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 합덕제

천년 물길의 마을

by seungbum lee

봄을 찾아 떠난 길
"벚꽃 보러 갈까?"
4월의 어느 주말, 지혜가 제안했다. 봄이 한창이었다. 꽃구경 가기 좋은 계절이었다.


"어디로?"
"당진 합덕제. 벚꽃이 예쁘다던데."
"합덕제?"
민수가 검색을 시작했다.
"삼국시대 저수지래. 1,400년 넘었대."
"1,400년?"
"응. 백제 때 만든 거야. 지금도 농업용수로 쓰이고 있고."
서연이가 관심을 보이며 다가왔다.


"천년 넘은 저수지? 대박."
"그리고 제방에 벚나무가 쭉 심어져 있대. 봄이면 장관이라던데."
준우도 귀가 솔깃했다.


"벚꽃 터널?"
"그런 것 같아."
"가자!"
다음 주 토요일, 네 식구는 차를 타고 당진으로 향했다.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렸다.


"당진은 처음이야."
"나도. 충남 도시 중에 가장 멀리 가는 거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합덕읍으로 들어갔다. 조용한 시골 마을이었다.


"완전 시골이다."
"그게 좋지. 한적하고."
합덕제가 가까워지자 벚꽃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기 벚꽃!"
"우와, 진짜 예쁘다!"


제방을 따라 핀 봄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합덕제 제방으로 걸어갔다.
"여기부터 벚꽃길이네."
제방을 따라 벚나무가 끝없이 이어졌다. 만개한 벚꽃이 하얀 터널을 만들었다.


"와..."
말이 필요 없었다. 그저 아름다웠다.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벚꽃 터널 아래로.
"사진 찍어야지."
가족 사진을 찍었다. 벚꽃을 배경으로.
"이 사진 진짜 예쁘다."
제방 한쪽으로는 합덕제가 펼쳐졌다. 넓은 저수지였다.


"물이 맑네."
"1,400년 동안 여기 있었다는 게 신기해."
제방을 따라 계속 걸었다. 걷는 사람들이 많았다. 가족 단위, 커플들, 사진 찍는 사람들.
"다들 벚꽃 보러 왔구나."
"봄철 명소래."
중간쯤 걸으니 정자가 나왔다.



"저기서 쉬자."
정자에 앉아 저수지를 바라봤다. 잔잔한 물결에 벚꽃잎이 떨어졌다.
"평화롭다."
"시간이 천천히 가는 것 같아."
정자 옆 안내판을 읽었다.


"합덕제는 백제 의자왕 때인 658년경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둘레 1,772미터, 수심 2.5미터로 지금도 주변 농경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습니다."


"1,400년 동안 물을 대고 있다니."
"대단하다. 백제 사람들."
정자에서 내려와 다시 걸었다. 이번에는 제방 아래쪽 마을로 내려갔다.


"마을 구경하자."
좁은 골목이 나타났다. 오래된 농가들이 이어졌다.
"여기 진짜 시골이네."
담장이 낮았다. 돌담도 있고, 흙담도 있었다.


"돌담길이다."
돌담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골목은 구불구불했다. 미로 같았다.



"옛날 마을 그대로네."
한 집 마당에서 할머니가 밭일을 하고 계셨다.


"안녕하세요."
"오, 어디서 왔어?"
"서울이요. 벚꽃 보러 왔어요."
"그래? 고마워. 우리 동네 찾아와줘서."
"여기서 오래 사셨어요?"
"70년 살았지. 태어나서 쭉."
"합덕제가 좋으세요?"
할머니는 저수지를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좋지. 우리 농사는 저 물로 다 짓거든. 1,400년 동안 물을 줬으니까."
"대단하시네요."
"우리 조상들이 대단한 거지. 저렇게 큰 제방을 만들었으니."
할머니는 계속 말씀하셨다.


"요즘은 벚꽃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와. 좋아. 우리 동네가 알려지니까."
"마을이 시끄럽진 않으세요?"
"1년에 한 번, 봄에만 그래. 괜찮아. 나머지는 조용하니까."
할머니와 헤어지고 골목을 더 걸었다. 오래된 초가집도 보였다.



"초가집이 아직 있네."
"보존하나 봐."
초가집 앞에 안내판이 있었다.


