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향한 희망을 놓지 말아야 하는 이유
“결국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오로지 자신을 믿고 견뎌내는 것뿐이었다.”
#Hahndorf
‘괜히 자전거 탔다. 힘들어 죽겠네. 지금이라도 다시 아들레이드로 돌아갈까? 자전거 중고로 팔고, 비행기로 편하게 이동할까?’
아들레이드 시내를 빠져나오자마자 후회가 밀려왔다. 내가 향하는 한도르프는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독일 마을로, 매력적인 전통과 풍경으로 유명했다. 독일 전통 가옥, 전통 음식, 수제 맥주 등을 즐길 수 있다. 아들레이드 관광객들에게 인기 있는 여행 코스 중 하나다.
여행 자료를 조사하다가 한도르프 마을 전경 사진에 매료되었다. 마을이 흰 눈으로 덮인다면 마치 산타클로스와 요정들이 사는 마을일 것 같았다. 목조와 흰 벽으로 지어진 집들과 가파른 경사의 지붕들이 줄지어 있었다. 독일 전통 맥주를 맛볼 수 있다는 점도 마음을 끌었다. 게다가 아들레이드와 가까워 한도르프에서 점심을 먹고 관광한 뒤 해안도로 쪽의 마을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그게 첫날 목표였다. 이후 하루에 70~80km, 많게는 100km씩 이동하며 멜버른까지 가려했다.
그 장엄한 프로젝트를 즉시 무산시켜야 할 것 같았다. 아들레이드 숙소를 나서면서 심장이 뛰었다. 긴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두근거림으로 페달을 밟았다. “투르 드 프랑스(Tour de France)”에서 선수들을 응원하는 사람들을 떠올랐다. 이를 아들레이드 시내에 이입해 가상의 응원단을 만들었다. 그렇게 스스로 사기를 끌어올렸다. 한껏 고양감이 일었다. 그리고 한 시간만 그 고양감은 사라졌다. 너무 힘들어 후회 막심했다.
이 프로젝트에 생각지 못한 요소가 하나 있었다. 바로 경사였다. 한도르프는 “아들레이드 힐(Adelaide Hill)”이라는 지역에 위치한 마을이다. 말 그대로 언덕(Hill)을 올라야 한다. 아들레이드에서 한도르프로 향하는 길 내내 언덕이 이어졌다. 호주 대분이 평지이고, 높은 산이 없으니 경사 같은 것은 자연스레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런 핵심요소의 누락은 시내를 빠져나온 지 1시간 만에 나를 후회하게 했다. 처음 언덕을 오를 때만 해도 곧 내리막길이 나올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언덕은 끝없이 이어졌다. 그때마다 올라온 길을 되돌아보며 ‘아… 다시 돌아갈까?’, ‘시내로 가는 길은 내리막 길이니 금방이겠지?’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언덕길에 구글 맵을 다시 켜서 확인했다. 구글맵으로 자전거 경로를 설정하면 경사도 표시가 됨을 그때 알았다.(정확히는 도로의 해발 높이가 표시된다) 이 경사도는 한도르프 마을까지 오르막길의 연속임을 말해주었다.
잠시 자전거를 멈추고 고민했다. 언덕길에 지치기도 했지만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속도였다. 자전거 뒤에는 수레가 달려 있었다. 수레에는 캐리어, 백팩, 아이스백, 텐트, 비상식량, 물 등이 가득 실려 있었다. 내 호주 살림을 수레 하나에 욱여넣었다. 시내를 빠져나올 때는 속도가 나쁘지 않았다. 속도는 언덕을 만나니 급격히 느려졌다. 이 속도라면은 저녁쯤에나 한도르프에 도착할 것이 분명했다. 애들레이드로 돌아가 시내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른 경로를 택할지, 이대로 한도르프로 향할지 고민했다. 선택은 후자였다. 사진으로 봤던 한도르프의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이왕 시작했으니 되돌아갈 순 없었다.
