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봄날의 햇살이 마루 끝까지 스며들던 오후였다.
"어머니, 진달래가 피었어요."
스물여덟 살 딸 수연이 뜰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붉은 꽃잎들이 바람에 흩날리며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 위로 떨어졌다. 어머니 정숙은 부엌에서 나물을 다듬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딸의 모습이 햇살(陽光) 속에서 환하게 빛났다.
"벌써 그런 계절(季節)이구나."
정숙은 작은 한숨과 함께 미소 지었다. 세월(歲月)은 어김없이 흘러 딸아이는 이제 출가(出嫁)를 앞두고 있었다. 다음 달이면 이 집을 떠나 새로운 보금자리를 꾸릴 터였다. 그 생각만으로도 가슴 한편이 시리도록 아렸다.
"수연아, 저녁 준비(準備) 도와줄래?"
"네, 어머니."
수연이 마루로 올라섰다. 그녀의 발소리는 언제나 경쾌했다. 어린 시절부터 이 집의 마루를 뛰어다니며 자란 딸. 그 작은 발이 이제는 어엿한 여인의 발걸음이 되어 있었다.
부엌에서 모녀(母女)는 나란히 서서 저녁을 준비했다. 정숙이 된장찌개를 끓이는 동안 수연은 시금치를 데치고 무를 썰었다. 칼질 소리, 물 끓는 소리,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 소리가 부엌을 채웠다.
"어머니, 제가 시집가면 이렇게 함께 음식 만들 일이 없겠죠?"
수연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묻어났다.
"주말마다 오면 되지. 친정(親庭)은 언제나 네가 돌아올 곳이란다."
정숙은 딸의 어깨를 토닥였다. 손끝에 전해지는 따스함이 눈물겹도록 소중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 무렵, 아버지 진수가 퇴근(退勤)했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수연이 달려나갔다.
"아버지!"
"우리 딸, 오늘도 예쁘구나."
진수는 서류가방을 내려놓고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십을 훌쩍 넘긴 그의 손은 거칠었지만 그 안에 담긴 사랑(愛)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삼십 년을 회사(會社)에 다니며 가족(家族)을 위해 살아온 평범한 가장(家長)이었다.
저녁상이 차려졌다. 네 식구가 둘러앉았다. 막내아들 민준이 마지막으로 자리에 앉았다. 고등학교 3학년인 열여덟 살 소년은 수험생(受驗生)의 피곤함이 얼굴에 역력했다.
"민준아, 오늘 학교(學校)는 어땠니?"
어머니가 물었다.
"그냥 그랬어요. 모의고사(模擬考査) 결과가 나왔는데 수학(數學)이 좀 아쉬웠어요."
"괜찮아, 아직 시간(時間) 있잖니."
누나 수연이 동생의 등을 두드렸다. 민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밥을 떴다.
식탁 위로 햇살이 마지막 빛을 흘렸다. 금빛(金빛) 물결이 된장찌개 그릇에 반짝였다. 정숙은 가족들의 얼굴을 하나씩 바라보았다. 남편의 주름진 이마, 딸의 생기발랄한 미소, 아들의 진지한 눈빛. 이 모든 것이 그녀의 삶(生)이었고 행복(幸福)이었다.
저녁 식사(食事)를 마치고 설거지를 하는데 민준이 거실에서 기타를 꺼냈다. 서툰 손가락으로 줄을 튕기는 소리가 집안에 퍼졌다.
" 그 노래 나도 좋아해!"
수연이 소리쳤다.
민준은 쑥스럽게 웃으며 계속 연주했다. 진수는 소파에 앉아 신문(新聞)을 펼쳤지만 사실은 아들의 연주를 듣고 있었다. 부엌에서 정숙은 설거지를 하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밤이 깊어갔다. 하늘에 달이 떠올랐다. 은은한 달빛(月光)이 창문을 통해 거실로 스며들었다. 수연은 창가에 서서 달을 바라보았다.
"어머니, 달이 참 밝아요."
"그러네. 보름달이구나."
정숙이 딸 옆에 섰다. 모녀는 나란히 서서 달을 바라보았다. 하얀 달빛이 두 사람의 얼굴을 비췄다.
"어머니, 제가 이 집을 떠나도 이 달은 똑같이 뜰 거죠?"
"그럼, 어디서든 같은 달을 보는 거야. 그러니 외로울 때는 달을 보렴. 어머니도 같은 달을 보고 있을 테니까."
수연이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두 사람의 손이 달빛 속에서 겹쳐졌다. 세월은 흘러도 이 온기(溫氣)만은 영원(永遠)히 기억(記憶)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