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 그리고 주님의 이름(2)

주님의 이름을 부르다

by 이 범


1925년, 세립은 사제 서품을 받았다.
김세립 베드로 신부.
첫 미사를 집에서 드렸다.
늙은 아버지 석주가 앞줄에 앉아 눈물을 흘렸다.
"주님, 감사합니다..."
미사 후, 큰형 석문이 찾아왔다. 십여 년 만이었다.
"세립아."
"형님."
두 사람은 어색하게 마주 섰다.
"나는... 동생을 죽였다."
석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석현이를 일본놈들에게 넘겼다. 내가... 카인이다."
"형님."
"용서를 구하러 왔다. 하느님께, 너에게."
세립은 형을 껴안았다.
"주님께서는 이미 용서하셨습니다. 저도 용서합니다."
석문이 무너져 내리며 울었다.





"나는... 나는..."
"괜찮습니다, 형님. 주님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그분이 형님을 일으켜 세우실 것입니다."
그날 석문은 고해성사를 보았다. 생애 처음으로.
세립 신부는 본당 사목을 시작했다.
일본의 탄압이 심해지던 때였다. 신사참배를 강요했고, 한글을 금지했다.
"신부님, 우리가 뭘 할 수 있습니까?"
교우들이 물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세립 신부가 답했다.
"어둠이 깊을수록 빛이 더 밝습니다. 일본이 우리를 억압할수록, 우리는 더 큰 소리로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어떻게요?"
"함께 기도합시다. 매일, 새벽마다."
그날부터 명동성당 지하에서 새벽기도회가 시작되었다.
"천주여,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 저희 나라를 구하소서."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일본 경찰이 눈치챘다.
"조선인들이 성당에 모여 수상한 짓을 합니다."
"잡아들여라."
1938년 어느 겨울날, 세립 신부는 체포되었다.
서대문형무소.
"너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느냐?"
"그렇습니다."
"천황 폐하보다 네 하느님이 더 위대하다는 말이냐?"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왕이십니다."
고문이 시작되었다.
물고문, 전기고문, 매질.
하지만 세립 신부는 계속 기도했다.
"예수님... 주님의 이름을 찬미하나이다..."
옆 감방에서 다른 죄수가 물었다.
"신부님, 아프지 않습니까?"
"아픕니다. 하지만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으니 견딜 만합니다."
"그 이름이 뭡니까?"
"예수입니다.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저도... 그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함께 부르십시다."
두 사람이 어둠 속에서 기도했다.
"예수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었다.
세립 신부는 석방되었다. 7년의 옥살이 끝에.
몸은 상했지만, 영혼은 더 강해져 있었다.
"신부님!"
교우들이 달려왔다.
"무사하십니까?"
"주님께서 지켜주셨습니다."
세립 신부는 곧바로 성당으로 갔다.
무너진 제대, 깨진 성상들. 하지만 십자가는 남아 있었다.
"주님, 감사합니다."
그날 저녁, 첫 해방 미사가 드려졌다.
사람들이 성당 밖까지 가득 찼다.
"형제 자매 여러분."
세립 신부가 강론했다.
"우리는 해방되었습니다. 하지만 진짜 해방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귀를 기울였다.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난 것? 그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진짜 해방은 주님의 이름을 자유롭게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셋에게서도 아들이 태어나자, 그때부터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기 시작하였다.'"
세립 신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 후, 세상은 어두웠습니다. 우리도 그랬습니다. 형이 동생을 밀고하고, 민족이 민족을 배신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셋을 주셨습니다. 새로운 시작을 주셨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이제 새로운 시작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새 시대입니다!"
"예수님!"
한 사람이 외쳤다.
"주님!"
다른 이들이 따라 외쳤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성모님, 우리를 위해 빌어주소서!"
목소리들이 하나로 합쳐졌다.
세립 신부는 눈물을 흘렸다.
한 달 후, 세립 신부에게 편지가 왔다.
큰형 석문이었다.
"동생 세립에게,
나는 평양에 있다. 이곳에도 성당을 세우고 싶다. 내 재산으로.
석현이를 죽인 죄를 이렇게라도 갚고 싶다.
도와주겠느냐?
형 석문"
세립 신부는 즉시 답장을 썼다.
"형님께,
주님께서 형님을 부르고 계십니다.
함께 평양에 성당을 세웁시다.
그곳에서 많은 이들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게 합시다.
동생 세립"
1946년 봄, 평양에 새 성당이 세워졌다.
석문이 땅을 내고, 세립이 설계를 도왔다.
봉헌 미사 날, 형제는 함께 제대 앞에 섰다.
"주님, 감사합니다."
석문이 기도했다.
"저 같은 죄인도 받아주시고, 당신의 일을 하게 하시니."
"형님."
세립 신부가 형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우리는 카인의 후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셋의 후손입니다."
"셋의 후손?"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입니다."
미사가 끝나고, 사람들이 새 성당 앞에 모였다.
"이 성당 이름이 뭡니까?"
한 교우가 물었다.
세립 신부가 답했다.
"세립성당입니다."
"신부님 이름을?"
"아닙니다. 세우다, 설 립(立). 하느님께서 우리를 다시 세워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세립 신부는 성당 종루를 가리켰다.
"저 종은 '에노스의 종'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셋의 아들 에노스. 그때부터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으니까요."
"이 종이 울릴 때마다, 이 땅의 모든 이들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게 될 것입니다."
종이 울렸다.
땡— 땡— 땡—
그 소리는 평양 시내에 퍼져나갔다.
"예수님!"
"주님!"
"천주님, 감사합니다!"
사람들이 거리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세립 신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둘째 형님, 보고 계십니까? 형님이 목숨 바쳐 지키려던 이 나라에, 이제 주님의 이름이 울려 퍼집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졌다.
세립 신부는 평양을 떠나지 않았다.
"신부님, 피난 가셔야 합니다!"
교우들이 권했다.
"아닙니다. 여기 남아 주님의 이름을 지켜야 합니다."
북한군이 성당을 접수했다.
"이 건물은 인민의 것이다!"
세립 신부는 제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일어서라!"
군인이 총을 겨눴다.
"주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곳을 떠나시오."
"뭐?"
"이곳은 하느님의 집입니다. 주님의 이름이 머무는 곳입니다."
군인이 총을 쐈다.
세립 신부는 제대 앞에서 쓰러졌다.
마지막 순간,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예수님... 주님의 이름을... 찬미하나이다..."
60년 후, 2010년.
서울 명동성당.
김세립 베드로 신부 순교 60주년 추념 미사.
늙은 신부 한 분이 강론했다.
"김세립 신부님은 셋과 같은 분이셨습니다."
"형제의 죽음 이후에 태어나,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새 시대를 여셨습니다."
"그분이 평양에 세운 성당은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심은 씨앗은 살아있습니다."
"지금도 북한 땅 어딘가에서, 지하교회 신자들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전통을 이어받았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입니다."
미사가 끝나고, 사람들이 세립 신부의 유품 앞에 섰다.
낡은 성경 한 권. 피로 얼룩진.
펼쳐진 페이지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셋에게서도 아들이 태어나자, 그는 아들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기 시작하였다."
한 젊은이가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주님, 저도 그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핍박 속에서도."
"세립 신부님처럼, 에노스처럼."
"주님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종이 울렸다.
명동성당의 종.
그 소리는 서울 시내에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소리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이 있는 한.
"셋에게서도 아들이 태어나자, 그는 아들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기 시작하였다." - 창세기 4:26
구한말,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거치며,
카인의 죄악 이후에도 하느님은 셋을 세우셨다.
그리고 그때부터, 이 땅의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였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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