오허강 동부 스텝 주민이 서유라시아의 유전자 계통과 섞이게 됐다. 언어학적으로 이러한 상호교류는 원시 몽골어와 원시 튀르크어 사용자들이 차용한 농경⋅목축 용어들, 특히 밀⋅보리 경작과 유목⋅낙농⋅말의 이용에 관련된 용어에 반영돼 있다. 3300년 전쯤에 랴오둥, 산둥 지역 농부들이 한반도로 이주해 오면서 기장 농경에다 쌀⋅보리⋅밀을 더 보탰다. 이 이주민은 한국의 청동기시대 유전자 샘플 샤자뎬 상층문화 모델의 유전적 요소와 맞춰지며, 한국어와 일본어 간의 초기 차용어들에도 반영돼 있다. 고고학적으로는 꼭 샤자뎬 상층문화만이 아니라 더 넓은 랴오둥, 산둥 지역의 농경과도 연결 지을 수 있다. 그리고 3천 년 전쯤에 이러한 농경 패키지는 규슈(九州)로 전해져 본격적인 농경이 시작되고 유전자적으로는 조몬에서 야요이 혈통으로 바뀌며, 언어학적으로는 일본어로 변이가 일어난다. 남류큐 열도의 나가바카 고유 유전자 샘플을 더함으로써 우리는 농경과 트랜스유라시아 언어가 유라시아의 끝 가장자리까지 퍼져나갔음을 추적했다. 그러나 조몬인 혈통이 남쪽 끝 미야코섬까지 뻗어간 것이지 대만에 살던 오스트로네시아 주민(타이완, 동남아시아, 태평양, 마다가스카르 등에 걸쳐 살고 있다)이 북쪽으로 올라온 것은 아니다. 고대 DNA에서 새로운 증거가 나옴에 따라 우리 연구는 한국인과 일본인은 ‘랴오허강 유역의 혈통’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면서, 한국인과 일본인이 트랜스유라시아어족과 아무런 유전적 관련이 없다는 지금까지의 주장을 부정하고 있다. 이렇게 세 학문 교차연구는 농경과 언어가 함께 확산됐다는 가설이 유라시아 인구의 확산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모델임을 확인해 줘 트랜스유라시아어의 초기 확산은 유목이 아니라 농경에 의한 것이었다고 결론 내리게 된다.

4. 해석

이 논문은 언어학고고학유전학 세 학문의 교차연구 결과, 트랜스유라시아어족은 랴오허강 유역의 기장 농부들의 언어에서 시작돼 인접 지역으로 인구가 확산되면서 농경과 함께 언어도 유전자도 전파돼 갔다는 새로운 학설을 주장하며, 그 언어와 문화 전파 경로에 의한 트랜스유라시아 언어문화벨트를 상정하고 있다. 유라시아시대가 열리고 있는 이때에 상고시대 유라시아를 관통하는 트랜스유라시아 문화벨트를 상정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 언어⋅문화벨트를 통해 중국 측에는 중국의 시원문명은 황허 문명이며, 근래에 자기네 시원문명으로 정한 랴오허 문명과 기존의 황허 문명은 언어학적⋅고고학적⋅유전학적으로 하등의 관계가 없는 두 개의 독자적이고 이질적인 문명임을 확인했다. 반면 한국 측에는 랴오허 문명이 한국의 언어⋅혈통⋅문화의 뿌리로서 한국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확인해주고 있다. 그러나 앞서 이 논문에서도 서유라시아에 비해 동유라시아, 특히 내몽골(内蒙古), 황허강, 랴오허강, 아무르강 유역, 러시아 극동지역,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아우르는 광대한 지역인 동북아에 관한 연구가 아직 많이 부족함을 지적했듯이, 이 논문이 이룬 큰 업적들에도 불구하고, 이 논문에 2000년대 이후 소남산 문화(小南山文化, 註)를 비롯한 아무르강 유역- 특히 길흑지구(吉林省과 黑龍江省)의 수많은 고고학적 발굴 결과가 전혀 반영되지 않아 아쉽다. 이곳은 상고 이래 고구려, 발해시기까지 한국사의 무대였던 만큼 우리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지역이다. "네이처"의 이 논문에서 트랜스유라시아 언어와 문화의 시원을 랴오허강 유역으로 본 이유가 트랜스유라시아 문화의 내용을 ‘농경’을 중심으로 파악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트랜스유라시아 문화의 성격과 시원에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최근에는 시원을 ‘아무르강(黑龍江)’으로 바라보는 연구들도 나왔는데, 그중 하나가 상고시대 동북아에 널리 퍼져있는 옥기 문화를 중심으로 트랜스유라시아 문화의 내용을 파악한 연구이다. 그 연구에서는 옥기문화의 시원을 삼강평원(三江平原) 일대 우수리(烏蘇里) 강변의 소남산 문화(아무르강⋅송화강⋅우수리강의 세 강이 모여 만든 광활한 삼강평원 동남쪽 우수리 강변 일대에서 발굴된 서기전 7200∼6600년경 신석기시대 문화)로 보고, 그 문화의 뿌리를 구석기 후기 동시베리아 바이칼까지 소급한다. 사실 ‘소남산문화’의 옥기가 중국이 ‘훙산문화’의 원류로 여기고 있는 ‘싱룽와 문화’의 옥기를 1천여 년 앞서는 것으로 판명돼 중국도 동북공정으로 만들어 놓은 역사를 다시 수정해야 할 난감한 처지에 놓여있다.


(註) 우수리강에 면한 랴오허현(饒河縣) 일대의 소남산 문화에서 출토된 신석기 유물인 옥으로 만든 장신구는 용도로 보아 목걸이 팔찌 반지 귀걸이로 구분되는데 기원전 7200∼6600년 무렵 만들어진 것으로 판명되었다. 중국의 싱룽와 문화 옥기가 기원전 6200∼5200년이니 소남산 문화의 옥기는 이 보다 10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중국 학계는 랴오허강 유역의 싱룽와 문화를 훙산 문화 옥기의 시원으로 보다가 소남산 문화를 시원으로 보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소남산 문화 옥기의 아름다움이 싱룽와 문화의 옥기에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옥기는 대부분 하늘에 제사하는 의식 때 착용하는 의기(儀器)로 추정된다. 이 옥기의 원석은 랴오둥반도 중부에 있는 수암에서 생산된 것으로 밝혀졌다. 수암에서 소남산까지 거리가 무려 2000km가 넘는데, 먼 옛날부터 두 지역 사이에 직·간접적인 교류가 있었다는 증거이다.


반면 이 논문에 나오는 ‘아무르 유역’은 다만 랴오허강 유역에서 시작된 기장 농사가 5000년 전에 아무르를 거쳐 연해주로 전해지면서 원시 트랜스유라시아어에서 갈라져 나온 원시 퉁구스어가 농경문화와 함께 인구의 이동을 따라 아무르 지역으로 전파된 것으로만 나와 있다. 그러니까 ‘랴오허강⇒아무르강’이라는 이동 방향만 언급돼 아무르는 일방적으로 문화를 전해 받은 지역으로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논문의 유전학 부분에서 아무르 혈통을 트랜스유라시아 언어의 시원으로 보고 있는 점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트랜스유라시아어의 기원이 초기 아무르 유전자 풀(Pool)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했고, 아무르 혈통이 후기 구석기시대 바이칼, 아무르, 연해주, 동남부 스텝과 랴오허강 수렵채취인들의 오리지널 토종 게놈을 대표한다고 했다. 또 트랜스유라시아의 언어와 농경문화의 시원이 신석기시대 랴오허강 유역의 기장 경작자들이라고 하면서도, 이 초기 농부들 또한 아무르 혈통 비율이 상당히 높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황허강 게놈으로 옮겨간다고 했고, 이 아무르 혈통이 한국어와 일본어 사용자들에게까지 추적된다고 했다. 이에 따라 트랜스유라시아 언어 사용자 모두에게 아무르 혈통은 ‘공통된 시원의 유전적 요소’로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이 논문의 연구는 지금부터 ‘9000년 전’ 시기부터 시작하고 있지만, 9000년 전 기장 농사 이전에도 유라시아 대륙에서 인류는 살고 있었고 나름의 수준 높은 정신문화를 이루고 살았음을 발굴된 유적유물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아무르 혈통이 후기 구석기시대 바이칼, 아무르, 연해주, 동남부 스텝과 랴오허강 유역의 수렵채취인들의 오리지널 토종 게놈을 대표한다고 했으니, 아무르는 9000년 전보다 더 이전의 시간에 유라시아에 널리 퍼져있던 게놈이며 랴오허강 게놈의 시원일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유전학연구 결과는 ‘랴오허강⇒아무르강’의 언어와 문화의 이동이 있기 전에 먼저 ‘아무르강⇒랴오허강’으로 유전자 이동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논문에 의하면 인구의 이동은 언어와 문화의 이동이며 동시에 유전자의 이동이기도 하다.


