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과 공평사이
6개월 후, 2026년 6월.
청년고용촉진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진우와 소희의 제안이 대폭 반영되었다. 완벽하지는 않았다. 협상 과정에서 일부는 수정되고 삭제되었다. 하지만 핵심은 살아남았다.
공정과 공평의 이중 트랙.
진우는 부원장이 되었다. 소희는 새로 신설된 '사회형평성연구실' 실장이 되었다. 같은 층에서 일했다.
어느 오후, 진우가 소희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커피 한잔 할까요?"
"좋아요."
건물 옆 카페. 6개월 전 공청회가 열렸던 컨퍼런스홀이 보이는 자리.
"1분기 통계 나왔어요." 소희가 말했다. "청년 고용률이 2.3% 올랐대요. 비수도권 출신 비율도 소폭 증가했고요."
"아직 초기 단계니까요. 더 지켜봐야죠."
"하지만 방향은 맞는 것 같아요. 기업 반발도 예상보다 적고요."
"인센티브가 효과가 있었나 봐요. 채찍보다 당근이."
"당신 말이 맞았네요. 실용적이어야 한다고."
"당신 말도 맞았어요. 용기가 필요하다고."
두 사람은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6월의 햇살이 광화문 광장을 비췄다. 은행나무는 푸른 잎으로 가득했다.
"진우 씨." 소희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우리가 만든 정책이 정말 옳은 건가요? 가끔 확신이 안 서요."
진우는 잠시 생각했다.
"옳다는 게 뭘까요? 완벽하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최선을 다했다는 뜻일까요?"
"글쎄요."
"저는 이제 알 것 같아요. 정의는 완성이 아니라 추구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우리는 답을 찾은 게 아니라 답을 찾아가는 방법을 배운 거예요."
"그 방법이 뭔데요?"
"대화예요.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적대하지 않고 대화하는 것. 당신과 내가 그랬던 것처럼."
소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우리는 처음에 서로를 적으로 봤죠. 공정과 공평을 양립할 수 없는 가치로 생각했고요."
"하지만 그건 틀렸어요. 둘은 양립할 수 있어요. 아니, 양립해야 해요. 공정은 절차의 투명성이고 공평은 결과의 정의로움이에요. 둘 다 필요해요."
"그리고 그 균형점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죠. 때로는 공정을 더 강조하고 때로는 공평을 더 추구하고. 그게 살아있는 정책이에요."
그날 저녁, 진우는 집에 돌아와 지영과 저녁을 먹었다.
"당신, 많이 변했어." 지영이 말했다. "예전 같으면 자기 주장만 고집했을 텐데. 이제는 다른 의견도 경청하는 것 같아."
"소희 실장 덕분이야. 그 사람이 가르쳐줬어. 데이터 뒤에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완벽한 정책은 없지만 더 나은 정책을 향해 계속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그 사람도 당신한테 배웠을 거야. 이상만으로는 부족하고 현실적인 실행 방안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서로의 거울이었던 것 같아. 나는 공정만 보고 있었고 소희는 공평만 보고 있었어. 하지만 진짜 정의는 둘을 함께 봐야 한다는 걸 우리는 서로를 통해 배웠어."
같은 시각, 소희는 원룸에서 부산의 부모님과 영상통화를 했다.
"딸, 뉴스 봤다. 네가 만든 법이라며?" 아버지의 목소리에 자부심이 묻었다.
"제가 혼자 만든 게 아니에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만든 거예요."
"그래도 우리 딸이 대단해. 서울대 나와서 나라 일 하고."
"엄마, 울지 마세요. 저 괜찮아요."
"알아. 네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신문배달하며 공부하고 밤새우고."
"그 경험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는 거예요. 저는 운이 좋았어요. 힘들었지만 기회는 있었어요. 하지만 기회조차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아요. 그들을 위해 일하고 싶어요."
"딸, 너무 무리하지 마라. 세상을 다 바꿀 수는 없어."
"알아요, 아빠. 하지만 조금씩은 바꿀 수 있어요. 그리고 저는 이제 혼자가 아니에요. 함께 일할 동료들이 있어요."
전화를 끊은 소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서울의 밤은 여전히 밝았다. 수많은 불빛이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1년 후, 2027년 6월.