허벅지가 터질 것 같으면 내려서 자전거를 끌었다. 어느 정도 근육이 회복된 것 같으면 다시 자전거를 타고 언덕을 올랐다. 이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덧 건물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구글맵을 보니 마을이 코 앞이었다. 곧이어 “Welcome to Historic Hahndorf Founded 1839”라는 문구가 적인 표지판이 나타났다. 표지판에는 마을의 약도가 그려져 있었다. 마침내 한도르프에 도착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표지판 뒤로 방문객을 환영하는 예쁜 길이 펼쳐져 있었다. 한쪽에는 담쟁이 식물이 정돈된 채 벽을 이루고 있었다. 이름 모를 붉은 꽃이 벽을 채웠다. 반대 편에는 키 큰 나무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줄지어 서 있었다. 나무들은 무성한 나뭇잎으로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아들레이드를 빠져나온 뒤 만난 첫 그늘이 무척 반가 웠다. 마을 초입에 작은 사과 농장과 그 농장에서 운영하는 듯한 상점이 있었다.
가게에 들어서자 앉아 있는 노파가 보였다. 구석구석 과일 상자에 사과가 담겨 있었고, 먹음직스러운 빛깔을 뽐내고 있었다. 당장 하나를 입에 배어 물고 싶었다. 깨물자마자 사과 과즙이 터질 것 같았다. 선반에는 수제품으로 보이는 사과잼과 사과 주스가 종류별로 진열 돼 있었다. 사과주스 하나를 집었다. 양이 빙그레 바나나 우유의 절반쯤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가격은 두 배였다. 맛은 끝내줬다. 사과의 진액을 하나도 빠뜨림 없이 농축한 맛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2L짜리 병을 사고 싶었지만 예산을 생각하며 참았다.
어느덧 해가 질 시간이었다. 한도르프에서 묵기로 결정했다. 예쁜 건물 몇몇을 짧게 구경하고, 캐러번 파크로 향했다. 하루 최소 70km 이상씩 이동하려 했던 계획은 첫날부터 꼬여 버렸다. 30km도 채 이동하지 못했다. 허벅지는 터질 것 같았다.
캐러번 파크는 제법 컸다. 텐트 이용객들도 전기를 사용할 수 있게끔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그리고 수영장이 있었다. 나는 뭉친 근육을 풀어줘야 한다는 생각에 수영장에 몸을 담갔다. 온몸이 비명을 질렀다. 배영을 하듯 몸을 뒤로 뉘었다. 몸을 물에 둥둥 띄워 하늘을 바라봤다. 어느새 해는 보이지 않았고, 해가 남기고 간 여분의 빛만 머물고 있었다. 물에 귀가 잠기며 고요가 찾아왔고, 이내 생각이 몰려왔다.
오늘 경로가 언덕이었음을 감안해도 너무 짧은 거리를 이동했다. 이 속도라면 모든 호주 여행의 일정이 뒤로 밀릴 참이었다. 약 한 달간의 자전거 여행을 계획했지만 이 상태라면 2달은 더 걸릴 것이었다. 비용은 배로 불어 날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내 비자가 문제였다. 만료까지 한 달 남짓하게 남은 상황이었다.
텐트로 돌아와 노트북을 켰다. 여행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했다. 자전거 여행 자체를 포기하든 일정을 수정하든 해야 했다. 하지만 이내 피곤이 몰려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느새 노트북 앞에서 꼬박꼬박 고개를 떨궜다. 노트북을 덮고, 바닥에 쓰러지듯 누웠다. 물놀이에 근육이 어느 정도 풀렸는지 그 풀린 근육들이 나를 순식간에 꿈나라로 데려갔다.
햇살이 텐트를 뚫고 들어 왔다. 멀리서 산 새들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텐트를 열고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아침을 시작했다. 마치 동화 속 한 장면에서 잠을 깨는 듯했지만 이내 현실이 소리쳤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허리와 다리는 어제보다 더 피곤하다고 외쳤다. 멀쩡하다고 생각했던 팔과 어깨도 통증이 호소했다. 근육통을 애써 누르며 아이스박스에 있는 생수를 꺼냈다. 반쯤 뜬 눈으로 푸른 하늘과 푸른 초목을 바라보며 목을 축였다. 힘들어서 아무 생각이 안 났다.