[이상 마르티너 로베이츠 연구 논문 자료=국학원 김윤숙 번역·해석 제공. 단 중국 문명, 문화, 지명, 외래어 표기 등은 이 글 전체에서 사용하는 표기로 통일했다.]


5. 마르티너 로베이츠 연구 논문에 대한 비판

가. 로베이츠는 논문에서 대략 7000~65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부산 가덕도 장항의 고인골 3점, 통영의 연대도 1점의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 83~85%의 훙산 문화인 유전자와 15~17%의 조몬인 유전자를 근거로, 원시 한국어를 쓰며 기장 농경(註)을 하던 훙산 문화인이 6500년 전쯤 한반도로 진입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장항의 고인골에서는 양쪽 귀에 외이도 골종이 확인됐는데, 이는 어패류 채집을 위해 장시간의 잠수를 반복했음을 뜻한다. 아마도 기존에 한반도에 거주하던 아무르강 유역 기원의 수렵채집민이 훙산 문화인과 유전적으로 가까웠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랴오허강 유역의 훙산 문화는 북동쪽의 아무르강 유역과 남서쪽의 황허강 유역에서 퍼져나간 사람들이 섞여 형성된 문화인데, 유전적으로 황허강 보다는 아무르강 유역 사람들의 기여가 컸다. 이 점을 고려하면 장항의 고인골에서도 충분히 훙산 문화인의 유전자 비율이 높게 나올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즉 랴오허강 유역으로 이동한 아무르강 유역의 수렵채집민은 기장 농경문화를 체득했고, 반면에 한반도 남부로 남하한 아무르강 유역의 사람들은 또 다른 수렵채집민인 조몬인과 섞였다. 그리고 진입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이 연구의 가설대로 랴오허강 유역에서 산둥반도와 랴오둥반도를 거쳐 한반도로 들어온 소수의 기장 농경민도 있었을 것이다. 이들이 한반도에 최초의 농경문화를 전달했을 테지만, 기장 농경은 한반도의 신석기 사회와 환경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므로, 이때 원시 한국어가 전파됐을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註) 로베이츠는 랴오허강 유역의 트랜스유라시아어족의 조상과 황허강 유역의 지나-티베트어족의 조상은 같은 시기에 서로 다른 종의 기장(랴오허강: 기장, 황허강: 조)을 재배했으며 이로 인해 서로 다른 언어의 확산 경로를 밟았다고 주장했다.


나. 로베이츠 가설대로 6500년 전에 전파된 한국어가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해 현대 한국인의 주 언어로 자리매김했다면, 당시에 원시 한국어를 사용하던 랴오허강 유역 사람들이 대거 한반도로 이주했거나 혹은 6500년 전 기장 농경의 시작과 함께 생산성이 크게 향상돼 한반도 내 인구가 급증해야 정상일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의 인구 증가는 5500년 전부터 나타났고 그 상승 폭도 크지 않았다. 한반도의 인구는 3500년 전 이후 벼 농경이 본격화되면서 빠르게 증가했다. 로베이츠의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한반도에서 수렵채집민의 수가 늘어나는 5500년 전 이후의 한반도 고 DNA 자료가 필요하다. 그것도 조몬인의 유전 비율이 높은 해안가가 아니라 내륙 안쪽의 자료가 확보돼야 홀로세 중기의 한반도 인구 변동에 대해 의미 있는 분석이 가능할 것이다.

다. 로베이츠는 원시 한국어가 기장 농경문화와 함께 대략 6500년 전에 한반도로 유입됐고, 원시 일본어는 벼 농경문화와 더불어 3300년 전에 한반도로 전달된 후 송국리형 문화인이 약 2800년 전 일본 규슈로 이주할 때 함께 건너갔다고 본다. 즉 로베이츠는 두 언어 모두 랴오허강 유역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만약 그녀의 가설이 맞다면, 현재 한국어와 일본어의 차이는 6500년 전 랴오허강 유역의 기장 농경민이 원시 한국어와 함께 한반도로 이주할 때, 랴오허강 유역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3300년 전 원시 일본어와 쌀 농경을 가지고 한반도로 건너온 수천 년간의 격리된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송국리형 문화인의 쌀 농경은 추위가 시작된 2800~2700년 전부터 2300년 전까지 한반도 남부로 광범위하게 확산하는 모습을 보인다. 두 언어가 과연 접촉이나 차용을 최소한 채 각 언어의 고유성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강하게 든다. 따라서 6500년 전에 한반도로 이주해 정착한 기장 농경인과 3300년 전에 이주한 송국리형 문화인은 한반도에서 수백 년간 공존하면서 언어가 섞여야 마땅하고, 그러면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이주한 송국리형 문화인(야요이인)의 언어와 한반도에 남아있는 정착인(훙산 문화인)의 언어가 최소한 소통은 돼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어와 일본어가 소통이 완전히 불가능할 정도로 차이가 나는 것을 로베이츠의 가설로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


3. 존 휘트먼과 알렉산더 보빈의 연구 논문

미국 코넬대학교의 언어학자 존 휘트먼(John Whiteman)과 미국의 러시아계 언어학자인 알렉산더 보빈(Alexander Vovin)은 한반도의 청동기 문화 집단(야요이인)이 원시 일본어를 사용한 집단이라고 본다.

이른바 반도 일본어 설의 대표자들이다.

가. 휘트먼은 3500년 전쯤, 랴오둥반도에서 한반도로 논농사가 도입되면서 일본어족이 들어왔다고 추정한다. 이후 2300년 전쯤,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가 고조선을 침입하면서 수많은 유민이 발생했고, 이들이 한반도로 이주하면서 한국어족이 들어왔다고 본다. 특히 일본어족의 경우 쌀 농경을 기반으로 해서 한반도 남부지방으로 빠르게 확산됐고, 2300년 전쯤 이들 집단이 일본 규슈(九州) 지방으로 이주하면서 일본 열도로 일본어족이 확산됐다고 봤다. 그리고 한반도 일본어의 경우 2300년 전쯤에 유입된 고조선 유민의 한국어족으로 인해 점점 소멸됐다고 주장한다. 휘트먼은 이러한 원시 일본어족 문화의 지표 유물을 민무늬 토기로 보고 있다.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건너간 야요이인들의 문화는 대체로 송국리형 토기의 유적 문화와 거의 일치하는데, 송국리형 토기는 이 민무늬 토기에서 발전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어족의 문화는 십이대영자 문화로 대표되는 이중구연토기, 점토대토기가 지배적으로, 민무늬 토기와는 뚜렷하게 구분된다. 실제로 송국리형 문화를 영유하던 집단은 일부가 일본 열도로 직접 이주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당시 한반도에 살던 주민이 일본 열도로 이주했다는 사실 자체는 유전학적으로도 증명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Cis-AB형의 존재가 있는데, 이 혈액형은 침미다례(忱彌多禮, 註)의 지역이었던 전라남도의 남쪽과 일부 변한 지역, 그리고 일본 규슈에서만 발견되는 희귀 혈액형이다. 침미다례의 고고학적 계통은 서해안 토돈분구묘(註) + 위만조선계의 예맥 + 송국리형 문화인 계열 세력의 융합인데, 이를 근거로 송국리형 문화인들의 Cis-AB형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라고 추정한다.


