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가장 행복했던 기억은 무엇인가요?

후회가 다짐이 될 때

by Ted 강상원

나의 고모님: 후회가 다짐이 될 때



"나는 어두운 그늘을 조금이라도 걷어내기 위해 머리를 굴렸고, 내 눈동자는 한없이 흔들렸다. 이런 내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고모님은 도리어 위로해 주셨다."



#김밥


초등학교 운동회 때 고모님과 어머니께서 김밥을 잔뜩 싸 오신 적이 있었다. 다만 그 김밥을 학교에서 먹지 않고 그대로 집으로 가져가야 했다.


1990년대 중반 몇몇 초등학교에서는(당시 국민학교) 학생 수가 많아 오전 오후반으로 나뉘어 수업을 했다. 그 때문이었을까? 당시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운동회 당일 1, 2학년 학생들은 오전 행사만 진행하고 귀가하도록 돼 있었다. 즉, 도시락을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이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 어머니께 언제가 운동회 날이니 김밤을 싸야 된다고 했다. 아마 학교에서 나누어 주었던 가정통신문 또한 드리지 않았던 것 같다.

어머니와 고모님은 도시락을 얼마나 많이 준비하셨는지 도시락이 담긴 봉투를 한쪽씩 나눠 들고 오셨다. 결국 목적성을 달성하지 못한 도시락은 다시 집으로 향해야 했다.


“덜렁대지 말고, 꼼꼼히 확인했어야지. 고모 이른 아침부터 김밥 싸느라 얼마나 고생하셨는데”

“동서, 괜찮아 괜찮아.”


어머니께서는 고모님을 번거롭게 해 죄송스러웠는지 나를 혼내려 하셨지만, 고모님은 괜찮다며 어머님을 달래셨다.



#내 새끼 잘 다녀와


어느덧 나라의 부름을 받을 나이가 되었고, 오지 않을 것 같던 입대 날이 다가왔다. 입대 당일 고모님 두 분(아버지 손 윗누이, 손아래 누이)과 셋째 큰어머니 그리고 친구 2명이 논산까지 내려와 나를 배웅해 줬다. 나는 친구들의 놀림과 격려를 받으며 빨간 모자를 눌러쓴 조교 앞으로 향하려 했다. 연병장으로 향하기 전 고모님께 인사를 드리려 했는데 고모님이 안보이셨다. 연병장의 조교는 입대하는 사람은 신속히 내려오라며 소리치고 있었다. 서둘러 내려가야 했는데 고모님은 어디 가셨는지 보이지 않았고, 할 수 없이 인사는 못 드린 채 입대해야 하는 줄 알았다. 그러던 와중 고모님 두 분께서 돗자리를 들고 저 멀리서 과자를 잔뜩 사들고 오시고 계셨다. 고모님께서는 들어가기까지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는 줄 아시고, 근처 슈퍼에서 과자를 잔뜩 사 오셨다. 고모님 두 분(큰 고모님, 작은 고모님)은 과자를 얼마나 많이 사 오셨는지 과자가 담긴 봉투를 한쪽씩 나눠 들고 오셨다. 돗자리까지 펼치시는 모습을 보며 나는 웃었고, 감사하다는 말을 드리며 아쉽지만 지금 바로 가야 한다고 했다. 먼 곳까지 같이 와 나를 배웅해 주신 어른들께 감사 인사를 올리며 어른들과 포옹을 나눴다.


“어이구, 내 새끼 건강하게 잘 다녀와.”


유독 큰 고모님의 인사와 포옹이 따뜻하고, 묵직하게 다가왔다.