‘왜 이 쓸데없는 생각을 했을까…’
#시간 여행
일단 마을을 둘러보기로 했다. 밝은 대 낮에 본 마을은 그 아름다움이 더 빛났다. 피곤해서 마을을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던 어제와는 달랐다. 유럽의 한 작은 마을로 시간여행을 떠난 듯했다. 거리에는 고풍스러운 독일식 목조 주택이 줄지어 서 있었다. 하얀 벽과 갈색 목재가 이루는 격자무늬, 아치형 창문과 아기자기한 화분, 가파른 경사의 지붕 등. 호주 특유의 자연미가 더해져 더욱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 냈다. 관광객들은 마을 특유의 아름다움과 한적함을 즐기고 있었다.
몇몇 음식점은 예스러운 풍취를 더 잘 보여줬다. 가게 입구마다 화려한 간판 대신 적당히 촌스럽고, 클래식한 팻말이 있었다. 손수 제작한 듯했다. 그 수제 표지판과 간판 위엔 가게 이름이 독특한 필체로 새겨져 있었다. 마치 영화 해리포터에 나오는 양피지에 쓰인 글씨체 같았다. 어떤 카페는 이 마을의 설립년도인 1839를 크게 적어 놓았다. 아무래도 그 카페는 마을의 역사를 온전히 함께 한 듯했다. 카페에 들어가 100년도 넘은 발자취를 느껴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문을 열기 전이었다. 식당과 카페 외에도 기념품을 파는 각종 상점들은 이 마을이 뿜어내는 특유의 향을 더해줬다. 거리 곳곳에는 오크통 드럼으로 보이는 것이 즐비했고, 몇몇 주류점은 시원한 맥주 향을 내뿜었다. 평소 알고 있는 맥주 향과는 조금 달랐다. 아무래도 보리 맥아 향을 발효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도르프는 독일 이민자들의 전통과 삶이 고스란히 담긴 작은 박물관 같았다.
거리를 둘러보던 중 한 교회를 발견했다. 이 마을의 역사와 정체성을 압축한 건물이었다. 알고 있는 건축 양식이라곤 고딕양식뿐이어서 더 반가웠다. 적당히 빛바랜 외벽이 세월의 흐름을 보여줬다. 정면에서 보이는 뾰족한 아치형태의 창문이 신성함을 더해줬고, 하늘 위로 뻗은 첨탑은 경건함을 더해주었다.
적당히 구경을 마치고, 마을의 한 식당으로 향했다. 보통 한도르프에 온다면 대부분 “Hahndorf Inn”이라는 식당식을 방문한다. 이 식당이 한도르프 마을의 관광 이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슈바인학센을 비롯해 전통 독일 요리와 각종 맥주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나는 Hahndorf Inn에서 식사를 하고 싶었지만 돈을 아껴야 했다. 길가에 놓인 메뉴판을 보고 저렴한 메뉴가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가장 저렴한 12불짜리 소시지 요리를 주문했다. 그 식당은 소시지 요리 전문점이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는 동안 메뉴판을 구경했다. 100불이 넘는 요리도 있었다. 소시지 주제에 어울리지 않는 가격이라 생각했다. 곧이어 가게를 둘러봤다. 어김없이 독특하고 아름다운 분위기였다. 이내 요리가 나왔고,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마트에서 파는 것 같은 소시지에 양념과 치즈를 뿌린 것이 전부였다. 제일 저렴한 요리를 시켰으니 큰 기대를 안 했지만 속으로 너무한다 싶었다. 무엇보다 소시지를 너무 얇게 썰어서 실망이 컸다. 실망감을 부여잡고 그 작은 소시지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완전한 내 착각과 오만이었다. 그 작은 소시지에는 적당히 거친 쫄깃함, 엄청난 육즙, 고소함, 절인 고기 특유의 쿰쿰 내가 가득했다. 한 마디로 무척 맛있었다. 나는 순식간에 식사를 해치웠다. 허겁지겁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 나라의 전통 요리를 마트에서 파는 애들용 간식으로 착각했다. 생각해 보니 소시지는 수천 년의 역사를 간직한 음식이고, 한도르프는 자신들의 역사와 전통성을 유지하는 마을이었다. 그런 곳에서 먹는 음식이 단순히 기성품 같을 리가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괜히 주방장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계산을 하며 정말 잘 먹었다는 인사를 하고 나왔다.