(註) 침미다례는 일본서기에 3세기 무렵 등장하는 한반도 서남부의 독자적인 세력 중 하나이다. 전방후원분이 많이 발견되는 전라남도 영산강 유역의 해남 및 강진 일대에서 마한의 주요 세력으로서 존재했다고 보는 설이 지배적이다. 4세기 중반까지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다가, 백제 근초고왕이 전라남도 지방을 정복하면서 백제의 영향권으로 들어갔다고 여겨진다. 백제와의 병합 과정에서 난을 피해 일본으로 많이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註) 지면에 시신과 수장품을 안치하고 그 위에 흙으로 성토해 토돈(土墩, 거대 분구)을 조성하는 매장 방식이다. 신라의 적석목곽묘는 지하식으로 지상식인 분구묘와 반대되는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나. 보빈은 고대 한반도 중남부에는 일본어족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 중 일부가 일본 열도로 이주한 집단이 야요이인이고, 이들이 일본 열도에서 야요이 문명을 시작하고 일본 열도에 고 일본어(Old Japanese)를 퍼뜨렸다고 주장한다. 한편 일본 열도로 이주하지 않고 한반도에 남아 있던 일본어족 집단은 만주에서 남하한 한국어족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에 밀려, 결국 한반도에서 사용되는 언어가 한국어족 계통의 언어로 동화, 대체됐다는 것이다. 즉 보빈은 고조선에서 한국어족 계통의 언어를 사용했고, 한반도 남부의 진국에서는 일본어족 계통의 언어를 사용했다고 추정했다. 이후 고조선의 준왕 집단이 진국의 영역으로 남하해 건마국을 세워 마한 지역의 초대 맹주가 되고, 마찬가지로 고조선계가 세운 목지국이 건마국 다음 마한의 맹주가 되면서 마한 지역은 한반도 남부에서 가장 먼저 한화(韓化)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마한의 한화는 마찬가지로 한국어족을 사용한 고구려계 유이민이 세운 백제에서 지속됐다는 주장이다. 보빈은 물론 백제에서도 일본어와 연관이 있는 어휘가 일부 발견됐으나, 초기 진한보다는 훨씬 적음을 확인했으며, 이는 마한 지역이 훨씬 먼저 환화(韓化)되었다는 증거로 해석했다. 반면 마한과 언어 및 풍습이 달랐다는 변한/가야와 진한의 토착 언어는 일본어족 계통이었으나, 변한과 진한의 소국 중에서도 고조선계 유민들이 세운 구야국과 사로국의 언어는 한국어족으로 보았다. 이러한 구야국과 사로국이 각각 변한과 진한의 맹주가 되면서 이 두 지역도 차츰 한화되기 시작했으며, 이후 변한/가야의 소국들이 멸망하고 사로국이 신라가 돼 진한 및 변한 지역을 장악하면서 한반도에서 일본어족은 7세기 이후에 사멸돼 기층 언어로만 남았다는 주장이다. 또한 당시 제주도 지역에 있던 국가인 주호국/탐라국에서 사용됐던 탐라어를 일본어족이라고 추측했다. 이 가설은 한국 신화인 단군 신화와 연결되는 부분이 있고, 언어학적으로는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이 유사한 언어(고대 한국어)를 사용했다는 기록에 대해 "삼국사기" 권 34, 권 37이나 "양서 백제전"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한반도 중남부의 지명 등 고유명사가 한국어보다는 고대 일본어와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을 주된 근거로 든다. 만약 해당 가설이 사실이라면, 당시 한반도에서 쓰였던 일본어는 고대 일본어와 매우 유사할 것으로 추측된다. 보빈은 상술했듯이 마한이 진한과 변한보다 일찍 한화됐다고 주장했는데, 이 또한 고고학적 증거가 존재한다. 보빈은 한국어족 집단들은 비파형 동검과 세형동검으로 대표되는 북방 세력이라고 봤는데, 진국 지역 일대에서 세형동검이 가장 먼저 등장한 지역은 준왕 세력이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마한의 건마국 일대, 즉 금강 유역이었다. 즉 이는 준왕 세력의 마한 정복 얘기와도 통하지만 실제로 이는 기원전 300년경의 일로, 위만의 쿠데타보다 100년 정도 앞선다. 다만 기원전 300년은 상술했듯이 고조선이 연나라에게 패해 중심지가 선양(瀋陽)에서 평양으로 이동한 시기와 일치하는데, 즉 기존 준왕 세력의 이주보다 더 빨리 한국어족이 한반도에 유입됐음을 의미하고 있다. 상기 논의를 종합하면 반도 일본어설 측에서 제시하는 여러 고고학 및 관련한 학제적 증거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점토대토기-세형동검의 유입으로 한반도 중남부가 사회문화적으로 급격한 변화를 겪었으며 이는 한반도가 일본어족에서 한국어족으로 대체되는 계기로 지목할 수 있다. 둘째, 민무늬토기문화는 일본어족의 문화로, 점토대토기는 한국어족의 문화로 뚜렷이 구별할 수 있으며, 한반도의 민무늬토기가 전파돼 형성된 야요이 문화를 바로 일본열도에 일본어족이 확산된 계기로 지목할 수 있다. 셋째, 앞선 논의는 연나라 장수 진개의 동정이나 준왕의 남하와 같은 문헌 근거와도 호환된다. 넷째, 실제로 유전학적으로도 한반도 남부에서 일본으로의 직접적인 이주를 뒷받침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휘트먼의 가설도 점토대토기 내지 세형동검을 한국어족의 지표로 보고, 이 문화의 확산으로 남한지역의 일본어족 집단(청동기 시대 토착민)이 한국어족 집단으로 대체됐다고 보고 있다.

다. 휘트먼과 보빈의 연구 논문에 대한 비판

휘트먼의 연구 논문은 점토대토기 내지 세형동검을 한국어족의 지표로 보고, 이 문화의 확산으로 말미암아 남한지역의 일본어족 집단(청동기시대 토착민)이 한국어족 집단으로 대체됐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현재 주류 고고학계에서는 휘트먼의 가설과는 달리, 기원전 5-4세기 이후 점토대토기 문화 및 세형동검의 확산을 단순한 이주나 주민교체설, 이로 인한 문화적 단절의 견지에서 설명하지 않는다. 고고학계는 이를 비교적 소규모의 이주민과 토착민 간의 활발한 교류 및 융화의 관점에서 설명하거나, 전기 청동기시대부터 지속적으로 유지돼 온 요동 지역 청동기 문화 네트워크 사이의 교류의 결과로 해석하고 있다. 휘트먼은 점토대토기-세형동검의 유입을 대규모 인구집단의 이동 및 언어교체의 계기로 지목할 만큼 이 당시 문화변화가 단절적이라고 보는 데에 반해, 주류 고고학계에서는 이를 그러한 단절적인 변화로 이해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현재 주류 고고학계에서는 '대규모 이주민 집단이 내려와 재래 토착 청동기시대 주민들을 대체했다'라고 해석하지 않는다. 또한 보빈이 제시하는 '무기와 전술이 우월한 북방의 기마민족 내지 수렵민이 남방의 농경민족을 무력으로 정복하고 지배했다'는 식의 자극적인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증거는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상호 간의 호혜적인 교류 속에 점진적으로 통합돼 갔음을 시사하고 있다. 한편 강원 지역에서는 점토대토기 문화가 기원전 4세기부터 나타나기는 하지만, 이는 종래의 민무늬 토기와 병존하다가 새로운 철기문화로 모두 흡수되기 때문에 딱히 점토대토기 문화가 지배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말할 수도 없으며, 이 지역에서 한국어족이 정착한 과정은 단순히 '점토대토기 문화 집단'의 이주 이외의 다른 부가적인 요인을 통해 해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당시 점토대토기-세형동검의 확산 이후 형성된 새로운 '세형동검문화' '점토대토기문화'는 주로 이전 문화와의 연속적인 측면이나 계승적인 측면이 많기 때문에 토착민들이 일방적으로 대체됐다고 보기는 어렵고, 설령 이주가 있었더라도 언어교체의 계기로 지목할 만큼의 대규모 이주민이 있었는지는 불확실하다. 물론 물질문화의 변화 양상을 통해 해석된 상기의 논의들이 관념 문화의 변화까지 온전히 포괄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것이 휘트먼과 보빈의 반도 일본어설이 거짓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극단적인 수준의 대규모 주민 교체는 없었을지언정 비교적 소규모 수준의 고조선 계통 주민들의 집단적 이주는 어느 정도 존재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또 이들이 지역적인 교역망을 주도함에 따라 이들의 언어인 한국어족이 점차 지배적인 언어로 부상했을 가능성까지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반도 중남부에서 청동기 시대 말기에서 원삼국시대 사이에 어떤 집단이 대규모로 이동했다고 상정할 수 있을 만큼의 극적인 변화는 나타나지 않고 있는 이 무렵의 고고학 자료들을, 외래인의 대규모 이주로 말미암아 어족이 비교적 단시간에 극적으로 변했다는 반도 일본어 가설을 결정적으로 확증할만한 근거로 사용하기는 어려워 보인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 당시 상황에 대한 고고학계의 주류 의견은, 반도 일본어설의 찬성론자들이 이 무렵의 일본어족 집단으로 가정하는 한반도 중남부 토착민들은 단순히 이러한 외래문화를 일방적으로 수용하거나 이들에 흡수되는 입장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적극적으로 외래문화를 수용하고, 다른 집단과 교섭하면서 토착문화와 외래문화가 융합된 새로운 문화를 창출시킨 주역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 즉 일본어족 토착민이 일부 기층 어휘만을 남기고 외래의 한국어족 집단에 일방적으로 흡수 및 소멸한 것으로 가정하는 반도 일본어설의 주장과는 다소 배치된다. 이와 같은 고고 자료의 양상은, 외래 한국어족에 의한 토착 일본어족 집단의 대체라고 하는 반도 일본어 가설에 부분적으로 개연성을 제공할 여지는 있으나, 이러한 자료를 반대되는 가설을 배척하는 논리로 이용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또한 고고 자료상 점토대토기 문화 집단을 한국어족으로, 토착민을 일본어족으로 규정하는 논리는 고고학적 해석을 통해서는 도출하기 어려운 많은 비약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4. “한국인의 기원”(박정재)

