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
에덴을 찾아서
텅 빈 땅
강민준은 서른여섯 살이 되도록 사랑을 믿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사랑을 포기했다.
IT 스타트업의 창업자로서 성공가도를 달리던 그는 모든 것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강남의 펜트하우스, 외제차, 명품 시계. 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늘 혼자였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어머니가 자주 하시던 말씀이었다. 독실한 신자였던 어머니는 일 년 전 돌아가시면서도 아들의 외로움을 걱정하셨다.
"민준아, 하느님께서 네게 맞는 사람을 보내주실 거야. 기다려라."
하지만 민준은 기다림에 지쳐 있었다.
대학 시절 사귀던 여자친구는 그가 사업에 실패했을 때 떠났다. 그 후로 만난 여자들은 그의 돈과 지위만 보았다. 진심을 나눈 적이 없었다.
"사랑 같은 건 없어. 그냥 거래일 뿐이야."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하며 살았다.
어느 봄날 아침, 민준은 이상한 꿈을 꾸었다.
넓은 들판이었다. 아직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땅. 하지만 안개가 땅을 적시고 있었다. 그 안갯속에서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민준아."
따뜻한 목소리였다. 하느님의 목소리 같았다.
"너는 아직 텅 비어 있구나. 일굴 사람이 없는 땅처럼."
민준은 그 꿈에서 깨어나 땀을 흘리고 있었다.
휴대폰을 확인했다. 새벽 4시.
잠을 이룰 수 없어 발코니로 나갔다.
서울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수많은 불빛들. 하지만 그 어떤 불빛도 그의 마음을 밝히지 못했다.
"내 안에 뭐가 있는 거지?"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텅 비어 있는 것 같을까?"
그날, 민준은 충동적으로 결정했다. 회사 일을 부사장에게 맡기고, 혼자 여행을 떠나기로.
"어디로 가시려고요?"
비서가 물었다.
"몰라. 그냥... 사람 없는 곳. 조용한 곳."
생명의 숨결
민준이 도착한 곳은 제주도의 작은 마을이었다.
관광지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가 보이는 조용한 마을. 민박집을 운영하는 할머니가 그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서울서 왔어요? 쉬러 왔구먼."
"네. 좀 조용한 곳이 필요해서요."
민박집은 단순했다. 방 하나, 마당에는 작은 텃밭. 하지만 이상하게 평화로웠다.
다음 날 아침, 민준은 마당에서 할머니가 땅을 일구는 것을 보았다.
"할머니, 뭐 심으세요?"
"토마토랑 상추. 손님들 먹이려고."
할머니는 능숙하게 호미로 땅을 팠다.
"이 땅도 처음엔 돌투성이었어. 몇 년을 일궜지. 돌 빼내고, 거름 주고, 물 주고. 그랬더니 이렇게 됐어."
민준은 할머니의 손을 보았다. 주름지고 거친 손. 하지만 그 손으로 만들어진 땅은 생명으로 가득했다.
"땅도 사람이 일궈줘야 해. 혼자서는 아무것도 안 돼.".
할머니의 말이 마음에 꽂혔다.
그날 저녁, 민준은 마을 성당에 갔다.
작은 성당이었다. 신자가 열 명도 안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신부님은 정성스럽게 미사를 들이고 계셨다.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독서 말씀이었다. 창세기.
민준은 그 말씀에 집중했다.
흙의 먼지로 빚은 사람. 생명의 숨.
'나도 흙먼지에 불과한데... 내가 왜 이렇게 교만했을까?'
미사가 끝나고, 신부님이 민준에게 다가왔다.
"처음 보는 얼굴이네요. 여행 오셨나요?"
"네, 신부님. 서울에서 왔습니다."
"힘든 일 있으세요? 얼굴에 쓰여 있네요."
민준은 잠시 망설이다 고백했다.
"외로워요. 모든 걸 가진 것 같은데, 뭔가 텅 비어 있어요."
신부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셨죠.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우리는 혼자 살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어요. 하느님의 숨결을 받았지만, 그 숨결을 나눌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찾나요?"
"찾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겁니다. 하느님께서 만들어주시죠."
민준은 그날 밤 오랜만에 기도했다.
