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글쓴이는 중국의 사마천(기원전 146~86년)이 기원전 91년경에 편찬한 “사기(史記)”를 최고의 역사서라 평가한다. 또한 서구(西歐)에서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토스(기원전 484~425년)가 기원전 430년경에 저술한 “역사(Historiae)”와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기원전 59~기원후 17년)가 죽기 직전까지 집필한 “로마사”도 높이 평가한다. 그리고 고려 인종 때(1145년)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三國史記)도 객관성을 갖추기 위해 나름 애썼고, 특히 1971년에 발굴된 무령왕릉의 지석(誌石)에 표기된 내용이 “삼국사기” 기록과 정확하게 일치(註)한 사실도 의미 있게 평가한다. 물론 위 사기와 역사(부제: 페르시아 전쟁사), 삼국사기도 현시점에서 고찰해 보면 여러 부분에 오류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위 집필자들은 역사적 사실을 찾기 위해 진심을 다했으며, 시류의 권력이나 처세에 결코 굴종하지 않았다. 반면 “일본서기”의 전기(前期)는 허구와 가공이 가득해, 도저히 역사서로 평가할 수 없다. 다만 백제와 가야에 대한 풍부한 기술이 있어, 그나마 한국의 고대사를 탐색하는 사료로 일정 부분 활용할 수 있어 다행이다. 이에 글쓴이가 최근 가야사를 집필하기 위해 살펴본 “일본서기”에 대해 촌평(寸評)을 남기고자 한다.
(註) 지석(誌石)은 왕과 왕비의 장례를 치를 때 땅의 신에게 무덤으로 사용할 땅을 산다는 내용을 담은 매지권(買地券)이다. 무령왕릉에서는 왕과 왕비의 지석이 발견됐다. 아래 지석의 내용은 “삼국사기”의 무령왕에 대한 설명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처럼 우연히 발견된 무령왕릉의 지석으로 인해 “삼국사기”가 일정 부분 정확하게 기술됐음이 증명됐다.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年六十二歲癸卯年五月丙戊朔七日壬辰崩到乙巳年八月癸酉朔十二日甲申安조 登冠大墓立志如左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께서 나이가 62세 되는 계묘년(523년) 5월 7일에 돌아가셨다. 을사년(525년) 8월 12일에 안장해 대묘에 올려 모시며 기록하기를 이와 같다.〕
2.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대한 고찰
가. 개요
일본인들이 떠받들고 있는 “일본서기”란 과연 어떤 책인가? 일본인들이 “삼국사기”의 사료적 가치를 비판할 때면 언제나 거론하는 것이 바로 “일본서기”이다. “일본서기”는 누구나 아는 대로 왜곡과 허구가 심한 역사서다. “일본서기”는 특히 고대 일본과 고구려, 백제, 신라의 관계를 크게 왜곡했다. 뿐만 아니라 연대까지 조작했기 때문에 정상적인 역사서라고 보기 어렵다. 실제로 “일본서기”는 10여 명의 국왕이 연달아 100세 이상 140세까지 살았다는 ‘기(紀)’를 싣고 있는데, 역사서의 기본인 ‘지(志)’도, ‘열전(列傳)’도 없으며, 저자의 서문(序文)과 발문(跋文)도 없다. 역사서인지 의문이 드는 책이다. 일본은 한국 고대사를 왜곡하기 위해서 그들이 가장 오랜 국왕으로 간주하는 15대 오진(應神) 연대(재위 279~310)에 해당하는 신라의 내물왕(재위 356~402)과 백제의 근초고왕(재위 346~375) 이전의 수백 년간의 “삼국사기” 내용을 모두 부정한다. 또한 삼국에 대한 기술도 “삼국사기” 보다 “일본서기” 가 더욱 정확하다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모든 활동은 철저히 “일본서기”의 이념을 수호하기 위한 것이다. 이처럼 일본인들은 “일본서기”를 일종의 성스러운 신서(神書)로 신봉하고 있다.
