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아침
금요일 아침
금요일 아침, 사무실의 공기는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지 않은 듯 고요했다.
형광등 아래로 가늘게 먼지가 흘러내리고, 프린터의 기계음조차 느리게 울렸다.
서연은 그 적막을 뚫고 누구보다 먼저 자리에 앉았다.
커피 한 모금, 깊은숨 한 번.
그리고 발표 파일을 열었다.
마지막 점검, 마지막 한 번의 반복.
예상 질문과 답변이 머릿속에서 천천히 선을 맞춰가고 있었다.
잠시 뒤, 김 부장이 출근하며 그녀의 자리 앞에 멈춰 섰다.
“준비는 됐나?”
서연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며 고개를 들었다.
“네. 최선을 다했습니다.”
“좋아.”
김 부장은 팔짱을 풀고 잠시 시선을 바닥에 두었다가,
어떤 결심이 담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결과가 어떻든, 이번 경험은 자네한테 큰 자산이 될 거야.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
그 한 줄의 격려는 간단했지만, 묵직했다.
서연은 숨을 다시 고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부장님.”
오후 두 시.
회의실 문이 닫히며 공기가 바뀌었다.
독일 바이어 세 명—중년 남성 두 명, 여성 한 명—정확한 눈빛과 치밀한 질문으로 유명한 이들이었다.
첫 질문부터 예리했다.
“Your market analysis is interesting, but how do you differentiate from Chinese competitors?”
칼끝 같은 발언.
하지만 서연은 흔들리지 않았다.
수진이 정리한 시장분석,
민준이 디자인한 인포그래픽,
재희가 다듬은 계약 조건—
그 모든 조각들이 한 화면에 맞춰 떠올랐다.
“Our strength lies not just in price competitiveness, but in customization capability and after-service system. As you can see from this data…”
말을 이어가자 바이어 중 한 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옆 사람에게 조용히 말했다.
눈빛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서연은 작은 신호를 놓치지 않았다.
한 시간 반.
자료 설명, 질문, 답변.
어렵고 깊은 질문들이 이어졌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마침내 바이어들이 서로 짧은 대화를 나눈 후 말을 꺼냈다.
“Ms. Seo, we are impressed.
We’d like to proceed with the next step.”
그 순간, 회의실의 공기가 달라졌다.
긴장과 집중이 서서히 풀렸다.
문을 나서자 복도 끝에서 팀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연이 엄지를 들어 올리는 순간—
환호가 터졌다.
“서연아, 어땠어?”
“다음 단계로 넘어간대!”
수진이 먼저 달려와 껴안았다.
“진짜? 대박이다!”
민준은 손바닥을 들며 말했다.
“하이파이브 한 번 해야죠!”
살짝 세게 부딪힌 손바닥에 성취감이 번졌다.
재희도 웃음이 번진 얼굴로 말했다.
“역시 잘하더라. 질문받을 때 당황도 안 하고. 인정.”
마지막으로 김 부장이 다가왔다.
미소가 천천히 번지는 얼굴이었다.
“수고했네, 모두들. 오늘 저녁은 내가 쏘지. 회식하자고.”
저녁. 조용한 이탈리안 레스토랑.
따뜻한 조명 아래 와인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음식의 향과 팀원들의 웃음이 어우러져
오랜만에 마음이 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김 부장이 잔을 들어 올렸다.
“이번 성과는 서연 씨 혼자만의 것이 아니지.
수진 씨의 시장분석,
민준 씨의 디자인,
재희 씨의 법률 검토—
모두가 만든 결과야.”
그는 잠시 잔을 내리고 서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서연 씨가 팀을 이끈 방식,
그게 리더십이야.
혼자 잘하려 하지 않고,
각자의 강점을 끌어내고 함께 가려고 한 것.
그게 진짜 능력이지.”
수진이 장난스럽게 어깨를 톡 쳤다.
“처음엔 너 혼자 다 할 줄 알았는데,
도움 요청해서 좀 놀랐다?
근데 그게 좋았어. 같이 한다는 느낌.”
민준도 미소를 띠며 말했다.
“서연 씨는 경쟁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연결하는 사람이에요. 그게 실력이죠.”
재희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신 뒤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사실… 처음엔 네가 얼굴로 밀어붙이는 줄 알았어. 미안.”
서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저도 그런 시선이 있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더 증명하려 했던 것 같아요.”
잠시 잔이 테이블에 내려앉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더 깊어졌다.
“근데 이번에 알았어요.
증명하려고 하면 시달리게 된다는 거.
남의 평가에, 편견에, 기대에…
자꾸 끌려다니더라고요.”
조용해진 테이블을 가로질러 서연의 말이 이어졌다.
“근데 진심으로 배우고 싶고,
같이 성장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하니까
이상하게… 이끌렸어요.
시달림이 아니라 이끌림으로 바뀌었어요.”
김 부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한 말이야. 시달림과 이끌림.
같은 일을 해도 마음의 방향이 달라지면
경험이 완전히 달라지지.”
식사가 끝나고
팀원들과 각자 밤거리를 향해 걸어 나갈 때,
서연의 마음은 이상할 만큼 뿌듯했다.
프로젝트를 성공시켜서가 아니라—
그 과정을 함께 견딘 사람들이
곁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과보다 깊고,
성과보다 오래가는 온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