"하느님, 제가 무엇을 잃어버린 건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애초에 가진 적이 없는 건지도. 제 안에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소서."
에덴의 만남
다음 날, 민준은 바닷가를 걷고 있었다.
파도 소리, 갈매기 울음소리.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그때 저 멀리서 한 여자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화폭과 물감을 들고 있었다. 바다를 그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민준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먼저 미소 지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여행 오셨어요?"
"네. 당신도요?"
"저는... 여기 살아요. 일 년째."
그녀의 이름은 윤서연이었다.
서울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번아웃이 와서 제주도로 내려왔다고 했다. 이곳에서 그림을 그리며 살고 있다고.
"외롭지 않으세요?"
민준이 물었다.
"처음엔 외로웠어요. 그런데 이곳에 오니까, 혼자라는 게 외로움이 아니라 고요함이더라고요. 제 안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어요."
"무슨 소리요?"
"하느님의 소리요."
서연은 웃으며 말했다.
"이상하게 들리죠? 근데 진짜예요. 여기서 처음으로 기도하는 법을 배웠어요."
그날부터 민준과 서연은 자주 만났다.
함께 바닷가를 걷고, 할머니의 텃밭을 일궜다. 서연은 민준에게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쳐줬고, 민준은 서연에게 코딩의 즐거움을 이야기했다.
"신기해요."
어느 날 서연이 말했다.
"당신과 있으면 외롭지 않아요. 고요함이 외로움으로 변하지 않아요."
민준도 같은 것을 느꼈다.
"저도요. 처음으로... 누군가와 진짜로 연결된 것 같아요."
일주일이 지났다.
민준은 서울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마음이 무거웠다.
"다시 올게요."
그가 서연에게 말했다.
"약속이에요?"
"약속이요."
공항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민준은 창세기 말씀을 떠올렸다.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게 이런 뜻이었구나.'
민준은 깨달았다.
서연은 그에게서 나온 것 같았다. 아니, 그들은 원래 하나였던 것 같았다.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함께 있도록 만드신.
돌아온 에덴
서울로 돌아온 민준은 달라져 있었다.
일은 여전히 바빴지만, 더 이상 일에 매몰되지 않았다.
매일 저녁 서연과 영상통화를 했다.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하루의 피로가 풀렸다.
"언제 다시 내려올 거예요?"
"이번 주말. 기다려요."
민준은 매주 제주도로 내려갔다.
금요일 저녁 비행기를 타고, 일요일 밤에 돌아왔다. 피곤했지만 행복했다.
석 달이 지났다.
민준은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제주도로 본사를 옮기려고 합니다."
이사회에서 발표했다. 임원들이 술렁였다.
"대표님, 무슨..."
"원격 근무 시대입니다. 꼭 서울에 있을 필요는 없죠. 더 나은 환경에서 일하면 생산성도 오를 겁니다."
사실 그것은 핑계였다. 진짜 이유는 서연이었다.
그해 가을, 민준은 제주도로 이사했다.
서연이 사는 마을 근처에 작은 사무실을 얻었다. 직원들 중 몇 명도 함께 내려왔다.
"이제 매일 볼 수 있네요."
서연이 웃으며 말했다.
"그게 목적이었어요."
민준도 솔직하게 말했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함께 텃밭을 일궜다. 토마토와 상추, 고추를 심었다. 처음엔 서툴렀지만, 점점 익숙해졌다.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데려다 에덴동산에 두시어, 그곳을 일구고 돌보게 하셨다."
민준이 땅을 일구며 말했다.
"우리도 에덴을 만들고 있는 것 같아요."
"에덴은 어딘가 먼 곳이 아니에요."
서연이 대답했다.
"하느님과 함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곳이 에덴이에요."
겨울이 왔다.
민준은 서연에게 청혼했다.
바닷가였다. 석양이 지고 있었다. 붉은 노을이 바다를 물들였다.
"서연 씨."
민준이 무릎을 꿇었다.
"저와 결혼해 주시겠어요? 함께 에덴을 만들어요. 하느님께서 주신 이 땅을, 이 삶을 함께 일구고 돌봐요."
서연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네. 그러고 싶어요."
두 사람은 껴안았다.
파도 소리가 축복의 노래처럼 들렸다.