나. 내용
1) 일본이 한자를 본격적으로 수용(註)한 시점은 5~6세기이다. 그 이전에는 문자가 없었다. 따라서 "일본서기"의 5~6세기 이전 기록은 구전에 기초한 내용이며 역사라고 부르기에 어렵다. 역사는 기록이 있어야 성립한다. 그러므로 일본서기의 5~6세기 이전 기록은 신화나 전설이라고 부를 정도로 황당하고 기괴한 내용이 많다. "일본서기"에 기술한 신화와 전설은 전부 사료가 불명이고, 그 이후 역사적 사실도 대부분 중국의 “위서(魏書)”, “진서(晉書)”, “백제기(百濟記)”, “백제본기(百濟本記)”, “백제신찬(百濟新撰)”을 참조하거나 인용했다. 즉 백제 멸망 전후로 많은 백제인들이 일본 열도로 건너가 일본인들에게 전달한 “백제기(百濟記)”, “백제본기(百濟本記)”, “백제신찬(百濟新撰)”을 입맛대로 윤색해 "일본서기"에 반영했음이 분명해 보인다. 아울러 서기 400년 광개토대왕의 금관가야 정벌과 532년 금관가야, 562년 대가야의 멸망에 따라 대 규모의 가야 유민도 일도 열도로 이주했다. 이러한 까닭으로 백제와 가야에 대한 얘기가 "일본서기"에 그렇게 풍부하게 기술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백제기(百濟記)”, “백제본기(百濟本記)”, “백제신찬(百濟新撰)” 이 발견되기라도 하면 일본의 고대사는 전부 고쳐 써야 할 것이다.
(註)“수서(隋書)”의 ‘동이전(東夷傳)’ 중 ‘왜국(倭國)’
“沒水捕魚 無文字 唯刻木結繩 敬佛法 於百濟求得佛經 始有文字”
(물속에 들어가 고기를 잡는다. 글자는 없고 나무에 균열을 만들거나 새끼줄을 묶어 기록할 뿐이다. 불교를 숭상해서 백제에게 불경을 구하니 비로소 글자가 생겼다.)
2) "일본서기"가 많이 차용한 백제삼서(百濟三書)인 “백제기”,“백제신찬”,“백제본기”의 내용은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오인하기 쉬운데, 백제삼서를 인용해 놓고도 왜왕(倭王)을 백제삼서가 작성된 시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명칭인 천황(天皇)으로 버젓이 고쳐놓는 등, 윤색(潤色)이 가득하다. 이는 백제 귀족층이 기록한 백제삼서를 왜국에 정착한 백제인이 일본 조정에 제출할 때 이미 한번 윤색하고,“일본서기”가 작성될 때 편찬자가 재윤색해 원출처의 내용이 조작됐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3) "일본서기"는 다양한 필진이 참여해서 편찬한 것으로 추정된다. 예를 들면 “일본서기”의 글귀 중에 왜색(倭色)이 짙은 한문 구성이 있고 문법도 일본어 어순을 따른 조악한 문장이 많은데, 이런 부분은 왜계(倭系) 필진이 작성한 듯하다. 반면 중국어 어순으로 작성된 한문(漢文)은 대체로 백제와 중국 측 사료를 참조하거나 백제계와 중국계 필진이 작성한 부분임을 알 수 있다. 즉 문체를 참고해서, 작성된 기사가 어떤 맥락에서 작성됐는지 분별할 수 있다.
4) 이 책이 비록 7~8세기 당시의 역사책이지만, 초기 기록이 신화에 기댔거나 편찬 목적 중 하나가 선대 일본 황실의 권위를 알리고 칭송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많은 과장과 조작이 들어갔다. 사실 객관적인 실증자료가 부족했던 전근대의 다른 역사 기록도 과장하거나 신화적 수사가 어느 정도 들어가지만 “일본서기”처럼 기본적인 서사 구조마저 의도적으로 짜 맞추는 정도는 아니다. “일본서기”를 편찬한 시기의 일본은 한반도의 통일신라와 점점 관계가 불편해졌으며, 자신들이 더 우월하다고 주장하던 시대적 배경이 있었다. “일본서기”와 같이 자국 황실의 권위를 한층 높이기 위해 타국을 무조건 낮추거나, 사신 파견을 무조건 조공 기록으로 보는 편향적인 시각은 중국 사서들에서 일부 볼 수 있다. 이에 순 한문체(純漢文体)로 된 부분은 중국계 인물이 개입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또한 일본서기는 일본 황실이 훨씬 오래됐음을 주장하기 위해서 이주갑인상(二周甲引上, 120년 인상)으로 계보를 끌어올리거나, 실제로 있었던 전쟁 및 외교 활동이라도 그 주체를 일본이 주도했다는 식으로 일본에 유리하게 바꿨으며, 한반도 왕조는 일본의 신하라는 식으로 변조했다는 등 여러 가지 논쟁이 있다. 따라서 “일본서기”에 실린 내용은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동시대의 사료나 고고학적 근거로 정밀하게 교차·검증해서 해석할 필요가 있다.