#친절한 ‘자극’씨
마을을 좀 더 둘러보며 고민을 했다. 이대로 자전거 여행을 지속할지 말지 고민이었다. 마음은 지속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하지만 내 체력을 과대평가했던 부분을 반영해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우선 짐을 줄이기로 했다. 마을에 있는 우체국으로 향했다. 불필요한 옷가지등을 전부 한국으로 보냈다. 짐을 부치고 나와 남은 짐을 수레에 차곡차곡 정리했다. 이 모습을 한 노부부가 지켜보더니 다가와 말을 걸었다.
“Are you travelling with you bike?”(자전거로 여행 중이신가요?)
“Yes, madam”(네 그렇습니다)
“Oh, that’s wonderfull”(정말 멋있네요)
할머니는 내가 우체국에 들어갈 때부터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내 자전거 여행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고 싶어 내가 우체국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할머니는 내 여행 계획을 듣고는 놀라움과 동시에 멋진 계획이라며 칭찬해 주었다. 그와 동시에 내게 격려와 응원의 의미로 음료 한 잔 사고 싶다고 말했다. 나를 한 식당으로 데려갔다. Hahndorf Inn이었다. 식당 사장으로 보이는 이가 나오더니 할머니와 반갑게 인사했다. 그러곤 내게 이 할머니가 한도르프 마을의 터줏대감이라며 엄청 부자라는 정보까지 덧 붙여줬다.
음료 두 잔을 주문하고, 음료가 나올 때까지 가게를 둘러봤다. 한도르프 마을의 상징 중 하나를 경험하지 못해 아쉬웠다. 할머니 덕분에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한도르프 인에 들어서자마자 마치 유럽의 오래된 여관에 온 듯한 느낌에 휩싸였다. 중세 혹은 르네상스 시대 유럽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 나올법한 장소였다. 마치 한쪽에선 사내들이 큰 목소리로 맥주를 마시고, 다른 한쪽에선 전통 민요 같은 것이 나올만한 분위기였다. 모험을 마친 프로도 일행이 간달프와 아라곤을 초대한다면 이곳이 적당할 것 같았다. 돈키호테와 산초가 하룻밤 묵어갈 것 같은 옛 여관이었다. 내부는 짙은 목재로 이루어진 천장이 높이 뻗어 있었다. 멀리 한쪽 벽면엔 벽난로가 있었다. 추운 겨울이면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의 불빛이 공간을 따스히 감쌀 것 같았다. 벽에는 이곳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그림과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한도르프 인 입구에도 이곳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사진과 함께 글귀가 적혀 있었다. 역시 이곳 또한 마을의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지나온 발자취에 자긍심을 갖는 곳이었다.
주문한 음료를 받고, 할머니와 나는 식당 바깥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할머니와 음료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주로 한도르프 마을의 역사와 설립 배경 같은 것을 물어봤다. 마을을 구경하며 한도르프 역사를 조금 맛본 상태여서 현지인에게 더 자세히 듣고 싶었다. 그리고 눈앞의 할머니라면 왠지 엄청난 이야기를 들려줄 것 같았다.
할머니로부터 한도르프 역사를 듣는 동안 마을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할머니에게 인사를 했다. 사장의 말은 거짓이 아닌 듯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그 마을의 터줏대감이었다. 그들이 부유한 것도 사실인 듯했다. 어떤 마을 사람은 할머니께 음료 말고, 비싼 음식을 사달라고 하라 했다. 그 정도는 할머니한테 푼돈에 불과할 거라며.