한국인과 일본인은 상대방의 언어를 사용해 소통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두 민족의 유전적 차이와 두 나라의 물리적 거리를 고려할 때 언어의 차이가 무척 큰 편이다. 이는 한국어와 일본어가 일찍 분기한 다음에 서로 간에 언어적 교류가 많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일본이 고립된 섬나라라는 점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비교를 위해 다른 나라의 경우를 살펴보자. 가령 이탈리아 사람과 스페인 사람은 상대방 언어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도 서로의 말을 듣고 이해할 수 있다. 로마 제국 시기 이후 라틴어의 방언으로 스페인어가 떨어져 나가면서 이탈리아어와 달라졌다고 하는데, 두 언어는 여전히 무척 유사하다. 또한 지중해와 피레네산맥 때문에 스페인은 다른 유럽국으로부터 지리적으로 고립돼 있다. 그럼에도 스페인어와 이탈리아어의 차이는 생각만큼 크지 않다. 이에 비하면 한국어와 일본어는 확실히 멀게 느껴진다. 한편 미국 코넬대학교의 언어학자 존 휘트먼은 원시 한국어가 2300년 전 랴오허강 유역에서 세형동검(註)을 지니고 한반도로 들어온 유목 문화 배경의 집단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원시 일본어는 그 이전에 벼 농경과 함께 랴오둥에서 한반도 그리고 일본 순으로 순차적으로 전달됐다고 보았다. 당시 한반도 남부에 거주하던 송국리형 벼 농경민들은 2800~2700년 전부터 시작된 기후 변화를 피해 일본으로 넘어가는 중이었으므로 2300년 전 남하한 반농반목민의 원시 한국어가 한반도 전체로 비교적 수월하게 퍼지는 상황을 상정해 볼 수 있다. 휘트먼의 생각이 옳다고 가정하고 한국어와 일본어의 언어적 거리를 감안한다면, 3200년쯤에 한반도에 나타나 2800년 전에 일본으로 건너간 송국리 벼 농경민과 수백 년 후 세형동검과 함께 한반도로 진입한 유목 문화 기반의 북방민은, 비록 두 집단 모두 랴오둥과 만주 일대에서 남하했을 테지만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 그리고 언어적 배경을 가졌을 가능성이 크다. 원시 한국어와 원시 일본어가 기원지는 유사하더라도 생활 방식과 문화가 완전히 다른 집단에서 비롯됐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두 언어 간에 교류가 일어나지 않아 시간이 지나면서 그 차이가 점점 벌어졌을 것이다.


(註) 청동기 시대 후기부터 철기 시대 전기에 사용했던 청동으로 만든 무기이다. 비파형 동검에 비해 폭이 좁고 가늘기 때문에 세형동검이라고 부른다.


휘트먼의 가설은 한국어가 부여어와 고구려어에서 기원했다는 미국의 러시아계 언어학자인 알렌산더 보빈의 주장과도 연결된다. 보빈은 원시 한국어가 남만주에서 내려온 유목민에 의해 한반도로 전파됐다고 말한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유목민이 남하할 당시 한강 남쪽에는 원시 일본어를 사용하는 벼 농경민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말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유목민을 이길 수 없었다. 벼 농경민에게는 유목민을 우두머리로 받아들여 섬기거나 유목민과의 싸움을 피해 도망치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이 중 후자가 더 나은 선택이었으며, 특히 바다 건너 일본으로 이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는 것이다. 보빈은 고유전학이나 고고학 정보 없이 오로지 언어 자료만을 가지고 이런 결론을 내렸다. 그의 주장은 학술적으로 엄밀하지 않은 단순한 추론에 불과하다. 그러나 원시 한국어와 부여어의 관련성을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는 점에서는 주목할 만하다. 그의 분석이 옳다면, 북쪽에서 유목민이 내려와 원시 한국어가 한반도에 퍼졌고, 원래 한반도에서 사용되던 원시 일본어는 벼 농경민이 일본 규슈로 건너갈 때 이들과 함께 넘어갔다고 볼 수 있다. 보빈의 논문에서는 고고학적인 내용을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이주가 일어난 시기에는 관심이 없는 듯 대충 넘어가고 있다. 그는 한반도로 원시 한국어가 들어오는 과정에서 유목민과 벼 농경민집단 간에 물리적 싸움이 일어났을 것으로 가정했지만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기후 변화로 인구가 감소한 데다 일본으로 많은 사람이 이동했기 때문에 한반도 남부에는 비어있는 땅이 많았다. 북방에서 복합 경제를 영위하던 반농반목민이 진입하기에 큰 무리는 없었을 것이다. 샤자뎬 상층문화에 포함되며 고조선과의 관계 때문에 자주 언급되는 랴오허강 유역의 십이대영자(註) 집단 또한 휘트먼이나 보빈의 가설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연구자들은 흔히 십이대영자 집단을 동호(東胡, 註)와 연결하곤 한다. 아마도 원시 한국어를 쓰는 무리였을 것이다. 일본어와 한국어의 차이를 농경 기반인 샤자뎬 하층문화와 복합 경제 기반의 십이대영자 문화 간의 언어 차이에서 비롯됐다고 보면 논리적으로 큰 문제는 없다. 더불어 일본의 고립된 환경과 조몬어는 두 언어의 간격을 더욱 벌리는 요인이었다. 십이대영자 문화는 만주의 수렵민 집단이 현성한 샤자뎬 상층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므로 그 이전의 샤자뎬 하층문화와는 차별적인 성격을 띠었다. 이는 휘트먼이나 보빈이 제시한 가설과도 상통한다.


(註) 십이대영자 문화는 보통 랴오허강 유역의 비파형동검 문화를 가리킨다. 랴오허강 유역에서 형성돼 요동지역까지 확산됐으며, 비파형동검 문화권의 여러 물질문화 중에서도 가장 역동적인 전개 양상을 나타낸다. 또한 중국 동북지역에서 한반도에 이르도록 관련 문화요소들이 널리 확인되고 있어 장기간에 걸쳐 광범위한 교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註) 동호는 고대 중국 사서에서 만주 일대에 살았던 여러 민족집단을 일컫는 말이다. 대다수는 유목민 성격이 강했으나 일부는 수렵채집민, 일부는 반농반목 경제를 영위했다. 이전에는 특정한 민족집단을 일컫는 표현으로 해석하기도 했으나 사서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연나라 동북 방면에 있던 여러 민족을 부르는 것 외에는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 발견돼 특정한 민족집단이 아니라 중국 기준으로 '호(胡)' 즉 유목민에 해당하는 여러 민족 중 동북 방면에 있는 종족을 통틀어 부르는 명칭이다.