5)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이 등장하는 “일본서기”의 외교 관련 기사는 일본의 통일왕조가 성립되기 이전의 일이므로, 통일왕조가 병합한 지방 국가들에서 전해오는 구전을 취합한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구전은 사료보다 객관성이 매우 결여될 수밖에 없다. 이주갑인상과도 아주 연관이 짙은데, 이주갑인상이 끝나는 시점이 왜가 통일을 이룩한 시점(백제의 개로왕이 고구려의 장수왕에게 살해된 시점)과 절묘히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고로 이주갑인상은 한반도 왕국들의 역사를 의식해서 천황의 위엄을 세우고자 연도를 조작한 것으로 보인다.
6) “고사기”가 먼저냐 “일본서기”가 먼저냐를 두고 논란이 있으나 “고사기”가 712년에 편찬돼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임을 인정하되 “일본서기”가 720년에 최초의 정사를 기록한 책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왜냐하면 “고사기”는 과거에 야마토의 중앙 정부에서 구전이나 기록으로 전해지는 역사를 문자화했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고사기”에 따르면 이전까지 제왕의 역사를 담은 기록인 제기(帝紀)와 임금의 말을 기록한 본사(本辭) 등이 통일되지 않은 채 기록돼 있어,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많으며, 이와는 별도로 제황의 일과 과거 있었던 사건들을 암기하는 신하가 있었다고 돼 있다. 따라서 681년 덴무 천황이 “옛 기록들을 모두 정리해 새로이 만들라”라는 명을 내린 후 “고사기”와 함께 완성된 “일본서기”는 과거에 중구난방으로 전해지던 역사를 통일해 편찬된 책이었다. “고사기”는 내부의 결속을 위해서 “일본서기”는 대외적으로 내세우기 위해 순 한문체를 사용했고, “고사기”보다는 덜 신화적이고, 사서적인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일본서기"도 신화성과 내용의 왜곡이 짙기 때문에 4세기, 더 나아가서는 5세기 전반과 중반까지의 기술은 대체적으로 역사로 인정되지 않는다. 사실 3세기 즈음부터는 가뭄에 콩 나듯 역사적 사실들이 나오기도 하는데, 대표적으로 근초고왕의 마한 정복 기록, “삼국사기”에서 교차검증되는 관련 기록들, 또한 대놓고 히미코를 의식한 조공 기록 등이 있다. 다만 이 시기가 하필이면 이주갑인상이 적용된 시기인 데다가 있는 사실들마저 일본에 유리하게 왜곡해 놓아서 사실과 왜곡의 구별이 쉽지가 않다. 이에 중국과 한국 사학계에서는 일본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부정하며, 교차검증을 통한 기록만을 인정한다. 물론 5~6세기의 기사들도 문면 그대로 수용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5~6세기 이전의 기사들은 역사적, 사실적 가치가 전혀 없는 신화나 창작으로 여겨지며, 그 이후의 기사들도 어느 정도 사실을 기반으로 하되 윤색을 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 비판
1) "일본서기"와 "고사기"가 비슷한 시기에 편찬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천황(1~7대)의 연령이 틀린다. 〔일본서기(고사기): 1대 신무 127세(137세), 2대 수정 94세(45세), 3대 안녕 57세(49세), 4대 의덕 77세(45세), 5대 효소 113세(93세), 6대 효연 137세(123세), 7대 효영 128세(106세)〕 이는 두 책이 목적에 따라 천황의 연령을 마음대로 기재했기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내용만 보더라도 두 책은 역사서로서 가치가 현저히 떨어진다.
2) “일본서기”에 기재돼 있는 ‘임나일본부설’(註)이 “고서기”에는 언급조차 없다. 그렇게 엄청난 역사적 사실을 기술하는데, 비슷한 시기에 편찬된 역사서에 한쪽은 아예 빠져 있다는 사실은 두 역사서의 사실성을 빈약하게 해주는 것이다. 즉 일본 황실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임나일본부'라는 허구의 사실을 억지로 꿰맞춰 "일본서기"에만 기술했다고 봄이 타당하다.