마을 사람을 마주칠 때마다 할머니는 내 자전거 여행을 그들에게 알려줬다. 마치 내 여행을 홍보해 주는 사람 같았다. 그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놀라며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졸지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진짜 응원을 받게 됐다. 애들레이드를 떠날 때 상상으로 만든 응원과는 달랐다. 그중 한 사람은 나에게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말하곤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다. 그의 손엔 알 수 없는 작은 깃발이 쥐어져 있었다. 작은 태극기라도 자전거에 달고 싶었는데 그 깃발이 아쉬움을 달래줄 것 같았다. 고맙단 말과 함께 깃발을 수레에 꽂았다. 마을 사람들의 응원이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부추김을 받았단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수능 시험장 앞에서 학생회라는 이름으로 모르는 후배들이 응원하러 와줬을 때가 떠올랐다. 그들의 응원에 상기된 내게 착시와 착청이 일어났다. 그들의 말이 우리나라 사투리처럼 들렸다.
‘여보시오, 김 씨. 이 멋진 청년이 자전거로 멜버른을 거쳐 시드니까지 여행을 간다오’
‘워매 참말로 대단하유. 좋은 여행 여유’
정겨운 시골 정서가 내게 기분 좋은 환각을 불러일으켰다. 할머니와 마을 사람들은 나의 여행을 멈출 수 없게 만들었다.
#Zion Hope
어른들의 응원을 잔뜩 받은 나는 어느새 자전거를 타고 쌩쌩 달리고 있었다. 상쾌한 바람을 맞으며 더 박차를 올렸다. 마음엔 고양감이 가득했다. 단순히 어른들로부터 응원을 받아서만은 아니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
19세기 중반, 독일의 루터교 신자들은 종교적 자유를 찾아 긴 항해에 나섰다. 당시 프로이센 왕은 루터교와 칼뱅주의를 통합해 국가 통제 하의 교회를 세우려 했다. 이에 반대하는 많은 루터교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떠나기로 결심했다.
한편, 영국은 남호주를 자유 식민지로 지정하고 이민자들에게 정치, 경제, 종교의 자유를 제공해 식민지를 발전시키려 했다. 1838년, 프로이센을 떠난 루터교 신자들은 “자이온 호프(Zion’s Hope)”라는 배에 올랐다. 이 항해는 단순한 이주가 아닌 신앙과 자유를 위한 여정이었다. 배 이름은 성경 속 이상향인 “자이온(Zion)”에서 따온 것으로, 이민자들에게 새로운 삶과 신앙의 자유를 상징했다.
그러나 항해는 고된 여정이었다. 좁고 비위생적인 선실에서 수개월을 지내며 이민자들은 질병, 식량 부족, 거친 바다의 위협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기도와 찬송으로 서로를 격려하며 신앙과 자유를 향한 희망을 이어갔다.
선장 디어크 한(Dierk Hahn)은 안전한 항해를 약속하며 이민자들을 끝까지 이끌었다. 오스트레일리아에 도착한 후 이민자들은 그를 기려 마을을 "한도르프(Hahndorf)"라고 명명했다. 이는 선장의 성 "한(Hahn)"과 독일어로 마을을 뜻하는 "도르프(Dorf)"를 합친 이름이었다. 이제 한도르프는 신앙의 자유를 실현할 새로운 터전이 되었다.
이민자들은 독일에서의 농업 경험을 살려 포도와 과일을 재배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아울러 독일식 주택을 짓고, 독일어로 예배를 드리며 신앙을 지켜갔다. 이렇게 한도르프는 독일 전통이 깃든 독특한 마을로 자리 잡았다.
한도르프가 안정되면서 더 이상 박해는 없을 것 같았다. 비 온 뒤 무지개가 뜬다지만 어떤 하늘엔 먹구름만 남는다. 한도르프가 그랬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독일이 연합국의 적국이 되자 호주 전역에 반독일 정서가 퍼졌다. 독일계 이민자들은 차별과 박해를 겪었고, 1917년 호주 정부는 독일 정체성을 지우기 위해 마을 이름을 ‘암블턴’으로 강제로 변경했다. 독일어 사용이 금지되었으며 학교와 교회에서도 영어로만 교육과 예배가 가능했다. 독일어 서적과 신문 소유가 금지되고, 일부 주민들은 강제 수용소에 구금되었으며 독일 스파이로 의심받아 감시와 심문을 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한도르프 주민들은 독일 문화를 숨기며 경제적 배척 속에서 살아야 했다.
