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
보랏빛 추억, 달콤한 위로: 포도밭에서 찾은 삶의 지혜
뜨거운 여름의 끝자락, 초록 잎사귀 사이로 탐스럽게 영근 보랏빛 송이들이 고개를 내민다. 길게 뻗은 포도나무 줄기마다 주렁주렁 매달린 포도알들은 마치 보석처럼 빛나며, 한 알 한 알마다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듯하다. 포도는 단순한 과일을 넘어, 내게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자, 고단한 삶의 위로이며, 자연의 섭리를 깨닫게 해주는 지혜의 상징이다.
어릴 적, 시골 외갓집 마당에는 조그마한 포도나무가 있었다. 여름이면 그 나무 아래 평상에 앉아 할머니가 따다 주시는 포도를 알알이 입에 넣곤 했다. 덜 익어 시큼한 맛이 나는 것도 있었고, 햇볕을 듬뿍 받아 터질 듯 달콤한 것도 있었다. 그때는 그저 맛있는 과일이라 여겼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포도알 하나하나가 할머니의 사랑과 여름날의 행복을 담고 있었다. 빗방울이 포도잎을 타고 떨어지던 소리, 매미 소리 가득한 낮잠, 그리고 해 질 녘 온 가족이 모여 앉아 나누던 이야기들… 그 모든 기억의 한가운데에는 언제나 포도가 있었다. 톡 터지는 과육과 새콤달콤한 즙이 입안 가득 퍼지던 순간은, 단순한 미각의 즐거움을 넘어선 따스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시간이 흘러 도시에서의 삶은 바쁘고 팍팍했다. 꿈을 좇아 앞만 보고 달려왔지만, 때로는 지치고 좌절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문득 떠오른 것은 포도밭의 풍경이었다. 줄기 하나에 수많은 송이가 매달려 제각기 다른 모양과 색깔로 익어가는 모습은, 마치 우리의 삶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포도알은 햇볕을 잘 받아 탐스럽게 영글고, 어떤 알은 그늘에 가려 작고 덜 익은 채로 남아있지만, 결국 한 송이 안에서 서로에게 기대어 함께 존재한다. 우리 역시 타인의 빛에 가려 초라해 보이거나, 때로는 나의 그늘이 타인을 가릴 수도 있지만, 결국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포도는 말없이 가르쳐주는 듯했다.
포도나무는 혹독한 겨울을 견뎌내고, 봄에는 새싹을 틔우며, 여름내 뜨거운 햇볕과 비바람을 맞으며 열매를 맺는다. 그 과정은 고통과 인내의 연속이지만, 결국에는 달콤한 결실을 맺는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지 않을까. 힘든 시기를 겪어내야만 더욱 단단해지고 성숙해질 수 있으며, 고난과 역경 속에서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성장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포도는 온몸으로 보여준다. 특히, 포도 한 송이를 이루는 수많은 알갱이들이 서로에게 기대어 영그는 모습은 연대와 상생의 가치를 일깨워준다. 혼자서는 결코 아름다운 송이를 이룰 수 없음을, 함께 할 때 비로소 완전해질 수 있음을 무언의 메시지로 전해준다.
포도는 또한 변화와 순환의 상징이기도 하다. 싱그러운 초록색에서 서서히 보랏빛으로 물들어가는 포도알들을 보며 자연의 경이로움을 느낀다. 한 해 동안 겪어내는 모든 과정을 통해 포도는 결국 와인이라는 또 다른 형태로 다시 태어난다. 잘 익은 포도가 으깨지고 발효되어 깊고 풍부한 맛의 와인이 되듯이, 우리의 경험과 시련 역시 숙성을 통해 삶을 더욱 깊이 있고 풍요롭게 만들 수 있음을 포도는 속삭여주는 듯하다. 때로는 씁쓸하고, 때로는 달콤하며, 때로는 강렬하고, 때로는 부드러운 와인처럼, 우리의 삶도 다양한 맛과 향으로 채워져야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어느덧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면 포도는 수확되어 우리 식탁에 오른다. 잘 익은 포도 한 알을 입에 넣으면, 그 달콤함 속에 담긴 여름날의 햇살과 비바람, 그리고 농부의 땀방울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포도는 단순한 과일이 아니라, 인내와 성장의 결실이며, 자연의 지혜가 담긴 작은 우주인 셈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는 포도나무가 묵묵히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열매를 맺기 위해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그 보랏빛 송이들을 생각하면, 다시금 삶의 희망과 용기를 얻게 된다. 달콤한 포도 한 알처럼, 우리 삶도 언젠가는 가장 아름답고 달콤한 결실을 맺을 것이라고, 포도밭의 지혜가 나에게 속삭여주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