(註)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은 4~6세기경에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의 임나 지역에 통치기구 '임나일본부(일본어: 任那日本府 미마나니혼후)'를 세워 지배했다는 설이다. 당시 국제관계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조작의 혐의가 짙은 내용과 사료에 모순이 있다는 점에서 현대에는 한일 양국 모두 '임나일본부설'
을 그대로 믿지 않는다. 이에 2010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임나일본부'와 관련해 존재 자체가 없었다는 데에 의견을 같이 했음을 밝혔으나, 일본의 일부 역사 교과서에는 '임나일본부'를 긍정하는 내용이 그대로 실려 있어 공식적으로 폐기된 학설을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있다는 논란이 일기도 한다.
('임나일본부설'에서 주장하는 삼국과 가야의 모습)
3) “일본서기”에 신라구(新羅寇) 피해를 입은 기록을 보면 일본은 제대로 된 정식 군대가 있었던 적이 없어 맨날 당하기만 한다. 그럼에도 일본은 신이 지켜주는 신국이니 앞으로는 신라구(新羅寇)가 안 오겠지 하며 자기 위안만 하고 있는 내용이 무더기로 나온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면 최소한 정신적인 위안용으로라도 진구 황후에 대한 얘기가 조금이라도 나올 만한데, 전혀 안 나온다. 심지어 신라구로 인해 신라에 대한 반감이 높아져 일본에 살고 있었던 신라인을 일본인이 공격하는 일도 기록돼 있으면서도 신화시대의 기록 이후에는 안 나온다. 또한 백제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백제를 종숙국으로 봐서, “일본서기” 곳곳에서 출병과 전투 시, 모두 일본이 상국이고 백제는 시키는 식으로 기술되는데, 실질적인 내용은 모두 백제가 주력으로 기록돼 있다. 심지어 진구 황후 시절 일본이 쳐서 백제에게 주었다는, 지금의 전라도 지역에 있었던 소국인 ‘침미다례’는 일본 입장에서는 서쪽이나 북쪽이지, 남쪽이라고 볼 여지는 하나도 없는데도 남쪽 오랑캐라는 뜻인 '남만(南蠻)'이라 적었다.
4) 게이타이 천황대의 “일본서기” 기록을 보면, “백제본기”를 인용해서 일본의 천황 및 황태자, 황자들이 모두 죽었다고 돼 있다. 일본 국내의 사서나 문헌에는 없는 내용을 백제의 사서가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서기”가 신화시대를 벗어나면 어느 정도 사실을 기술했지만, 전기에는 황당한 기록이 주류를 이룬다. 이러한 “일본서기”의 모순이 극에 달하는 부분은 긴메이 천황에 관한 기록들이다. 즉 긴메이 천황의 분량에서 주인공인 긴메이 천황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고, 80% 정도가 백제 관련 기록들이며 대놓고 “백제기”를 인용했다고 쓰여 있다. 특히 백제 성왕에 관련된 기록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어서 그냥 백제 사서다. “일본서기” 답게 성왕이 긴메이 천황의 신하라서, 마치 꼭두각시처럼 긴메이 천황은 지시를 내리고, 성왕은 수행하는 식으로 쓰여만 있을 뿐이다. 즉 “일본서기”는 기본적으로 사실을 기반으로 하되, 그것을 이리저리 짜 맞춰서 왜국(倭國)에 유리한 식으로 재구성했다고 추정된다. 물론 앞서 말했듯이 초기의 신화시대는 말 그대로 그냥 신화다. 따라서 한국 관련 기록들은 조공 및 인질 같은 일본이 상국이라는 기술을 거둬내고 주체를 백제로 바꾸거나, 관계를 역으로 생각하면 해결되는 부분이 많다. 예를 들자면 삼국이 일본에 조공을 올린 것은 사실 선물이고, 백제가 가야 땅 어디를 하사해 달라고 왜국에 요청하는 건 실제론 백제가 그 가야 땅을 점령했다는 뜻이며, 왜국이 고구려를 친 기록은 사실 백제가 고구려를 친 것을 바꿔 써놓은 기록이었다는 식으로 해석하면 한국의 고대사와 너무도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5) 일본은 6세기 초에 항해기술이 백제와 신라보다 낙후돼 4~8월경에만 도해가 가능했고, 항해에 소요되는 세월도 상당했는데,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당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당시 일본에게 도움을 청하고 머리를 조아렸다는 것은, 백번 양보해서 일본의 군사력이 실제로 강대했다 해도, 유사시 긴급 지원이나 지원군 동원이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말이 안 된다. 당시 일본의 항해기술 수준은 663년 8월의 백(촌)강 전투만 보더라도 일본은 준비에 긴 세월과 항해 기간이 필요했고, 그동안 모든 것을 파악한 나당연합군은 백제 부흥 군과 일본 정규군을 철저히 농락해 완전히 궤멸시켰다.