세계대전 이후, 한도르프는 독일적 정체성을 다시 회복하기 시작했다. 마을 이름도 "한도르프(Hahndorf)"로 돌아왔고, 독일 문화에 대한 인식 또한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20세기 중반부터 한도르프는 독일 전통을 보존하며 관광 자원으로 활용해 경제 회복을 모색했다. 옥토버페스트와 같은 독일 문화 축제를 통해 전통을 널리 알리며 오늘날 고유의 매력을 품은 마을로 자리 잡았다.
그들의 항해는 도피가 아닌 자신들의 신념을 관철하려 한 모험이었다. 5개월 간의 항해는 그 어떤 종교 박해보다 거칠었다. 상상해 보건대 그 여정이 끔찍했음이 분명하다. 배 위에서 거친 풍랑을 만나고, 굶주리고, 전염병에 괴로워하는 동안 희망을 잠시 잃기도 했을 것이다. 눈앞에서 자신의 가족, 친구, 이웃이 죽어가는 과정을 보아야 했을 것이다. 전염병을 막아야 하니 시체는 바로 바다에 버렸을 듯싶다. 그 과정에서 자신들이 내린 선택에 흔들렸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믿는 것뿐이었다. 자신의 선택을 믿고, 집단의 연대를 믿고, 자신의 신념(그들에겐 종교적 신념이었을)을 지켜나가는 서사를 믿었을 것이다. 그 믿음을 기도로 만들든, 사회적 연대로 만들든, 다 같이 전통 민요를 부르며 만들든. 결국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오로지 자신을 믿고 견뎌내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희망을 놓지 않았고, 결국 호주에 이를 수 있었다. 그 후에 들이닥친 역경에서도 자신들의 정체성과 신념을 관찰했다. 결국 오늘날 독특한 문화를 꽃피우며 오늘날 많은 관광객이 찾는 매력적인 장소를 일구어냈다. 오늘날 그들의 서사는 마을의 긍지가 되었다.
그때는 내가 느꼈던 고양감의 원천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어떤 막연한 희망이 내 안을 가득 채웠다. 그 희망이 내가 내린 선택을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도록 이끌었다. 지금 생각해 보건대 한도르프 마을의 조상들처럼 나 또한 내 선택을 믿고 관철한다면 언젠가는 나만의 매력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이었던 것 같다.
자전거 여행이 가져다줄 모험과 경험이 무엇일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여정이 내게 반드시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임은 분명했다. 어쩌면 이 여행을 통해 내 삶의 진정한 목표나 꿈을 발견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품었던 것 같다. 불확실함 속에서도 그 기대감은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물론, 내가 내린 선택이 과연 옳은 것인지 불안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한도르프의 조상들이 자신들의 신념을 믿었던 것처럼, 나 또한 나 자신을 믿기로 했다. 그들의 항해가 신앙의 자유라는 명확한 목표를 향했던 것처럼, 나의 여정 역시 나만의 신념과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외부에서 주어진 명분이 아닌, 스스로 만들어가는 나만의 길을 찾기 위한 여정이었다. 내 여행은 단순히 자전거를 타고 새로운 장소를 탐험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 자신을 다시 세우고, 스스로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기존의 삶에서 벗어나 무너져 가던 나를 다시 일으키기 위한 노력이었다. 나는 그 여정을 통해 삶의 가치와 방향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때 나는 선택이 쌓여 결국 나만의 이야기가 될 것임을 믿어 보기로 했다.
내 자전거에게 지온(Zion)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두 바퀴로 하는 항해에서 앞으로 수없이 흔들릴 것 같았다. 내 여행과 별개로 마주해야 할 현실은 변하지 않을 테니. 하지만 그때마다 결국 내 신념을 지키기 위한 선택들이 결국 나의 정체성을 지켜줄 거라 믿어 보기로 했다. 이 여행을 끝에서 무언가 깨달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들었다. 어떤 가치를 깨닫지 못해도 훗날 내 성찰의 좋은 밑거름이 될 것임은 분명할 터였다. 나는 지온과 함께 더 힘차게 호주를 질주했다. 내 자전거 여행의 진정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