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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끌림의 계절(1)

입사 2년 차

by seungbum lee

유리창 너머로 사월의 햇살이 가볍게 흩어지던 아침이었다.
서연은 회사 로비의 거대한 유리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단정히 묶인 머리, 절제된 메이크업, 네이비 재킷 위로 떨어지는 은은한 빛.
입사 2년 차. 스물여덟.
그녀는 매일 이 자리에서 묘한 떨림을 느꼈다. 마치 하루의 첫 장면이 막 열린 스크린 앞에 서 있는 배우처럼.
“서연 씨, 어제 프레젠테이션… 정말 멋졌어요.”
엘리베이터 앞에서 민준이 환하게 웃었다. 그의 눈빛에는 꾸밈이 없었다.
“고마워요.”
그녀는 짧게 웃으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3분기 실적 분석, 어떻게 그 디테일이 나오는 거예요? 저는 숫자만 보면 머리가 아픈데.”
“민준 씨 템플릿 덕분이죠. 자료가 눈에 잘 들어오게 정리돼서요.”
서연이 답하려던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사무실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재희 선배가 커피를 들고 지나가며 툭 내뱉었다.
“그래도 서연 씨가 발표하니까 클라이언트들이 집중하더라. 비주얼은 무시 못하지~”
가벼운 농담처럼 흘려놓았지만, 그 뒤에 숨어 있던 가시는 분명했다.
서연의 발걸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
민준이 곁눈질로 재희를 짧게 노려봤지만, 그녀는 이미 자리로 돌아간 뒤였다.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는 동안도 서연의 머릿속엔 재희의 말이 계속 남았다.
예쁘다는 말과 똑똑하다는 말 사이.
그 중간에 걸린 채, 늘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삶.
그 경계선 위에서 서연은 종종 외줄을 걷는 기분이었다.
점심시간, 여직원 휴게실.
커피 머신 위에서 김이 피어오르는 가운데 수진이 다가왔다.
“서연아, 너 요즘 김 부장님한테 찍힌 것 같던데?”
“찍혀? 왜?”
“아침 회의 때 자꾸 너한테만 의견 물어보시더라. 부장님 성격 알잖아. 조심해.”
수진의 말투에는 걱정과, 아주 얇게 깔린 질투가 섞여 있었다.
서연은 웃으며 넘겼지만, 마음 어딘가가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오후 세 시.
메신저 알림 하나가 화면 우측에 조용히 떠올랐다.
‘서연 씨, 잠깐 부장실로 올 수 있을까요?’
심장이 조금 빨라졌다.
혹시 보고서에 오류라도 있었던 걸까.
노트북과 수첩을 챙겨 든 서연은 조심스럽게 부장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책상 위엔 정돈된 서류더미, 김 부장은 안경을 벗어 들고 있었다.
그는 서연에게 자리를 권하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다음 주 수요일, 독일 바이어들이 방한합니다. 신제품 라인에 관심이 많더군요.”
“네, 들었습니다.”
“이번 미팅을… 자네가 주도했으면 해.”
서연은 숨이 멎는 듯했다.
해외 바이어 미팅은 보통 과장급이 맡는 사안이었다.
대리 2년 차인 자신에게 온 건, 말 그대로 파격.
“저를… 믿으시는 건가요?”
“믿음이라기보단 확신이지.”
그는 얇게 웃으며 서류 한 장을 건넸다.
“지난 분기 자네 보고서, 아주 좋았어. 경쟁사 전략 분석, 소비자 트렌드, 가격 정책까지. 자네 정도면 충분히 할 수 있어.”
서연은 조심스레 서류를 받았다.
“일주일 안에 제안서 만들어봐. 팀원들과 협력하면 될 거야.”
“감사합니다, 부장님.”
일어서려는 순간, 김 부장이 그녀를 다시 불렀다.
“서연 씨.”
그녀가 돌아보자, 그는 창밖을 바라보며 잠시 말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회사라는 곳은 잡음이 많아. 특히 눈에 띄는 사람한테는 더 그렇지.”
서연의 눈이 흔들렸다.
“내가 보기엔… 자네는 외모 때문에 오히려 손해를 보고 있어. 실력보다 외모를 먼저 보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하지만 말이야.”
그는 안경을 내려놓고 서연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남들 시선에 끌려 다니지 마. 자네 기준에 이끌려. 실력은 숨길 수가 없어. 결국 드러나게 돼 있어.”
잠시 정적이 흘렀다.
부장실에는 오후의 햇빛이 천천히 기울어드는 중이었다.
“자네라면 충분히 할 수 있어. 그러니 당당하게 해 봐.”
문을 닫고 나오자, 서연의 가슴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말은 칭찬을 넘어, 오래 눌려 있던 마음의 매듭을 천천히 풀어내는 힘이었다.
서연은 처음으로, 자신이 누군가에게 실력으로 온전히 ‘보였다’는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봄 햇살 속에서 마음 한편이 아득하게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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