반면 6500년 전 기장 농경민이 원시 한국어를 전파했다는 로베이츠의 가설은 당시 이들의 파급력이 낮았음을 고려할 때 수긍하기가 어렵다. 벼 농경이 들어오기 전까지 한반도는 수렵채집민의 땅으로 인구 밀도가 높지 않았다. 또한 기장 농경이 한반도에서 시작됐던 때는 지난 1만 년 이상의 홀로세 기간에서 가장 풍요로웠던 시기로 이주, 갈등, 문화 전파와 같은 사회 변동이 일어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원시 한국어를 쓰는 랴오허강 유역의 점토대토기 문화 집단이 남하해 송국리형 문화를 대체했지만, 이들은 송국리 문화를 상징하는 수전 농경을 계승하지 않았다. 생산성 높은 농경 기술이 후속 문화로 이어지지 않고 사라진 경우는 동아시아에서 흔치 않았다. 남한의 점토대토기 문화 유적에서는 단지 수렵과 채집의 비중이 더 높아진 복합 경제 활동의 흔적을 간간이 볼 수 있을 뿐이다. 인구가 많이 감소했고 벼 농경의 비중은 확연히 줄어들었다. 송국리형 문화 사회가 2700년 전에서 2300년 전 사이에 쇠퇴하는 과정에서 사회문화적 요소보다는 갑작스럽게 닥친 기후 변화가 더 큰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이유다. 또한 주거지 수 자료에서도 볼 수 있듯이 2800년 전의 갑작스러운 인구 증가도 송국리 문화의 쇠락에 한몫했을 것이다. 인구가 급증하면 삼림의 과도한 파괴를 피할 수 없으므로 가뭄이 사회에 미치는 파급력은 더 강해진다. 여기에 지속 가능성을 초과하는 토양과 물의 남용은 인구의 급격한 감소와 문화의 후퇴를 부추겼을 것이다. 혹독한 기후로 한반도에서 송국리형 문화가 크게 쇠락하던 2300년 전, 심이대영자 집단 또한 기후 변화에 시달리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전국 시대의 연나라가 명장 진개를 앞세워 압박해 들어왔다. 사람들은 기후 변화와 전쟁을 피해 랴오허강을 건넜고, 랴오둥에 있던 고조선 사회는 외부인의 유입으로 혼돈에 빠져들었다. 고조선인은 갈등에 지쳐 하나둘 고향을 등지기 시작했다. 십이대영자 집단(동호)을 진압한 진개는 이번에는 랴오둥으로 진격해 이미 세력이 약해진 고조선을 공격했다. 고조선인들은 전력의 현격한 열세를 실감하며 한반도 서북부까지 떠밀려 내려왔다. 이들이 한반도에 세형동검과 같은 유물을 남긴 주인공이다. 비숫한 시기에 해안을 따라 한반도 남부까지 내려온 점토대토기(註) 집단도 있었다.


(註) 점토대토기는 아가리에 원형 및 삼각형의 점토 띠를 말아 붙인 토기로 한글로 순화해 ‘덧띠토기’라고도 부른다. 청동기 시대 후기에서 초기 철기 시대에 남한 지방에서 유행한 형식이다. 형태는 심발형(深鉢形)이나 호형(壺形)을 띠고 있다. 점토 띠의 단면 형태에 따라 원형 점토대토기와 삼각형 점토대토기로 구분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원형 점토대토기에서 삼각형 점토대토기로 변화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점토대토기는 한반도 중부와 남부 지역, 일본 규슈[九州] 지역 등 넓은 범위에서 출토된다. 초기에는 경기도와 충청도 지역을 중심으로 하다가 점차 남부 지방으로 확산돼 일본으로까지 확대된 것으로 파악된다.


5. 결론

1. 한국어의 뿌리와 형성

가. 한국어의 시원(始原)

글쓴이는 한국어의 시원(始原)은 아무르강 유역의 수렵채집민이 사용한 언어라고 본다. 그 과정을 보면 약 2만 5000년 전부터 마지막 빙기 최성기가 시작되면서 한랭화가 극심해졌고 한반도의 수렵채집민 인구가 빠르게 늘어갔다. 즉 북방에서 사람들이 추위를 피해 남쪽으로 내려온 것이다. 이때 한반도로 남하한 이들은 대부분 만주와 연해주의 아무르강 유역에서 살던 수렵채집민이었다.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해수면 하강으로 육지화된 서해의 초지였지만 이들 가운데 일부 무리가 동쪽의 한반도로 밀려들어 왔다. 반면 북방의 수렵채집민이 남하하면서 만주와 아무르강 유역의 인구 밀도는 현저하게 감소했다. 동아시아 전체에 파장을 몰고 온 마지막 빙기 최성기의 추위도 약 1만 9000년 전부터 약해지는 조짐을 보였다. 이후 수천 년간 동아시아 북부의 인구는 증가했고, 반대로 한반도의 인구는 감소했다. 높아진 기온으로 해수면이 상승했기에 서해 평야의 수렵채집민은 내륙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해수면 변동이 없었더라도 어차피 이들 집단은 움직였을 것이다. 기후가 온난해지면서 동아시아의 대부분이 점차 삼림으로 덮였고 북쪽으로 올라가야 초지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수렵채집민 집단도 초지를 찾아 아무르강 유역으로 돌아갔다. 고립에 대한 두려움도 한반도를 떠난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 결과 대략 8200년 전까지 1만 년 넘게 한반도의 인구는 낮은 수를 유지했다. 그런데 8200년 전 갑작스럽게 기온이 떨어지자 아무르강 하류의 수렵채집민 무리가 추위와 경쟁을 피해 다시 남쪽으로 움직였다. 이때 처음으로 아무르강 수렵채집민이 한반도에 토기 문화를 전파한 것(註)으로 추정된다. 홀로세로 접어든 이후 온난한 기후 덕에 아무르강 유역의 인구는 빠르게 늘었으므로 8200년 전의 갑작스러운 저온 현상은 식량 위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자원을 두고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자 북방의 수렵채집민이 살 곳을 찾아 동해안을 거쳐 한반도 남동해안까지 내려왔다. 이들 아무르강 토기 문화인이 사용하던 언어가 바로 원시 한국어다.


(註) 강원도 고성과 양양, 그리고 부산의 패총에서 발견된 홀로세 초기의 덧무늬 토기 유물은 그 형태가 아무르강 중상류의 노보페트로프카와 그로마투카에서 출토된 토기와 유사하다. 이는 당시 아무르강 유역의 사람들이 추위를 피해 동해안을 따라 이동해서 한반도 남동부까지 내려왔음을 시사한다. 이때 한반도에 토기 문화를 처음 전파한 사람들 역시 아무르강 유역의 수렵채집민으로 추정된다.


나. 랴오허강 유역과 랴오둥반도 농경인의 언어

아무르강 수렵채집민은 8200년 전의 갑작스러운 저온 현상을 피해 한반도뿐만 아니라 랴오허강 유역으로도 이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랴오허강 유역에 정착한 아무르강 수렵채집민 집단이 북으로 이동한 황허강 농경민 집단과 섞이면서 새로운 랴오허강 집단이 형성됐다. 이후 랴오허강 집단은 농경과 유목을 함께하는 반농반목의 문화를 발전시켰다. 이들도 기후가 나빠질 때마다 한반도 등으로 남하해 이주의 물결을 일으켰고 북방의 선진 농경문화를 전해주면서 한반도에 고대 사회가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줬다. 한반도 유적의 탄소 연대 자료를 모아 시기별 주거지 수를 추정한 연구 결과는, 한반도에 5700~5500년 전부터 인구가 증가하고 정착 수렵채집민의 수가 늘어났음을 보여준다. 이 시기는 북방의 랴오허강 유역이나 랴오둥반도에서 한반도로 조/기장 농경문화가 처음 전파된 시기와 가깝다. 이 무렵 농경이 시작된 후에도 한반도의 주거지가 크게 늘지 않았음을 고려할 때 당시에 이주민 집단은 그리 크지 않은 듯하다. 따라서 한반도의 언어는 이미 정착한 아무르강 수렵채집민 집단의 언어가 주도했을 가능성이 크다. 아울러 랴오허강이나 랴오둥반도에서 이주한 농경 집단도 거슬러 올라가면 아무르강 집단과 혈연적 동질성이 다수이므로 한반도의 아무르 집단이 사용하던 언어에 별 무리 없이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다. 한반도 벼 농경인의 언어