기억도 잘 나지 않을 4~5살 무렵부터 우리 집은 큰고모님 댁에서 가까운 곳에 살았다. 단칸방에서 4 식구가 옹기종기 누워서 잠들었고, 매일매일 가족들과 짧은 수다로 하루를 마무리하던 시절이었다. 유치원을 다녀와 집에 아무도 없을 때면 고모님 댁으로 향했다. 주말이면 고모님 댁 마당에서 함께 고기를 구워 먹었다. 동생이 태어날 무렵에는 고모님 댁에서 지냈고, 매일매일 내 숙제를 도와주셨다. 그 작은 아이는 어느덧 고모님보다 훌쩍 커서 나라의 부름을 받았다. 덩치는 고모님보다 커졌지만, 고모님의 품은 여전히 한없이 넓고, 깊었다. 초등학교 2학년, 운동회 때 김밥을 싸 들고 오신 고모님을 보며 손을 흔들던 나는 또다시 고모님을 향해 예전보다는 조금 더 크게 손을 흔들며 연병장을 돌았다. 주머니 속엔 고모님께서 챙겨주신 초콜릿 바가 들어있었다.



#고모 괜찮아


입대 당일날부터 제대 후의 삶을 다짐했다. 고모님께 은혜를 갚기 위해 군 생활 이후의 인생 계획을 매일매일 세웠다. 그리고 고모님을 정말 호강시켜드리고 싶었다.


순식간에 이등병 생활이 지나갔다. 일병 진급을 앞두고 나온 휴가 때 고모님을 찾아 인사드렸다. 휴가 복귀 후 일병으로 진급했고, 보이지 않을 전역 날을 곱씹고 있었다. 그날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군 생활을 한탄하며 여느 날과 같이 부대 내에서 작업하던 날이었다. 일과를 마치고 어머님께 안부차 전화를 드렸다.


“상원아 놀라지 말고 들어. 고모 암 말기래.”


한 달 전 휴가 때 너무도 건강한 모습으로 나와 식사를 하셨던 기억이 나 믿기지 않았다. 고모님과 같이 먹었던 음식, 고모님 표정, 내게 해주신 애정이 어린 이야기가 생생했다.


부대에 허락을 받고 그 주 주말에 바로 외박을 나갔다. 군복을 입은 채로 늠름한 모습을 보여드리면 고모님이 조금이나마 기운을 차리시지 않을까 하여 부대에서 병원으로 바로 출발했다. 병실에 들어가기 전까지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으려 노력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고모님께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어떤 위로를 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하기만 했다. 이런 내 약하디 약한 마음마저 이미 헤아리셨는지 고모님께서 나를 보자마자 건넨 첫 한마디에 눈물을 참기 바빴다.


"상원아, 고모 괜찮아"


결코 괜찮지 않아 보였다. 한 달 사이 머리는 반 이상이 빠져있었고, 안색은 검붉었으며 무엇보다 고모님이 정말 이제는 얼마 못 사실 것처럼 보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고모님은 나를 먼저 걱정하셨다. 행여 나의 걱정이 지나쳐 내가 슬퍼하고, 괴로울까를 염려하시며 나에게 괜찮다는 말을 먼저 건네셨다. 괜찮지 않은 상황을 괜찮음이라 하는 역설된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언어를 찾아 헤맸다. 최대한 고모님이 기운을 차리실 만한 말이 무엇이 있을지 계속 고민했다.


미리 얘기를 들어 알고 있었지만, 고모님의 손 끝을 보니 더욱더 고모님께 드릴 언어를 찾기 힘들었다. 항암치료로 인해 면역력이 약화되면 평범한 바이러스 균도 피부 괴사를 일으킬 수 있었다. 고모님의 경우 손가락 끝마디가 그랬다. 한 달 전 군생활 잘 하라며 내게 줄 용돈을 쥐고 있던 손은 어느새 링거 바늘 자국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 손은 암세포와 처절하게 전쟁을 치른 병사처럼 두 마디쯤 를 잃은 채 반창고가 감겨 있었다.