"합덕 전통 가옥. 192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100년 넘었구나."
초가집은 잘 보존되어 있었다. 지붕도 깨끗하고, 마당도 정돈되어 있었다.


천년의 물, 백년의 삶
골목 끝에 작은 박물관이 있었다.
"합덕제 역사관?"
들어가니 작은 전시 공간이었다.
"합덕제의 역사."
벽에 연대기가 적혀 있었다.



"658년: 백제 의자왕 시대, 합덕제 축조 추정"
"1,400년: 현재까지 농업용수 공급"
"정말 오래됐구나."
모형도가 전시되어 있었다. 백제 시대 합덕제 축조 과정을 보여주는 모형이었다.


"이렇게 만들었구나."
"백제 사람들 기술이 대단했어."
한 코너에는 옛날 농기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게 다 합덕제 물로 농사지을 때 쓰던 거래."
쟁기, 낫, 지게 등이 놓여 있었다.


"손으로 다 했구나."
영상 코너에서는 마을 노인들의 증언이 재생되고 있었다.
"우리는 합덕제 물로 살았어요. 대대로. 할아버지, 아버지, 나, 그리고 아들까지. 합덕제가 없었으면 우리 마을도 없었을 거예요."
민수는 영상을 보며 생각했다. 물이 곧 삶이구나.


역사관을 나와 다시 제방으로 올라갔다.
"점심 먹자."
제방 근처에 작은 식당이 있었다.
"합덕식당."
들어가니 소박한 시골 식당이었다.


"뭐 드릴까요?"
"칼국수 네 개요."
주문을 하고 기다리는 동안 주인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눴다.


"여기서 오래 하셨어요?"
"20년 됐어요."
"벚꽃 철에 손님 많으시겠어요."
"많죠. 1년 중 지금이 제일 바빠요."


"나머지는요?"
"나머지는 조용해요. 동네 사람들만 오시고."
"그래도 계속 하시는 거 보면 괜찮으신가 봐요."
아주머니는 창밖 합덕제를 보며 말했다.


"먹고살 만해요. 그리고 여기가 좋아요. 저 물 보면서 살 수 있으니까."
"합덕제가 좋으세요?"
"좋죠. 1,400년 동안 여기 있었잖아요. 우리보다 훨씬 오래. 그런 걸 보면서 사는 게 좋아요."
칼국수를 먹으며 서연이가 말했다.


"여기 사람들은 다 합덕제 이야기를 하네."
"그만큼 중요한 거지. 삶의 중심이니까."
식사를 마치고 마을 안쪽으로 더 들어갔다.


"저기 오래된 사당 같은 게 있어."
작은 사당이었다. 앞에 안내판이 있었다.
"제신사. 합덕제를 지켜주는 신을 모시는 사당입니다. 매년 음력 3월 3일에 제사를 지냅니다."
"제방 신을 모시는구나."
"물이 중요하니까 신으로 모신 거지."
사당 앞에 서서 잠시 묵념했다.



흐르는 시간, 고인 물
오후가 되어 다시 제방으로 올라왔다.
"한 바퀴 더 걸을까?"
"좋아."
이번에는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같은 벚꽃 터널이지만, 방향이 다르니 느낌도 달랐다.


"바람이 불면 꽃잎이 날리네."
"벚꽃 눈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들이 흩날렸다. 하얀 눈처럼.
"아름답다."
제방 끝까지 걸어갔다. 거기서 합덕제 전체가 보였다.


"여기서 보니까 진짜 크다."
"1,400년 동안 물을 담고 있었구나."
벤치에 앉아 저수지를 바라봤다.


"여보."
"응?"
"우리가 다닌 곳들 중에서 여기가 제일 평화로운 것 같아."
"나도 그래. 을지로는 산업의 역사, 해방촌은 전쟁의 상처, 해미읍성은 순교의 무게. 근데 여기는..."
"그냥 평화."
"응. 1,400년 동안 물을 대주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한 곳."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일어났다.


"돌아가자."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길, 마지막으로 벚꽃을 봤다.
"올해 벚꽃은 여기서 봤네."
"내년에도 올까?"
"응. 또 오자."
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 모두 조용했다.