홀로세 중 후기 한반도로 들어오는 신문화는 보통 랴오허강 유역에서 출발해 랴오동반도를 거쳐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랴오허강 유역에서도 기후 최적기 이후 주기적으로 나타난 엘니뇨의 영향으로 한반도와 비슷한 시기에 사회 변동을 겪었다. 최적기가 끝난 4800년 전에는 훙산 문화가 쇠락하고 대신 샤오허옌 문화가 성장했고, 4200년 전에는 가뭄의 충격으로 샤오허옌 문화의 세력이 크게 위축되는 모습이 나타났다. 4000년 전에는 근근이 이어지던 샤오허옌 문화가 결국 쇠퇴하고 샤자뎬 하층문화가 랴오허강 유역을 차지했다. 이 샤자뎬 하층문화 집단은 농경 기반의 사회였는데 일부 구성원이 기후 악화를 피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연쇄적인 이주의 물결을 일으켰고 그 과정에서 한반도에 벼 농경이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기후 최적기 이후 한반도는 꾸준히 추워지고 건조해지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3500~3400년 전 들어 기후가 조금씩 양호해지더니 3400년 전에는 강수량이 급증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동시에 인구수도 가파르게 늘었다. 인구의 빠른 증가 속도를 감안할 때 이즈음에 한반도의 벼 재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이후 3200년 전쯤 400~600년 주기의 장주기 엘니뇨에 의해 동아시아 전역에 추위와 가뭄이 몰려들었다. 이 추위로 당시 랴오허강 유역을 주도하던 샤자덴 하층문화가 무너졌고, 랴오허강 유역의 기후 난민이 랴오허강을 건너 남동쪽의 랴오둥으로 이동하자 이곳에서 잡곡 농사를 기반으로 살아가던 소규모 사회들은 대혼란에 빠지게 된다. 마치 도미노와 같은 이주의 물결이 남쪽을 향해 연쇄적으로 퍼져나갔다. 랴오둥의 농경민은 북쪽에서 내려온 외부인과의 갈등과 기후 위기에 따른 사회 내부의 혼란을 피해 한반도 남부로 이동해 최초의 수도작 문화인 송국리형 문화를 발전시켰다. 다른 한랭화 시기와 달리 3200년 전에는 기후가 나빠졌음에도 한반도 남부에서 인구가 줄어드는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외부 세력인 랴오둥의 농경민이 대거 진입한 후 수도작 벼 농경을 기반으로 빠르게 규모를 키웠기 때문이다. 한반도 남부의 인구는 2800년 전 정점에 이르렀다. 이후에도 기후 변화의 주기에 따라 난민이 들어오고 신문화가 전파되는 과정이 반복됐다. 3200년 전의 가뭄이 끝난 후 한반도의 기후는 2800년 전까지 온난 습윤함을 유지했다. 이에 한반도 사회는 안정을 되찾았고 사람들의 이동은 잦아들었다. 3000년 전경부터 시작된 한반도의 송국리형 문화는 2800년 전 절정을 맞았다. 그러나 좋았던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2800~2700년 전 철기 시대 저온기 시작과 함께 기후는 다시 한랭해졌고 송국리형 문화인은 원래 터전인 금강 중하류 지역을 벗어나 따뜻한 남쪽으로 확산하기 시작했다. 이들 중 일부는 바다 건너 일본 규수까지 진출해 일본의 야요이 문화를 열었다. 한반도에서는 2300년 전에 재차 닥친 기후 변화의 여파로 인구가 다시 한번 큰 폭으로 감소했고, 결국 송국리형 문화는 종말을 맞았다. 수도작 농경민 집단이 사라지고 남은 공간은 같은 시기 한랭화를 피해 랴오시(遼西), 랴오둥(遼東), 아무르강 유역에서 내려온 점토대토기 문화인이 들어와 점차 채워갔다. 철기 저온기 내내 이어지던 추위가 끝이 나고 기원전 3세기부터 기온과 강수량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후 대략 300년간 온난한 환경이 유지되면서 한반도 사회는 안정을 되찾았다. 랴오동반도를 통해 한반도에 벼 농경문화를 전파한 송국리형 문화인의 언어는 한반도에 이미 정착했던 아무르 집단의 언어와는 분명 달랐을 것이다. 송국리형 문화인의 원류는 벼 농경이 시작된 양쯔강(揚子江) 집단이고, 이들이 북쪽으로 이동해 황허강 이주민과 섞인 후 랴오둥반도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한반도로 이주해 한때 번성했으나 지속하지 못하고 기후 한랭화와 함께 일본 열도 등으로 이주해 한반도에서 거의 소멸되고 말았다. 결국 랴오동반도에서 이주한 벼 농경인의 언어는 한반도에서 몇 백 년간 혼용됐으나 궁극적으로는 한반도 언어로 정착하지 못하고 기후 한랭화와 함께 사라져 버린 것이다. 다만 기존 한반도 언어에 많은 영향을 끼쳤음은 분명해 보인다.

라. 한국어의 초기 형성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3500년 전에 한반도로 이주한 벼 농경인의 언어는 한반도에 정착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반면 같은 시기의 한랭화를 피해 랴오시, 랴오둥, 아무르강 유역에서 내려온 점토대토기 문화인이 들어와 서서히 채워갔다. 이들의 언어는 한반도에 이미 정착해 있던 아무르강 집단의 언어와 원류가 비슷하므로 별 무리 없이 통합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철기시대 저온기 내내 이어지던 추위가 끝이 나고 기원전 3세기부터 기온과 강수량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후 대략 300년간 온난한 환경이 유지되면서 한반도 사회는 안정을 되찾았다. 이 무렵(기원후 1세기) 남방계로부터 유입된 드라비다 언어도 한반도 언어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고조선(註)이 멸망한(기원전 108년) 후, 만주와 한반도는 삼한(마한, 변한, 진한)과 신라(기원전 57년), 고구려(기원전 37년), 백제(기원전 18년), 가야(기원후 42년, 금관가야, 이후 가야 연맹, 3세기~5세기 김해 고분 유물은 부여계)로 분화됐지만, 모두 아무르강 집단의 언어를 뿌리로 하는 고조선과 부여(註)계 말이기 때문에 소통에 별 지장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과 한국의 여러 역사서를 살펴보더라도 삼국과 가야 연맹이 서로 소통이 불가능할 정도로 말이 달랐다는 내용은 없다. 오히려 중국의 "위략(魏略)"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는 모두 조선의 후손으로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고 쓰여있다. 중국의 양서(梁書)에도 신라 사신에 대해 "언어와 복장은 대략 고구려와 같다"라고 했고, "백제의 통역을 거쳐 신라 사신에게 의사를 전달했다"라고도 쓰여 있으므로 신라의 말과 백제의 말이 서로 통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서기(日本書紀, 720년 편찬)에 "고구려 사신의 말을 일본에 거주하던 신라인이 통역해 줬다"라는 기록을 볼 때 고구려와 신라의 말도 서로 소통에 무리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 중국 사서에는 일관되게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등의 언어가 비슷하고, 말갈과 읍루의 언어는 고구려어와 뚜렷하게 다르다고 기록돼 있다. 즉 고구려어는 여진, 말갈, 읍루, 숙신어가 포함된 퉁구스 어족과는 언어 체계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註) 고조선(古朝鮮, 기원전 2333~108년)은 동북아시아의 예맥계로 구성된 고대 국가이다. 우리 민족이 최초로 세운 국가이자 가장 먼저 등장한 국가이다. 고조선 유민들이 남하해 마한과 진한에 소국을 세우기도 하고 삼한의 맹주 목지국을 위협하기도 했으나 결국은 삼한(三韓)과 융합된다. 예맥이라는 표현은 대체로 예와 맥의 연칭(連稱)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한반도와 요령·길림성 등 현재의 중국 동북지역에 살고 있던 주민으로서 구체적으로 예족은 지린성(吉林省) 지역의 송화강(松花江) 및 눈강(嫩江) 유역과 한반도 일부에 분포하고 있었으며, 맥족은 산동과 요동 및 한반도에 분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 예·맥족은 이후 고조선·부여·고구려 등의 역사체 형성의 근간이 됐다. 이들 예맥의 분포범위와 존재시기는 고고학상으로 비파형동검문화의 연대 및 범위와 일치하므로 이들 예·맥족이 바로 고조선을 구성한 중심세력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예맥 관련 명칭이 중국사에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은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이다. 이들 사료에서는 예맥이 부여·조선(夫餘·朝鮮)과 함께 언급돼 있는데 특히 ‘예맥조선(濊貊朝鮮)’이라는 연칭(連稱)으로 나타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즉 이전까지의 조선이라는 명칭은 지역적 성격이 강한 표현이었는데, 새로이 등장하는 예맥조선이라는 표현은 종족명칭이 부가됐다는 점에서 ‘예맥족이 사는 조선’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예맥은 기본적으로 고조선을 구성하는 중심 종족으로서 중국의 동북 방면에 위치한 조선지역에 존재하였다는 사실이 한대(漢代)에는 보다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다. 또한 이 시기 예맥의 구체적 위치는 "사기(史記)" 흉노열전(匈奴列傳) 편에서 흉노가 동호(東胡)를 멸망시킨 다음 동쪽에서 예맥조선과 접했다고 한 사실을 통해 흉노와 인접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등에 나타나는 예맥은 부여와 고구려의 선주종족(先住種族)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이는 예맥족이 지역적으로 각각 성장하는 과정을 나타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근래에 발굴된 중국 랴오허 문명의 핵심인 훙산 문화가 고조선의 문화라는 한국의 일부 역사학자의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註) 부여는(扶餘, 夫餘, 기원전 2, 3세기~494년)는 고리국의 동명왕이 건국한 예맥족 국가이다. 즉 고조선·고구려·옥저·동예 등이 주류를 형성한 고대 우리 한민족(韓民族)인 예맥족이 세운 나라다. 영토는 지금의 창춘시(長春市) 이퉁강(伊通江) 유역을 중심으로 솽양(雙陽)과 남쪽으로는 랴오닝성(遼寧省), 북쪽으로는 아무르강에 이르렀을 것으로 여겨진다. 중국 사서인 "삼국지"에도 부여가 예맥 땅에 있고, 고구려를 맥인(貊人) 또는 예맥이라고 칭하면서, 언어와 법칙이 대체로 부여와 같은 부여 별종(夫餘別種)이라고 기록돼 있다. 또한 함경도 일대의 동옥저 사람을 예민(濊民), 동해안 일대의 정치 세력을 예(濊)라 불렀고, 요동 지역에 고구려로 편입된 양맥(梁貊)이 있던 점에서 요동과 한반도 북부 지역에는 예맥족이 토착족으로 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종족상으로 같을 뿐만 아니라 동족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와 백제는 서로 자신들이 부여의 정통 계승자라고 주장했다. 고구려는 건국시조인 주몽이 부여로부터 내려왔다고 대내외에 표방했고, 백제도 427년 북위에 보낸 외교문서에 백제와 고구려가 모두 부여에서 비롯됐다고 밝혔다. 또한 백제 왕족의 성은 부여씨·여씨·해씨였고, 성왕 때는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기까지 했다. 우리나라 전통 민속놀이인 윷놀이도 부여의 통치조직인 사출도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것이 다수설이다(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부여의 통치조직은 중앙의 국왕 아래 최고 귀족장으로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도가(堵加)가 있으며, 동서남북의 사출도(四出道)로 나눠 통치했다"라며 "도·개·걸·윷·모가 돼지·개·양·소·말이 등장하는 윷놀이가 단군조선을 이은 부여 때(BC200년) 유래했다가 고구려에서도 계승됐다"라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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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08년 고조선과 부여, 예맥)