6) 백제 멸망 전후의 상황을 보면 백제는 일본의 속국이 아니라 종주국이나 마찬가지였다. 기록에 따르면 660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사비성이 함락당하자 왜(倭)에 있던 백제 태자 부여풍은 백제 부흥 군을 이끌고 돌아왔고 왜왕(倭王)은 즉위식까지 미루고 663년 8월에 거의 전 병력을 모아서 백(촌)강 전투에 참여한다. 이때 왜왕(倭王)은 아버지의 나라가 당과 신라에 의해 멸망의 위기에 처했다며 애통해했다. 이 거대한 해전에 참여한 왜(倭) 병력만 2만 7천 명, 함선은 1,000여 척, 이미 부여풍 귀국 때 파병한 육상전력 5천 명을 포함하면 3만 2천 명이 넘는 숫자로 왜(倭) 건국 후 최대 규모의 파병이었고, 국운을 건 전쟁이었다. 결국 이 전투로 인해 왜(倭) 군대는 전멸했고 백제부흥운동도 끝이 났다. 백(촌)강 전투 이후, 왜(倭)는 대마도와 규수에 신라의 침공에 대비해서 수많은 산성을 지을 정도로 겁에 질려 있었다. 그리고 당시 왜왕(倭王)과 관리들은 깊은 슬픔에 잠겨, “이제 선조의 무덤을 어찌 찾아볼 수 있단 말인가”라며 한탄했다고 한다. 이는 왜(倭)가 전력을 쏟을 만큼 백제는 종주국이나 마찬가지의 소중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백제 멸망 후 왜(倭)는 국호를 일본(日本)으로 바꾸고 왜왕(倭王) 칭호를 천황(天皇)으로 바꾼다. 일본의 주장대로 백제가 일본의 속방이었다면 오히려 백제를 상실한 시점에 칭제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자신들의 상국(上國)이 사라졌기 때문에 왜(倭)가 백제인들 입장에서 해 뜨는 곳인 일본이라는 국호를 짓고 천황이라고 칭제 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3. 맺음말
일본은 19세기말부터 한국 침략을 정당화하는 정한론의 이론적 근거를 위해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사료적 가치를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일본서기”의 서술 자체가 근대 일본 제국주의 침략이론과 상통함을 발견하고, 이에 장애가 되는 것은 모두 계획적, 조직적으로 파괴·말살하려고 했다. 그 목표가 됐던 것이 바로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이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은 1894년 나카 미치요(那珂通世)의 “조선고사고”에서 처음 주장됐고, 이후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에 의해 이른바 ‘문헌고증학적 방법론’이란 미명 하에 확산됐다. 쓰다는 일본의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일본부'가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자,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가짜로 몰았다. 이런 황당한 방법은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상투적인 수법이기 때문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것은 역사학이 아니라 제국주의 침략 이론일 뿐이기 때문이다. 일제의 식민사학자들이 “일본서기”의 상당 부분이 조작됐다는 것을 시인하면서도 유독 ‘신공황후 삼한정벌’이나 ‘임나일본부’ 기술만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고수하려고 하는 것도 바로 제국주의 침략 사관과 상통하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봤듯이 “일본서기”는 누구나 아는 대로 왜곡과 허구가 심한 역사서다. “일본서기”는 특히 고대 일본과 고구려, 백제, 신라의 관계를 크게 왜곡했다. 뿐만 아니라 연대까지 조작했기 때문에 정상적인 역사서라고 보기 어렵다. 더 큰 문제는 이를 합리적, 객관적으로 연구해서 사실을 규명해야 할 한국 학자들이 광복 후 70년 넘도록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을 여전히 추종하고 있다는 현실이다. 이병도를 필두로 하는 이른바 한국의 주류 사학계에서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왜곡시킨 한국 고대사 및 고대 한일관계사를 거의 그대로 추론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사학자로서 역사관이나 학문에 대한 기본 자세가 결여됐기 때문에 신랄하게 비판받아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