"피곤해?"
"아니. 그냥... 평화로워서."
"나도. 마음이 편안해."
집에 도착해서 민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제목은 '당진 합덕제, 천년 물길의 마을'.
"합덕제는 흐르지 않는다. 고여 있다. 1,400년 동안 같은 자리에서."
"하지만 그 고인 물은 생명을 만든다. 봄에 모내기할 물을, 여름에 가뭄을 견딜 물을, 가을에 풍년을 만들 물을."


"합덕제 주변 마을 사람들은 이 물로 산다.

대대로.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1,400년 동안 같은 물로."
"봄이 되면 제방에 벚꽃이 핀다. 사람들이 온다. 사진을 찍고, 걷고, 감탄한다. 하지만 벚꽃이 지면 사람들도 떠난다."
"그리고 마을은 다시 조용해진다. 70년을 산 할머니가 밭일을 하고, 20년 된 식당

아주머니가 칼국수를 끓이고, 제신사에서는 물의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이것이 합덕제다. 화려하지 않다. 극적이지도 않다. 그저 1,400년 동안 물을 담고, 사람들에게 생명을 준다."
"가끔은 이런 곳이 필요하다. 시끄럽지 않고, 빠르지 않고, 그저 있는 곳."
"합덕제처럼. 고요하지만 살아있는."
글을 다 쓰고 블로그에 올렸다.


이번에는 사진을 더 많이 실었다. 벚꽃 사진, 저수지 사진, 마을 사진.
댓글들이 달렸다.
"합덕제 몰랐는데, 가보고 싶어요."
"고요한 아름다움이 느껴져요."
"내년 봄에 가족들과 가보겠습니다."
그리고 한 특별한 댓글이 달렸다.


"저는 합덕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지금은 서울에 살지만, 매년 봄이면 고향 생각이 납니다. 합덕제 벚꽃과 그 물로 살던 우리 마을. 선생님 글 읽고 눈물이 났습니다. 고향이 그립네요."
민수는 답글을 달았다.


"댓글 감사합니다. 고향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습니다. 합덕제처럼. 돌아가실 날을 기다리며."
일주일 후, 민수는 혼자 합덕제를 다시 찾았다.
벚꽃은 거의 다 졌다. 초록 잎이 나기 시작했다.


"벚꽃 없으니까 또 다르네."
사람도 별로 없었다. 조용했다.
제방을 천천히 걸었다. 혼자서.
마을로 내려가 돌담길을 걸었다. 지난번 만났던 할머니를 다시 만났다.


"또 왔네?"
"네, 할머니. 벚꽃 없을 때도 보고 싶어서요."
"그래? 고마워."
할머니와 함께 밭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할머니, 합덕제가 할머니한테 어떤 의미예요?"
할머니는 한참 생각하시더니 말씀하셨다.


"삶이지. 합덕제가 곧 내 삶이야. 저 물로 농사짓고, 그 농사로 애들 키우고, 손주들 키우고. 다 저 물 덕분이야."
"고마우세요?"
"고맙지. 매년 제신사에서 제사 지낼 때마다 감사해. 1,400년 동안 물을 줘서."
할머니와 헤어지고 제방으로 돌아왔다.


저수지를 바라보며 오래 서 있었다.
"1,400년."
긴 시간이었다. 신라, 고려, 조선, 대한민국. 왕조가 바뀌어도, 전쟁이 있어도, 합덕제는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물을 담고, 생명을 주며.
민수는 다짐했다. 이런 곳들을 계속 기록하겠다고. 화려하지 않지만 중요한 곳들을. 시끄럽지 않지만 의미 있는 곳들을.
합덕제처럼.


서울로 돌아가는 길, 차창 밖으로 평야가 펼쳐졌다. 초록색 논들.
"저 논들도 다 합덕제 물로 농사짓겠지."
1,400년 동안 그랬듯이.
앞으로도 그럴 것처럼.
합덕제는 오늘도 그 자리에 있다. 고요히 물을 담고.


봄이면 벚꽃이 피고, 여름이면 초록이 우거지고, 가을이면 단풍이 들고, 겨울이면 눈이 쌓인다.


하지만 물은 변하지 않는다. 1,400년 전처럼,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민수 가족의 아카이빙은 계속된다. 크고 화려한 것만이 아니라, 작고 조용한 것도.
합덕제처럼. 고요하지만 깊이 있게.
천년의 물처럼,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