그러나 삼국과 가야의 말 뿌리가 같더라도 고조선 시기와 초기 철기 국가(삼국) 시대는 시간의 차이가 난다. 즉 고조선의 멸망은 기원전 108년이고, 삼국과 가야가 세워진 것은 그 이후의 일로써 50~150년의 차이가 난다. 그 사이의 언어 변화를 무시하지는 못한다. 다만 삼한의 원주민들도 고조선과 부여계가 다수이므로 말의 급격한 변화는 없었을 듯하다. 이에 조금은 다른 듯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무리 없이 말이 통한 것은 모두가 아무르강 집단의 언어를 뿌리로 하는 고조선과 부여계의 말이기 때문일 것이다. 고려 때(1145년)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 내용으로 삼국 간의 의사소통 정도를 가늠해 보자. 먼저 김유신 열전 편을 보면 김춘추가 고구려의 연개소문과 만나서 담판한 후 결렬되자 옥에 갇히게 된다. 이에 김춘추는 고구려 관료 선도회를 매수해 탈출에 성공한다. 또한 거칠부(居柒夫) 편을 보면 고구려 승려 혜량법사가 신라로 망명하는 내용이 나온다. 거칠부가 승려로 위장하고 고구려를 염탐했을 때 고구려 혜량법사는 거칠부가 신라 사람인 것을 알면서도 숨겨줬다. 이후 거칠부가 백제와 협공한 후 고구려를 쳐서 영토를 확장할 때 거칠부는 다시 한번 혜량법사를 만나게 됐다. 이때 거칠부가 자신을 보살펴준 혜량법사에게 은혜를 갚을 방법을 묻자 혜량법사는 자신을 신라에서 받아주도록 요청했다고 얘기한다. 즉 혜량법사와 거칠부가 거리낌 없이 얘기하는 장면이다. 이러한 사례에서 보듯이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도 말이 충분히 통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가령 고구려말과 신라말에 다소 차이가 있었고 둘이 대화할 때 다소 어색할 수 있더라도, 고구려말과 신라말에는 유사성이 많아서 신라인이 염탐 목적을 위해서 고구려말을 배우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수도 있다. 한편 고구려 장수왕도 승려인 도림을 간첩으로 활용한 적이 있었다. 고구려 간첩 도림은 백제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하는 것을 이용해 개로왕에게 접근했고, 결국 장수왕이 보낸 승려 도림에게 속아 개로왕은 무리하게 성을 짓다가 고구려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참수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중국, 일본, 한국의

역사서에 기록된 내용을 통해 추론해 보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연맹 간에는 별 무리 없이 말이 통한 것으로 보인다. 즉 삼국과 가야가 모두 같은 뿌리에서 시작한 말이기 때문에 시간적, 공간적 격차를 극복하고 서로가 말이 통한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마. 인도 드라비다어의 영향

한편 언어학자 강길운 박사가 쓴 "고대사의 비교언어학적 연구"라는 책을 보면, 고대 가야에서 지배층이 쓰던 말들은 거의 드라비다어다. 이 드라비다족 말이 한국말에 약 1,000여 개 이상 남아있다고 소개한다. 이를 뒷받침하듯 "삼국유사"에 가야의 초대 왕비 허왕후(許王侯, 실존 인물의 여부는 별론으로 하고)가 인도에서 건너왔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2000년 전에 이미 인도 등 남방 국가와 해상교류가 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이다. 현재 학자들에 의해 발표된 언어의 유사성 이외에 동물과 식물 이름 및 한국어와 유사한 성, 그리고 우리 전통 민속놀이의 형태와 명칭도 많은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새해 첫날 즐기는 윷놀이, 제기차기, 쥐불놀이, 팽이놀이 등 민속놀이도 고대 타밀어로 ‘윳노린’, ‘제기노리’, ‘추불노리’, ‘팡이노리’로 불리고 그 놀이 방식도 거의 비슷하다. 어린이가 밤에 잠자다 오줌을 싸면 그다음 날 아침 키를 쓰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소금을 얻어오는 풍습도 똑같다. 아기를 출산했을 때, 부정을 타지 말라고 외부인의 출입을 금(禁)하려고 집문 앞줄에 나무 잎을 달아놓은 전통 관습도 똑같다. 우리는 남자아이가 태어날 경우 고추나 솔가지를 여자 아이일 경우 숯 등을 달아놓는다. 드라비다인의 전통 관습도 똑같다. 다만 열대지방에 살기 때문에 고추나 솔가지 대신에 망고 열매나 나무 잎을 달아 놓는다. 한국어와 비슷한 드라비다어 가운데 쌀, 벼, 밥 등 농사와 연관된 단어는 인도 남부 드라비다족과 연관된 단어들이 많다. 쌀이 자라는 ‘벼’를 한국에서는 ‘벼’, 베트남에서는 ‘포(퍼)’, 인도에서는 ‘펴’로 발음한다. 벼의 원산지인 인도 남부로부터 한국 쪽으로 흘러 들어오며 전파된 언어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또한 한국어로 ‘말’은 드라비다어로 ‘마루’다. ‘비(雨)’는 ‘뻬이'다. ‘나무’는 ‘마누’, ‘풀’은 ‘뿔’이다. 동사 ‘안다’는 ‘안’이고 ‘알다’는 ‘아리’다. ‘왕’은 ‘왕’이다. ‘태양’은 ‘수리야’라 불렀다. 이 단어는 서로 유사성이 같아 보이지 않지만, 좀 더 자세히 분석하면 수리야의 ‘수리’는 머리 꼭대기를 뜻하는 한국어 ‘정수리’의 수리와 같이 ‘꼭대기’를 말한다. 한국어와 드라비다어(타밀어)의 어휘를 비교해 보면, 그 발음과 뜻이 너무나 일치함에 놀라게 된다. 우리와 인접한 만주어나 몽골어 등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사례들이다. 다시 말해 드라비다어가 우리말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를 역으로 추론해 볼 수 있다. 외국인들이 한글을 배우면서 자주 하는 말이 있다. “한글은 너무 쉽지만, 한국어는 어렵다”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창조된 한글은 규칙적이어서 배우기 쉽지만, 막상 한국어는 조사와 존칭어, 그리고 형용사와 동사 중심의 언어라 배우기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이렇게 배우기 어려운 한국어와 드라비다어(타밀어)를 살펴보면, 놀라우리만치 비슷한 말의 존재는 단순한 교역과 이동만으로 잘 설명되지 않는 대목이다. 즉,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종족의 일정 부분 이동(학계에서는 부정되고 있지만)이라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바. 한국어의 형성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치열하게 패권을 다퉜으나, 결국은 676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한반도인들은 신라의 문화를 갖게 됐고 신라말이 곧 한국어의 중심이 됐다. 이처럼 통일 신라는 한반도의 영토적 통일뿐만 아니라 문화적, 언어적 통일도 이뤘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우리말을 표기할 문자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말의 정확한 발음을 알 수가 없다. 당시 우리말 발음은 한자의 음을 빌리거나 뜻을 빌려 표기한 향찰(註)을 분석해서 일부나마 추론해 볼 뿐이다. 이후 936년 고려가 후 삼국을 통일하면서 한국어의 중심지가 경주에서 개성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러다가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이후부터는 서울이 한국어의 중심지가 됐다. 그리고 1443년,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함으로써 한자 문화권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됐을 뿐만 아니라 우리말과 글에도 획기적인 발전을 이뤘다. 그 이후 여러 과정이 있었지만 그야말로 각고의 여정 끝에 오늘날의 한국어는 남북한의 한반도인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관심받는 언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註) 우리말의 운문 문장을 어휘적인 의미를 가진 부분은 한자의 뜻을 빌리고, 문법적인 의미를 가진 부분은 한자의 소리를 빌려 표기하는 방법이다. 신라에서 고려 중기까지 향가 표기에 많이 사용됐다.