공공정책연구원은 '청년고용촉진법 시행 1주년 평가 보고회'를 개최했다. 진우와 소희가 공동 발표자로 나섰다.
"지난 1년간의 성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진우가 그래프를 보여주었다. "청년 고용률은 4.7% 상승했습니다. 특히 비수도권 청년 고용률은 6.2% 증가하여 수도권과의 격차가 줄어들었습니다. 전문대 및 고졸 청년의 취업률도 3.8% 개선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소희가 이어받았다. "장애 청년의 고용률은 1.2% 증가에 그쳤고, 경력단절 청년 여성의 재취업률은 목표치에 미달했습니다. 중소기업과 대기업 간의 청년 고용 격차는 여전히 큽니다."
"따라서 우리는 2단계 개정안을 제안합니다." 진우가 말했다. "장애 청년과 경력단절 청년을 위한 별도의 지원 프로그램, 중소기업을 위한 인센티브 확대, 그리고 지역별 맞춤형 정책입니다."
"정책은 끊임없이 진화해야 합니다." 소희가 강조했다. "우리는 1년 전에 완벽한 해답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옳은 방향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한 걸음씩 나아갈 것입니다."
청중석에서 박수가 터졌다. 그 안에는 1년 전 세종시 포럼에 참여했던 청년들도 있었다.
발표가 끝난 후, 김민수가 진우와 소희에게 다가왔다.
"저 기억하세요? 1년 전 세종시에서."
"물론이죠. 민수 씨,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소희가 반갑게 맞았다.
"저, 취업했어요. 부산에 있는 IT 중소기업인데, 청년고용촉진법 덕분에 기회를 얻었어요. 회사가 비수도권 청년을 채용하면 세제 혜택을 받는다고 하더라고요."
"축하해요!" 진우가 악수를 청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에요. 면접 볼 때 회사에서 제 능력을 정말 공정하게 평가해줬어요. 출신 대학은 묻지도 않았고요. 블라인드 채용 덕분이었죠. 그리고 최종 합격할 때 인사담당자가 말했어요. '우리는 다양한 배경의 인재를 원한다'고. 그 말이 제게 큰 힘이 됐어요."
"민수 씨의 능력으로 합격한 거예요." 소희가 진심으로 말했다. "제도는 기회를 열어줬을 뿐, 그 문을 통과한 건 민수 씨 자신이에요."
민수는 고개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했다.
박지원도 다가왔다.
"저도 근황을 전하고 싶어요. 저는 대기업에 입사했는데요, 신입사원 교육 때 다양한 배경의 동기들을 만났어요. 지방대 출신, 전문대 출신, 고졸 출신.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같이 일하다 보니 배울 게 정말 많더라고요."
"어떤 걸 배우셨어요?" 진우가 물었다.
"제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게, 사실은 특권이었다는 걸요. 그리고 능력이란 게 하나의 잣대로 측정할 수 없다는 것도요. 어떤 동기는 학점은 낮았지만 현장 감각이 뛰어났고, 어떤 동기는 스펙은 부족했지만 문제해결 능력이 탁월했어요. 다양성이 조직을 더 강하게 만든다는 걸 몸소 느꼈어요."
진우와 소희는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보고회가 끝난 후, 두 사람은 익숙한 카페로 갔다.
"1년이 지났네요." 소희가 감회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1년 전 우리는 서로 싸우고 있었죠." 진우가 웃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도 해요. 우리는 같은 목표를 향해 가고 있었는데, 서로 다른 길에 서 있다고 생각했죠."
"사실 길은 하나가 아니었어요. 공정이라는 길도 있고, 공평이라는 길도 있고. 우리는 그 두 길을 함께 가야 한다는 걸 배웠죠."
"그리고 그 두 길이 만나는 지점에 정의가 있다는 것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계속 나아가고 있어요. 그게 중요한 것 같아요."
두 사람은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광화문 광장에는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청년도 있고, 노인도 있었다. 정장을 입은 직장인도 있고, 캐주얼한 옷의 학생도 있었다. 모두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진우 씨, 우리가 하는 일이 의미 있을까요? 정책 하나로 세상이 바뀔까요?" 소희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불안이 섞여 있었다.
