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평화 (10)
몸을 씻고 자신의 방에 돌아온 이산갑은 지치고 나른했던 몸을 보료 위에 앉아 풀어본다. 방 안은 텅 비어 있었고, 희미한 달빛이 창을 통해 스며들어 먼지 쌓인 책상 위에 놓인 은빛 반지를 비추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반지에 다가가 손에 쥐었다.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 손가락 끝에 스쳤고, 그의 눈빛은 깊어진다.
그 반지는 오래된 기억을 담고 있었다. 한때는 누군가의 손가락에서 반짝였고, 따뜻한 목소리와 함께 건네졌던 것이었다. 이산갑은 반지를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반지 안쪽에 새겨진 작은 글씨, '서영(書永)'이라는 이름이 달빛 아래 희미하게 드러났다.
그의 가슴 어딘가가 조용히 울렸다. 잊었다고 믿었던 얼굴이, 이름이, 그날의 햇살과 바람이,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그는 책상 앞에 조용히 앉았다. 달빛이 반지와 그의 눈동자 사이에서 떨리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마치 그 반지가, 지금의 그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처럼.
빛에 반지의 문양이 보였다. 낡았지만 여전히 희미하게 빛나는 그 문양을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그는 흐릿해진 기억들을 맞추려 했다. 윤서영이라는 이름이 그의 귀에 맴돌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안개처럼 희미했다. 그녀의 웃음소리, 함께 걷던 길, 나누었던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이 영화의 단편처럼 떠올랐다. 그러나 그 감정은 더욱 아련하고, 붙잡으려 할수록 기억은 멀어졌다.
반지를 테이블에 놓고 깊은 한숨을 내쉰 이산갑은 시간의 잔인함을 느꼈다. 모든 것을 흐릿하게 만들지만, 반지는 여전히 그 시절의 기억을 붙잡고 있는 듯 차갑게 빛났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며, 어둠 속의 세상과 함께 그의 마음속에도 희미한 그리움이 가득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귓가에 맑고 경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깔깔" 하고 쏟아지는 그 웃음은 마치 햇살 아래 반짝이는 시냇물처럼 맑고 아름다웠다. 이산갑의 굳게 닫혔던 기억의 문이 활짝 열리는 순간이었다. 웃음소리와 함께 윤서영의 얼굴이 그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동그랗고 빛나는 눈, 오뚝한 콧날, 그리고 웃을 때마다 살짝 올라가는 입꼬리까지. 햇살을 머금은 듯 옅은 갈색으로 빛나는 긴 머리카락은 바람에 부드럽게 흩날렸다. 그녀의 얼굴은 생기로 가득 차 있었고, 그 미소는 마치 봄날의 따스한 햇살처럼 그의 마음을 포근하게 감쌌다. 그는 그 미소 속에 담긴 순수함과 밝음을 기억했다. 함께했던 시간 속에서 늘 긍정적이고 활기찼던 그녀의 모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 웃음소리는 그의 굳었던 마음을 녹이고, 잊고 지냈던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올리게 했다. 반지 속 희미한 문양처럼 희미해져 가던 그녀의 모습이, 이제는 너무나도 선명하게 그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