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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끌림의 계절 (2)

서연의 일주일

by seungbum lee

사무실로 돌아온 서연은 숨을 고르기도 전에 프로젝트 폴더를 열었다.

독일 바이어 미팅까지—단 일주일.

시간은 빠듯했지만, 마음은 이상하리만큼 가벼웠다. 마치 속을 짓누르던 돌덩이가 막 치워진 듯했다.

“서연아, 부장님이 뭐래?”

수진이 커피잔을 쥔 손으로 서연의 책상에 기대며 물었다.

서연은 잠시 망설인 뒤, 솔직하게 말했다.

“다음 주 바이어 미팅… 내가 맡게 됐어.”

“뭐? 정말?”

수진의 얼굴에는 놀람이 스쳤고, 곧 부러움과 서운함이 엷게 뒤섞여 번졌다.

그 감정을 서연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근데 수진 언니.”

서연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지난번에 정리한 유럽 시장 트렌드 자료 있잖아요? 그거… 참고해도 될까? 아니면 조금 업데이트해서 줄 수 있어요?”

수진의 표정이 서서히 풀렸다. 누그러진 눈빛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 그래. 필요하면 해줄게.”

“정말 고마워요. 언니 자료 보면서 진짜 많이 배웠어요.”

그 말은 가식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수진의 입가가 아주 작게, 거의 눈치채기 어려울 정도로 올라갔다.

잠시 뒤 민준도 다가왔다.

“서연 씨, 축하해요. 제가 도울 일 있으면 말해요.”

언제나처럼 밝고 단단한 목소리였다.

“민준 씨, 데이터 시각화 좀 도와줄래요?”

서연이 눈을 맞추며 말했다.

“숫자를 정리하는 건 제가 할게요. 근데… 민준 씨 손을 거치면 완전히 달라지잖아요.”

민준은 살짝 웃었다.

“그건 영광이죠. 같이 해요.”

그때 재희 선배가 지나가며 말했다.

“서연 씨, 대단하네. 근데… 독일 바이어들 까다롭다던데? 괜찮겠어?”

말투는 걱정 같았지만, 의도는 섞여 있었다.

서연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선배님, 혹시 계약서 초안 검토 좀 봐주실 수 있으세요?”

재희가 걸음을 멈췄다.

“법무팀이 따로 있지 않아?”

“물론 알죠.”

서연은 자연스럽게 이어 말했다.

“근데 선배님이 먼저 봐주시면 법무팀 수정도 줄어들고… 선배님이 그런 부분 제일 잘 아시잖아요.”

재희의 표정에 얇게 균열이 생겼다.

기분 나쁘지 않은 놀라움이 스며든 듯했다.

“…그럼, 한 번 봐줄게.”

그렇게 서연의 일주일이 시작됐다.

새벽 여섯 시 출근, 밤 열 시 퇴근.

책상 위 커피 잔은 하루에 세 번씩 바뀌었고,

창밖 도시의 불빛은 어느새 서연의 일정과 호흡을 맞추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지치지 않았다.

하루가 끝날 때마다 제안서가 조금씩 완성되는 모습을 보는 즐거움이, 피로를 대신 채웠다.

수진은 유럽 시장분석 자료를 새롭게 정리해 건넸다.

이전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깊었다.

“언니… 이걸 언제 이렇게 했어요? 대단해요.”

서연이 감탄하자, 수진은 시선을 잠시 피했다.

“그냥… 너 혼자 고생하는 것 같아서. 우리 팀 프로젝트잖아.”

민준은 서연이 뽑아놓은 데이터를

색·구도·스토리 라인을 살려 인포그래픽으로 재탄생시켰다.

딱딱한 숫자들이 살아 움직였고, 의미는 흐름이 생겼다.

“민준 씨, 이거 예술이에요.”

“과찬이에요. 내용이 탄탄해서 제가 편했어요.”

재희는 계약서 초안을 세 장에 걸쳐 꼼꼼하게 수정했다.

단어 한 개, 조항 하나까지.

“여기, 이렇게 바꿔야 분쟁 소지 없어.”

“선배님 진짜 감사해요. 덕분에 큰 수정은 줄었어요.”

“뭐… 이 정도야.”

말투는 툭툭했지만, 그 속은 이미 다른 온도로 데워져 있었다.

목요일 밤, 회의실.

조명이 깊게 내려앉은 공간에서 서연은 발표 리허설을 했다.

민준은 타이밍을 재고,

수진은 예상 질문을 정리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재희는 팔짱을 끼고 흐름을 지켜보았다.

“여기 부분 강조해.”

“이 슬라이드는 잠깐 멈추고 넘어가면 더 임팩트 있어.”

“질문 나오면 이 방향으로 유도하면 돼.”

정리해 보니 밤 11시.

서연은 심호흡 후 팀원들을 바라보았다.

“정말… 고마워요. 이거 혼자였으면 절대 못 했을 거예요.”

수진이 웃었다.

“우리 팀이잖아. 당연한 거지.”

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연 씨가 역할을 잘 나눠줘서 그래요. 덕분에 저희도 배운 게 많아요.”

재희가 가방을 메며 조용히 말했다.

“내일… 잘해. 우린 너 믿어.”

그 말이,

의외로 서연의 가슴 깊은 곳을 정확히 건드렸다.

그제야 깨달았다.

만약 이 프로젝트를 ‘나 혼자’ 완벽히 해내려 했다면—

그건 분명 시달림이 되었을 것이다.

남의 시선, 평가, 인정 욕구에 짓눌린 채

또다시 외줄을 걷듯 애써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함께 만드는 일주일이었다.

서로의 강점을 믿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한 사람의 성과가 아니라 팀의 성장을 바라보는 시간.

그것은 시달림이 아니라,

분명히—

누군가와 무엇인가에 자연스레 끌리는 이끌림의 순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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