죽음의 병마와 싸우고 있는 사람에게 건넬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그 사람에게 위로와 힘이 되고자, 건넬 언어를 끊임없이 찾는 우리는 우리 안의 선한 본성을 발현하는 것일까? 반대로 나약해진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한 발악일까.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 했던가. 발현과 발악 사이에서 몸부림치는 인간의 모습은 애처롭다 못해 가끔은 우습기도 하다.


고모님의 얼굴에는 짙은 그늘이 져 있었고, 그 그늘이 짙어지며 죽음의 그림자가 점점 다가오는 듯했다. 그리고 그 그림자가 짙어진 만큼 고모님은 나약해져 있었고, 이를 애써 위로하려는 나는 더 나약했다. 나는 어두운 그늘을 조금이라도 걷어내기 위해 머리를 굴렸고, 내 눈동자는 한없이 흔들렸다. 이런 내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고모님은 도리어 위로해 주셨다.


“상원아, 고모 괜찮아.”

누나(고모님 딸)는 병원 지하에 있는 식당으로 나를 데려가 밥을 사주며 고맙다고 했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누나는 무엇이 고맙다는 것일까?’


복귀 후 고모님 생각에 머리가 복잡했다. 여전히 고모님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무력감이 밀물처럼 들어와 무릎을 덮고 심장을 짓눌렀다. 자주 전화를 드리고 싶었지만 되려 내가 다시 위로만 받을 것 같았다. 더욱이 고모님은 점점 전화를 받기 힘드셨다.


퀴퀴한 곰팡내가 깔린 보일러실에서 고모님을 위한 편지를 썼다.


‘그동안 자주 표현 못 했지만 고모님께 항상 감사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고모님은 제게 어머니입니다.‘

‘저도 힘내서 군 생활 잘할 테니 고모님도 힘내시길 바랍니다.’

‘제대만 하면 꼭 호강시켜드릴게요.’


젊은 날 치기 어린 문장을 하나씩 써 내려갔다. 고모님을 향한 응원의 글이자 나 자신을 위한 말을 한 글자 한 글자 눌러 새겼다.


시간은 흘러 나는 제대를 했고, 다행히 그때까지는 고모님이 세상과 작별을 하지 않으셨다. 고모님을 찾아뵐 때마다 고모님과 인사하기 힘들었다. 점점 악화하는 병세에 통화도 힘들었고, 병문안 온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어느덧 고모님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은 적이 언제였는지 가물가물했다. 병실에서 잠들어 있는 고모님이 내가 본 고모님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후 나는 필리핀으로 어학연수를 떠났고, 몇 개월 뒤 그해 가을이 찾아올 무렵 고모님은 하늘의 별이 되었다. 어머니로부터 고모님의 별세 소식을 들은 건 고모님이 돌아가신 지 며칠이 지나서였다.



#어머니 자연, “괜찮아, 괜찮아”


호주에서 자전거로 로드 트립을 했다. 말 그대로 대자연을 가로지르며 호주라는 대륙이 내뿜는 공기를 있는 그대로 만끽하는 여행이었다. 여행 일정 중 유독 풍경이 벅차오르는 구간이 있었다. 절벽 위에 있는 해안도로를 달렸는데 초원과 바다가 가득했다. 나는 내 왼쪽에 펼쳐진 광활한 대지의 초목과 오른쪽에 펼쳐진 푸르른 우주가 넘실거리는 듯한 해양 사이를 자전거로 가로질렀다. 암수 양 한 쌍이 정답게 뛰놀 듯 구름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맑디 맑은(淸雅) 하늘을 수놓고 있었고, 나는 대자연의 품에 안겨 바닷냄새를 맡으며 풀잎이 불어주는 바람을 온몸으로 느꼈다. 어머니 자연의 품에 안겨 자전거 여행만이 줄 수 있는 행복을 만끽했다. 나는 잠시 자전거를 멈추고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혼자 여행을 하면 자연스럽게 사색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이는 칠흑의 어둠에서 여러 자아들을 조금씩 더듬어 가며 내면의 깊은 욕망으로 향하는 과정이다.