"바로 바뀌지는 않겠죠." 진우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조금씩은 바뀔 거예요. 민수 씨처럼 기회를 얻는 사람이 하나둘 생기고, 지원 씨처럼 다양성의 가치를 깨닫는 사람이 늘어나면요. 그게 쌓여서 언젠가는 더 나은 사회가 되지 않을까요?"
"낙관주의자가 되셨네요." 소희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당신 덕분이에요. 당신이 희망을 버리지 않았으니까, 나도 버리지 않게 됐어요."
"저도 당신 덕분에 현실주의자가 됐어요. 이상만으로는 안 되고, 실행 가능한 방법이 필요하다는 걸 배웠죠."
두 사람은 웃었다. 그리고 커피잔을 들어 가볍게 부딪쳤다.
"공정과 공평에."
"그리고 그 사이의 균형에."
에필로그
2030년 봄.
대한민국의 청년 고용률은 OECD 평균을 넘어섰다. 지역 간, 학력 간 격차도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물론 여전히 문제는 있었다. 새로운 형태의 불평등이 나타났고, 예상치 못한 부작용도 생겼다. 하지만 사회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계속 대화했다.
공공정책연구원은 이제 '정의연구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진우는 원장이 되었고, 소희는 부원장이 되었다. 두 사람은 여전히 토론했다. 때로는 격렬하게, 때로는 조용하게. 하지만 이제 그들은 알았다. 의견이 다르다는 것이 적이라는 뜻은 아니라는 것을. 서로 다른 관점이 함께 할 때, 더 나은 해답에 가까워진다는 것을.
어느 봄날 오후, 진우와 소희는 연구원 옥상 정원에 올라갔다. 서울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남산타워, 한강, 그리고 수많은 건물들.
"저 안에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겠죠." 소희가 말했다. "각자의 꿈을 가지고, 각자의 어려움을 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에요." 진우가 말했다. "모든 불평등을 없앨 수는 없어요.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죠."
"하지만 우리는 할 수 있어요." 소희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씩 더 나아질 수 있어요.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완벽하지는 않아도, 더 나은 방향으로."
"공정과 공평." 진우가 중얼거렸다. "이 두 가치는 평생 우리를 따라다닐 거예요. 끊임없는 긴장 관계 속에서."
"그리고 그 긴장이 우리를 나아가게 하죠. 긴장이 없으면 정체되니까."
두 사람은 한동안 침묵 속에서 서울을 바라보았다. 봄바람이 불어왔다. 연구원 정원의 벚꽃이 흩날렸다. 꽃잎들은 공중에서 춤추듯 흔들리다가, 천천히 땅으로 내려앉았다.
"진우 씨, 우리, 잘하고 있는 거죠?"
"글쎄요. 확신할 수는 없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건 확실해요. 그리고 계속 배우고 있다는 것도요. 그게 중요한 거 아닐까요?"
"맞아요. 배움을 멈추지 않는 것. 대화를 이어가는 것. 서로 다른 생각을 존중하는 것. 그게 바로 살아있는 민주주의죠."
두 사람은 다시 서울을 바라보았다. 저 아래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취업에 성공해 기뻐하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여전히 기회를 찾지 못해 좌절하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불공정하다고 외치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불공평하다고 항변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목소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 바로 사회였다.
완벽하지 않지만 계속 나아가는.
때로 비틀거리지만 멈추지 않는.
공정과 공평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 애쓰는.
바로 우리의 사회.
진우와 소희는 연구원으로 돌아갔다. 그들에게는 아직 할 일이 많았다. 다음 정책을 준비해야 했고, 새로운 불평등에 대응해야 했고, 끊임없이 사회와 대화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혼자가 아니었다. 함께 고민하는 동료가 있었고, 다른 관점을 존중하는 법을 알았고, 완벽하지 않아도 계속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저울 위의 도시, 서울.
그 저울의 한쪽에는 공정이, 다른 쪽에는 공평이 놓여 있었다.
저울은 끊임없이 흔들렸다. 때로는 한쪽으로, 때로는 다른 쪽으로.
하지만 그 흔들림 속에서, 우리는 균형을 찾아가고 있었다.
완벽한 균형은 아니어도.
조금씩 나아지는 균형.
그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하는 정의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