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정말 착해”
그 말은 칭찬처럼 들렸지만 어느순간 부터 평생 나를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되었다.
지금도 처음 본 사람이 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다
“정말 죄송한데요 참 착하게 생기셨어요” 그 말은 내가 가장 듣기 싫은 말이다,
더 웃긴 건 그 사람도 ‘죄송’이라는 말을 먼저 붙이는걸 보면,
내가 그런 말 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것 같다는 점이다.
이 나이에 착하다는 말이 과연 맞은 소릴 일까?
나이와 상관없이 “착하다‘는 말은 칭찬으로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 자기 몫을 챙기지 못하는 사람, 손해 보는 사람,
자기 주장 없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남에게 싫은 소리 없이 무슨 일이든 두리뭉술 하게 넘어가는 나,
남편의 표현을 빌리자면 ’집안에서 함께 생활하는 고양이들도 나를 우습게 본다고 한다.
남편이 그런식 으로 말할 때 마다 ”내가 정말 우습게 보이나?“싶어 기분이 씁쓸해진다.
그래도 참고 넘길 수 있는 이유는 적어도 우리 집 반려동물들만큼은
나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착한 여자‘ 정체성에 금이 간 사건이 두 번 있었다
첫 번째는 20년도 전에 책방에 온 여학생 손님이 책값을 깍아 달라고 요구했다.
내가 안 된다고 하자 “어유 왜 그렇게 깍쟁이세요”
나는 항상 내 이익을 챙기는 것 보다 상대를 먼저 생각해 왔고
그날도 그 학생이 금액을 지나치게 깎아서 거절 했을뿐이었다.
하지만 깍쟁이란 소리를 처음 들어 본 나는 속으로 정말 기뻤다.
두 번째는 몇 년전 양주로 이사와 회사를 설립하고 적자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였다. 수익을 만들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하고 싶어,
서정대학에서 운영하는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었다.
함께 디지털 수업을 받고 있던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왜 그렇게 악착같이 사세요?”
그말이 내 귀에는 “나이 먹어서도 아직 그 정도 밖에 안되냐”
는 소리로 내게는 비아냥처럼 들렸다. 일반적으로 나이가 육십을 넘으면 직장을 은퇴하고,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여행을 다니며 삶을 누릴 때가 된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에 놓여 회사를 살리고자
아등바등 살면서 스스로 자책하며 늘 주눅이 들어 있었다.
세상 앞에서 당당하기보다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을 때,
나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 그런 소리를 들으니 내 자신이 너무 처량하고 비참했다.
몇 달 뒤 다른 장소에서 그 사람을 우연히 만났다.
그가 먼저 다가와 말했다. “그땐 죄송했어요, 제가 잘 몰랐어요,
뒤늦게라도 나를 이해 준다는 생각에 그동안의 서운함은 사라졌으나
그때의 그말은 내게 커다란 상처로 남았다.
얼마전에 도서관 사서쌤이 책방을 방문 했다.
”사장님 은 너무 열심히 사시는 것 같아요?“ 라고 해서
내가 너무 악착같이 살고 있죠“라며 되물었다.
절대 그런뜻 이 아니라며 손사레 를 쳤다.
사람마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표현은 달랐지만,
”열심히 하면 언젠가는 기회가 올거라 믿고 버텨내고 있는 중이다.
나중에 이말이 “버텨냈다“ 로 쓰이기를 기대한다.
나는 착한 이미지 보다는 측은지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텃밭 한 귀퉁이를 빌려 농사를 짓고 계신 할머니 밭에 풀이
키 높이 까지 자라있음을 보면서 도와주지 못해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나는 여전히 불쌍한 동물들을 보면 먼저 챙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