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고구마순

by 인생서점 북씨

이른 아침, 건너편 텃밭에 사는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챙겨주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가는 길에는 뵙지 못했던 동네 할머니가 밭둑에 앉아 손사래로 모기를 쫓으며

고구마 순을 따고 계셨다. 오랜만에 뵈어 반갑게 인사만 드리고 지나치려 하자,

인심 좋은 할머니가 고구만순 줄기를 두 손 가득 집어 건네셨다.

“어유 힘들게 따셨는데 그냥 두세요”라며 사양 했지만 거절로 들리셨는지

할머니의 얼굴엔 노년의 쓸쓸함이 스쳤다. 안 받으면 더 섭섭해하실 것 같아,

나는 잘 먹겠다며 받아들고 돌아서려는데, 할머니는 말꼬리를 붙잡아 이야기를 이어 가셨다.

여든을 훌쩍 넘기신 할머니는 늘 말벗이 필요해 보였고,

나를 만나면 좀처럼 놓아주지 않으셨다. 이날은 고구마 순까지 받은 터라,

꼼짝없이 붙들려 긴 말씀을 들어드려야 했다,

출근시간이 급해져 잘 먹겠다고 인사를 하고 막 돌아서는 순간

“나도 살날이 얼마 안 남었어”라는 소리에 돌아가신 엄마 생각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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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전 엄마는 딸이 밭을 일구며 사는 모습이 보기 좋으셨던 모양이다.

어느 날, 구순을 넘긴 연세에도 고구마 순을 따러 오시겠다고 전화를 주셨다.

주말에 올케언니를 앞세워 함께 오신 엄마는,

그 연세에도 쉬지 않고 손을 놀리며 순을 뜯으셨다.

그 모습을 보니 마음 한구석이 저릿하게 아려왔다.

오랫동안 시골에서 살아오신 엄마의 얼굴은 마치 고구마 순이 아니라

추억을 거두고 계신 듯했다.

올케언니와 함께 큼직막한 봉지에 고구마 순 줄기를 가득 담아 돌아간 며칠 뒤,

올케언니가 직접 담근 고구마순 김치 한 통을 들고 왔다.

이럴수가!

나는 ‘고구마 순으로 김치를 담글 수 있다는 놀라움보다,

그 깊고 독특한 맛에 더 크게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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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할머니에게서 받은 고구마 순 줄기를 양손 가득 들고 집으로 내려오며

여러 생각에 잠겼다. 엄마가 밭에서 순을 따던 모습,

그것으로 김치를 담가 무겁게 들고 오던 올케언니의 정성,

그리고 까마득히 잊고 지냈던 한 친구와의 추억까지 꼬리를 물듯 이어졌다.

이른 나이에 결혼한 친구는 어느 날 신혼집에 나를 초대했다.

집은 내가 살던 곳에서 정반대 동네라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야 했다.

휴대전화도 없던 시절이라 길도 낯설고 오래 걸려, 도착했을 때는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뒤였다. 친구는 상차림을 미리 해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배가 고팠던 나는 상 위에 오른 반찬 중

가정 먼저 손이 간 건 고구마 순 나물이었다

“우와, 이거 너무 맛있다! 어떻게 만든 거야?”내가 묻자 친구는

요즘 구고마 순 나오는 철이라 시장 가는길 에 사왔다며

레시피를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된장에 파, 마늘, 청양고추, 붉은 고추를 송송 썰어 넣어

무쳐낸 그 나물은 밥 한 공기를 뚝딱 비우게 만들었다.

다른 반찬에는 젓가락조차 가지 않았다.

나는 그 맛을 잊지 못했다. 시장에서 손질해 놓은 고구마 순을 보면

어느새 손이 가고, 집에서 친구가 해주던 방식을 따라 무쳐 보곤 했다.

그러나 반찬 투정이 심한 남편은 한두 번 맛만 보고는

다시 젓가락을 대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종종 친구를 떠올리며

고구마 순을 사다 무쳐냈다. 하지만 그때 먹었던 그 맛은 나오지 않았다.

여름이 오고 시장에 고구마 순이 쌓이면 나는 어김없이

그 친구가 생각났다. 그 후로 마흔 해가 흘렀는데,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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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이제 나이를 먹다 보니 자꾸만 추억을 먹고 사는 것 같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나는 아침에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고구마 순을 꺼내 껍질을 벗기며 엄마와 올케언니,

그리고 친구를 생각했다. 고구마 순 나물은 껍질을 벗겨내야

연하면서도 아삭한 식감이 살아난다. 벗겨낸 줄기를 팔팔 끓는 물에

소금을 약간 넣고 3~4분 정도 데쳐낸 뒤 찬물에 헹궈 물기를 꼭 짰다.

나는 오래전 친구가 해주었던 그 나물을 떠올리며

된장 한 스푼을 넣고, 파와 마늘, 양파를 넣었다.

여기에 붉은 고추와 청양고추를 송송 썰어 양념장을 만들었다. 입맛이 까다로운 남편을 생각해 고추장 반 스푼도 살짝 보탰다.

남편이 고추장이 들어간 반찬을 특히 좋아하기 때문이다.

조물조물 무쳐, 들기름을 두른 팬에 옮겨 볶았다.

채소에서 나온 물기 때문에 국물이 생기자

마지막에 들깨가루 한 스푼을 넣어 휘리릭 볶아냈다.

예전 같으면 그대로 두었을 텐데, 나도 나이를 먹다 보니

요령이 생겼는지 음식 만들 때 마다 상황에 맞게 해낸다.

마지막에 깨소금을 뿌려 밥상에 차려 내니

입맛이 까딸스러운 남편도 맛있다고 칭찬을 늘어놓았다.

식사가 끝나고 식탁을 정리하는데 남편이 불쑥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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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내일 고구마 순 나물로 도시락 싸줘!”

그 다음날, 나는 살면서 처음으로 남편의 도시락을 싸주었다.

누군가를 떠올리며 음식을 만든다는 건 결국 나 자신을 기억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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