사. 한국어의 형태⋅계통 분류

언어를 분류하는 방법은 ‘형태적 분류(形態的 分類)’와 ‘계통적 분류(系統的 分類)’가 있다. 형태적 분류는 언어의 형태적 특성을 따라 구분하는 것으로서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즉 한국어처럼 조사와 어미(나는, 나의, 나를)가 활용되는 형태를 갖는 첨가어(교착어)가 있고, 영어의 ‘I my me'처럼 단어 자체가 굴절되는 형태를 취하는 굴절어(굴곡어)가 있으며, 중국어처럼 첨가도 굴절도 되지 않는 고립어(위치어)가 있다. 반면 계통적 분류는 한 조상 언어에서 갈려 나온 언어들을 하나의 어족으로 묶어서 분류하는 방법을 칭한다. 알타이 어족설은 핀란드의 언어학자 람스테드가 처음 주창한 것으로, 한국어를 그의 논문 “한국말에 관한 소견"(1928)에서 알타이어족에 추가됨을 선언했다. 한편 벨기에 언어학자 마르티너 로베이츠가 2021년

"네이처"에 발표한 트랜스유라시아어족(알타이어족과 유사한 개념)이 9000년 전의 랴오허강 유역의 공통 어족이며, 한국어와 일본어가 5500년 전 1차로 분화됐고, 언어의 확산이 유목민이 아니라 농경민에 의한 것임을 차별점으로 부각했다. 1928년 람스테드가 한국어를 알타이어족으로 분류한 후, 그 이후 상당 기간 동안 알타이어족으로 분류됐다. 그러나 한국어가 알타이어족과는 뚜렷한 차이점으로 인해 학계 등에서 고립어로 분류했다가, 근래에는 ISO(국제표준화기구) 등에서 한국어를 제주어와 묶어서 '한국어족'(註)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註) 한국어를 '한국어족'이라는, 하위 언어군을 거느리는 독립된 어족으로 취급한다. 여기에는 과거에 한반도에서 쓰였던 부여어, 고구려어, 백제어, 신라어, 가야어, 발해어 등의 사어(死語)와, 현대에 통용되는 언어인 한국어와 제주어 등이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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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족' 분포도: 녹색 부분은 대부분이 '한국어족' 언어를 사용하는 지역이며, 빗금은 일부가

한국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지역이다.)


2. 일본어의 뿌리와 형성

가. 일본어의 뿌리

일본어의 뿌리가 한국어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는 것은 대부분의 언어 학자가 인정한다. 그럼에도 오늘날 두 나라의 언어가 소통이 되지 않을 정도로 차이가 나는 현상에 대해서는 어떤 학자도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글쓴이는 일본어가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건너간 야요이인의 말이 뿌리라고 본다. 그에 대한 논거는 앞에서 여러 자료로 제시했다. 반면 일본어의 기원이 한반도 기원의 야요이인의 언어가 아니라 조몬어, 즉 원주민들의 언어였다는 주장도 있다. 최근 들어 제기된 새로운 가설로, 2017년 일본의 언어학자 이가라시 요스케가 주장한 이후, 2020년에 인도의 인류학자인 갸네시와르 차우베이와 네덜란드의 언어학자인 조르주 반 드리엄에 의해 반복해서 제기된 주장이다. 이들의 가설에 따르면 일본어족은 본래 혼슈서부의 조몬어에서 기원했으며, 이후 한반도를 통해 건너온 야요이인들과 융합해 일본 전역으로 확대해 나갔다는 것이다. 이렇듯 이 가설에서는 알렉산더 보빈의 가설(반도 일본어 설)과 달리 야요이인의 언어가 일본어족이 아니고 오히려 조몬인의 언어였다고 보는 것이다. 보빈의 학설과 비교하면 보빈은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일본어족이 건너가 조몬어를 밀어냈지만, 이 가설에서는 이주 자체는 같으나 언어의 교체가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언어적으로는 야요이인이 조몬인(일본어족)에게 동화됐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이 가설에 대해 별로 신뢰하지 않고 있다. 다수의 언어학자는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건너간 야요이인의 말이 일본어의 뿌리라고 보는데 대체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나. 일본어의 형성과 분류

오늘날 일본인 유전 형질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야요이인이 사용하던 말은 한반도 벼 농경민의 말이라는 것은 세계 언어학계에서도 보편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앞서 제시한 여러 논거들을 압축하면, 3500년 전쯤랴오둥의 농경민은 북쪽에서 내려온 외부인과의 갈등과 기후 위기에 따른 사회 내부의 혼란을 피해 한반도 남부로 이동했다. 이들이 한반도에 최초의 수도작 벼 농경인 송국리형 문화를 발전시켰고, 2800년 전 정점에 이르렀다. 그러나 좋았던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2800~2700년 전 철기 시대 저온기 시작과 함께 기후는 다시 한랭해졌고 송국리형 문화인은 원래 터전인 금강 중하류 지역을 벗어나 따뜻한 남쪽으로 확산하기 시작했다. 이들 중 일부는 바다를 건너 일본 규수까지 진출해서 일본의 야요이 문화를 열었다. 앞서 KBS 다큐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시미즈 키요시 교수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언어가 어떻게 음운변천 과정을 거치게 됐는지를 조사했다. 그 결과 무려 5,000자에 걸친 생활언어의 어근이 한국어와 일본어가 비슷했다. 이는 한반도에서 쓰이던 한국어가 일본 열도로 건너가 일본어로 정착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오늘날 한국어와 일본어가 현격하게 차이 나는 것은 벼 농경 집단인 송국리형 문화인들이 대부분 일본 열도로 이주해 한국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반면 일본 열도로 이주한 한반도의 벼 농경 집단(야요이인)의 언어는 일본 열도의 조몬인의 언어에 커다란 영향을 받았지만, 결국은 조몬인의 언어를 대체해서 오늘날의 일본어로 발전했기 때문으로 본다. 또한 오늘날 일본 홋카이도 등지에 거주하고 있는 약 2만 5000명의 아이누인은 조몬인의 후손일 가능성이 높은데,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현대 일본어와는 전혀 다른 체계를 갖추고 있다. 따라서 현대 일본어는 한반도 등에서 이주한 야요이인의 언어가 조몬인(아이누인 선조 등)의 언어를 흡수통합해서 발전했다는 가설을 한층 더 뒷받침해 준다. 한편 현대 일본어는 형태적으로는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교착어에 해당하며, 계통적으로는 현대 일본어와 류큐어 등을 포함해서 '일본어족'으로 분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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