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나는 그리움

엄마의 붉은 청춘

by 인생서점 북씨

이거 언니네 갖다주래”

엄마가 돌아가시기 몇 개월전, 동생이 뜬금없이 화분 두 개를 가져왔다.

동생은 싫다고 했지만, 엄마는 막무가내 였다는 것이다. 엄마는 쌈짓돈 50만원 을 동생에게 배달비로 지급했다. “화분 두개 배달하고 돈 벌었네” 라며 동생은 공돈을 벌었다면 좋아했다. 그땐, 엄마가 이 화분 두개를 왜 내게 주고 싶어 했을까, 사뭇 궁금했다. 나는 화분을 받으며 “아유 엄마도 돌아가실때가 됐나벼” 농담처럼 말하고 동생과 마주보며 웃었다.

우리집에 온 화분”은 엄마 집에 갈 때 마다 내가 탐냈던 동백이와 군자란이었다. 동백은 여름과 가을의 경계선에서 벌써 꽃눈이 동글동글 맺혀있었다. 군자란은 꽃이 피고 진 자리에 아직도 꽃대가 길게 남아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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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90세를 훌쩍 넘긴 연세에도 건강하셨다. 나는 엄마에게 100살까지는 사셔야 된다고 말하곤 했다. “살아도 자식들에게 폐끼지 않게 건강하게 살아야제” 엄마는 싫다는 말 대신 가벼운 운동과 산책을 즐기셨다. 그 이듬해 꽃눈을 달고 온 동백이 꽃을 피울 즈음, 엄마는 96세가 되셨다. 엄마는 그 연세에 유모차를 밀며 혼자 산책길에 나섰다가 넘어져 그만 고관절 을 다치고 말았다. 연세 많은 어르신들이 고관절 골절 후 3개월을 넘기기 힘들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화분을 내겐 보낸 엄마는 당신의 죽음을 예감하셨던 걸까, 엄마는 부상 후 3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백세를 채우지 못한채, 세상을 떠나셨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을 나는 잊고 있었다. 엄마의 장례식장에 모인 사람들은 90세가 넘으면 언제 떠나도 아쉬울게 없는 나이라고들 말했다. 하지만 나의 엄마는 80년을 고생하시고 사람답게 살아보신 세월은 고작 15년에 불과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잣대로 나이를 재고 있었지만, 나와 엄마 사이에는 100세 까지는 살아야 한다는 암묵적인 약속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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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태어난 땅끝마을 해남은, 동백나무가 가로수처럼 늘어서 있다. 엄마는 18세 꽃다운 나이에 아버지가 살고 있는 강진으로 시집 왔다. 당시의 여자아이들을 일본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으려고 나이보다 일찍 결혼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결혼과 함께 북해도 탄광촌으로 끌려가셨다. 고된 노동과 추위는 고생없이 자란 아버지에게는 견디기 힘든 곳이었으리라

해방이 되어 돌아온 아버지는 거칠고 포악했다. 작은일 에도 분노하고 가족들을 힘들게 했다. 그 와중에도 엄마는 자식을 여덟을 낳아 여섯을 키워냈다 자식들이 태어나고서도 아버지의 폭력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엄마는 아버지의 속병을 고치시겠다며 자주 떡을 해서 머리에 이고 해남 대흥사 주변에 있는 작은 암자를 찾아 다녔다 기도를 하고 굿을 하셨지만 그 기도가 집안을 구하기는 커녕 더 깊은 불행의 늪으로 이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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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엔 전답이 하나둘씨 팔려나가고 마지막에 집이 팔렸다. 아버지는 그 모든일을 엄마 탓으로 돌렸다. 살기가 막막한 우리 가족은 도망치듯 고향을 떠났다. 당시 오빠 둘은 서울에 있었다, 부산 전포동 산비탈 아래, 고모가 살고 있는 동네는 낡고 허름했다. 그래도 친척이 있다는 든든함에 근처에 작은 방 두칸짜리에서 셋방살이를 시작했다. 부산에서도 아버지의 분노는 사그라 들지 않았고 가족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어린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커다란 대야를 머리에 이고 자갈치 시장에서 생선을 떼어다가 전포동 시장 입구 길바닥에 앉아 생선을 파셨다. 남은 생선은 우리가족 저녁 한끼 반찬이 되었다.

꽃다운 청춘에 시집온 엄마의 고생은 늘그막에서야 멈췄다. 자식들 시집 장가 보내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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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우리집 에 온 동백은 몸살을 앓았다. 밖에다 들여놓으면 잎이 시들 거리고, 집안에다 놓으면 잎사귀에 새까맣게 곰팡이가 피었다. 나는 곰팡이가 핀 잎사귀를 볼 때 마다 물티슈를 가지고 잎사귀 앞뒤로 번져있는 곰팡이균을 닦아냈다. 나의 정성이 통했는지, 비록 가지는 앙상했으나, 지난해에는 제법 많은 꽃망울을 만들어내 피보다 진한 붉은색 꽃을 피웠다. 처음 동백을 키워본 나는 시들지 않는 꽃송이가 통째로 땅에 떨어져 있을때마다 애궂은 고양이들을 혼내기도 했다.

군자란 은 번식력은 좋지만 탄저병에 약해 잎사귀를 수시로 잘라내야 했다. 다행이 병을 잘 이겨낸 덕분에 나중에는 두 개의 화분으로 뿌리를 나눌만큼 건강하게 자랐다. 가까이서 보면 짙은 주황색을 띄는 군자란 꽃은, 마당에서 바라본 거실 창 너머에 붉은색으로 피어. 창을 온통 빨갛게 물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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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는 엄마가 지나온 시간을 건너고 있다. 평생 고생만 하신 엄마가 백세까지 사실거라는 막연한 믿음을, 당연한 듯 품고 살았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을 통해 동백꽃이 통째로 땅에 떨어진다는 것을 뒤늦게서야 알았다, “동백꽃의 붉음은 슬프고 처연하다” 는 문장에 나는 엄마를 생각 했다. 엄마가 떠난 자리엔 동백꽃이 땅에 떨어지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스러졌다, 그 뒤를 잇듯 군자란의 붉고 탐스러운 꽃들이 꽃대마다 주렁주렁 그리움처럼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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