이듬해 봄, 두 사람은 마을 성당에서 결혼했다.
신부님이 말씀하셨다.
"성경은 말합니다.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오늘 민준 씨와 서연 씨가 한 몸이 됩니다."
민준은 서연의 손을 꼭 잡았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성경의 그 구절이 이제야 완전히 이해되었다.
서연은 정말 그에게서 나온 것 같았다. 아니, 그들은 처음부터 하나였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만드셨다.
신혼여행 대신, 두 사람은 집 앞에 작은 정원을 만들었다.
"우리의 에덴이에요."
서연이 말했다.
그들은 보기에 탐스럽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을 심었다. 사과나무, 감나무, 매화나무.
그리고 정원 한가운데에는 특별한 나무를 심었다.
올리브 나무.
"생명나무예요."
민준이 말했다.
"우리의 사랑이 이 나무처럼 오래 살기를 기도해요."
밤이 되었다.
두 사람은 정원에 앉아 별을 보았다.
"민준 씨, 행복해요?"
"네. 너무 행복해서 무서울 정도예요."
"저도요."
서연이 민준의 어깨에 기댔다.
"하느님께서 이 모든 걸 주셨어요. 당신도, 이 집도, 이 정원도."
"그리고 이 평화도."
민준이 덧붙였다.
"사람과 그 아내는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가 성경 구절을 인용했다.
"부끄러움이 없다는 게, 완전한 신뢰를 의미하는 것 같아요. 서로에 대한, 하느님에 대한."
"맞아요. 우리에겐 숨길 게 없어요. 하느님 앞에서도, 서로 앞에서도."
두 사람은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별들이 쏟아질 것 같았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그 별들.
"하느님, 감사합니다."
민준이 기도했다.
"당신께서 저를 위해 에덴을 만들어주셨습니다. 텅 비어 있던 제 땅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게 알맞은 협력자를 주셨습니다."
"함께 이 땅을 일구고 돌보겠습니다."
서연이 이어서 기도했다.
"당신께서 주신 모든 것을 감사히 받고, 당신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그날 밤, 그들의 작은 에덴에는 깊은 평화가 임했다.
하느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그 에덴처럼.
일 년 후.
민준과 서연의 정원은 무성해졌다.
온갖 나무와 꽃들이 자랐다. 토마토와 상추도 풍성했다.
그들은 매일 아침 함께 정원을 돌보았다.
물을 주고, 잡초를 뽑고, 열매를 수확했다.
"우리 정원에 이름을 붙일까요?"
어느 날 서연이 제안했다.
"에덴?"
"아니요. 너무 뻔하잖아요."
서연이 웃었다.
"'생명의 정원'은 어때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으니까."
"좋아요."
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원 입구에 작은 나무 팻말을 걸었다.
'생명의 정원 - The Garden of Life'
그리고 그 아래 작은 글씨로 성경 구절을 새겼다.
"주 하느님께서는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 하나를 꾸미시어, 당신께서 빚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 - 창세기 2:8
그들의 에덴은 계속 자라났다.
나무들이 자라고, 꽃들이 피고, 열매가 맺혔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민준과 서연의 사랑도 깊어졌다.
하느님께서 주신 완전한 사랑.
부끄러움 없는, 두려움 없는, 오직 신뢰와 기쁨으로 가득한 사랑.
"우리는 참 축복받았어요."
서연이 어느 날 저녁 말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 모든 것을 만들어주셨어요."
"그래요.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잘 돌봐야 해요."
민준이 대답했다.
"우리의 에덴을. 우리의 사랑을. 하느님께서 주신 이 모든 선물을."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기도했다.
"주 하느님, 당신께서 흙으로 저희를 빚으시고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저희를 에덴에 두시고 일구고 돌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희에게 서로를 주셨습니다."
"이 모든 은총에 감사드립니다. 저희가 당신께 받은 사랑을 서로에게, 그리고 이 세상에 나누며 살게 하소서."
"아멘."
해가 지고 있었다.
저 멀리 바다에서 석양이 붉게 타올랐다.
민준과 서연은 그들의 생명의 정원에서, 하느님께서 만드신 에덴에서,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다.
둘이 한 몸으로.
하느님 안에서 하나로.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 창세기 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