호기롭게 호주에 왔는데 막상 이룬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한국에 돌아간다면 무엇을 해야 할지, 지난 내 2년 남짓한 호주 생활은 시간 낭비는 아니었을지 등 군대 전역을 앞둔 말년 병장처럼 말 그대로 막막함을 느끼고 있었다. 친구들은 어느덧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고, 가정까지 꾸린 이들도 몇몇 있었다.


꿈을 이루기 위해, 나를 찾기 위해 호주라는 곳을 택했다. 국내에서는 경험해 보지 못할 일들이 나를 성장시켜주고, 내가 원하는 삶 혹은 꿈이라 부를 만한 무엇인가를 찾게 해 줄 줄 알았다. (생각해 보면 공자님께서는 60이 되어서야 이제 나를 조금 알겠다고 하셨는데, 당시 30년도 살지 않은 내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해답을 찾아낸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막막함에 막막함이 더 해져 지난날 후회스러운 일들이 갑작스레 몰려왔다. 눈앞에 보이는 저 잔잔한 파도가 어느새 큰 해일로 변해 있는 듯했다. 그리고 후회와 그리움이 묻어있는 기억이 조금씩 떠올랐다.


문득문득 사색의 마디에서, 보고 싶은 고모님의 얼굴, 목소리, 나를 안아주던 품이 피어올랐다. 생각에 생각을 더 할 무렵 그리움의 색은 더 선명해졌고, 후회되는 순간이 더 짙게 다가왔다.


고모님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임종을 지켜드리지 못한 죄책감과 고모님께 그간 받은 애정 어린 기억이 함께 다가왔다. 더는 고모님께 내가 해드릴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무거웠다. 앞으로 내가 사회해서 밥벌이를 하며 받는 돈이 얼마이든 고모님께 만원 한 장 용돈으로 드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따뜻한 밥 한 끼 조차도 대접할 수 없음을 느꼈다. 후회가 꼬리를 물어 또 다른 후회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답답한 마음을 떨쳐내고 다시 자전거에 올라타려 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그 바다를 떠날 수 없었다.


절벽 넘어 바다를 바라보며 머리를 비우려 했지만, 그 바다는 내가 고모님과의 기억을 계속 더듬게 했다. 나무 그늘에 앉아, 바다를 타고 절벽을 거슬러 올라오는 바람을 느끼며 고모님과의 지난날을 회상했다. 가시는 모습을 못 본 회한이 고모님을 향한 그리움에 묻혀 깊은 한숨으로 토해질 때쯤 이마를 스치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대자연을 바라보며 회상을 거듭할수록 왜 고모님 기억이 유독 더 짙게 떠올랐는지 알 수 있었다.


자연은 어떤 형태로든 그 현상에 동기를 갖지 않는다. 자연은 그저 그 상태로만 존재하고, 비슷한 행위를 반복할 뿐이다. 늘 지구가 같은 방향으로 돌고, 계절이 순환성을 지니는 것처럼 자연은 억겁의 세월 동안 우주의 법칙에 따라 그저 그 상태로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그 존재가 지닌 거대함으로부터 우리는 경외를 느낌과 동시에 어떠한 위로, 힐링, 메시지 등을 전달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일상의 상처를 벗어나 늘 그대로 있어주는 자연이라는 어머니에게 간다. 예쁜 꽃들의 살랑거림으로부터 기분 좋은 추억을 떠올리고, 파도소리의 잔잔함으로 힐링을 받기 위해.


그날의 여행에서 내가 자연으로 받은 위로는 마치 고모님의 것처럼 다가왔다. 고모님은 내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자신이 괜찮다고 하셨다. 내 불안을 감싸주기 위해 잘 될 거라며 괜찮다고 해 주셨다. 무조건적 괜찮음이 우리 삶에 정말 도움이 되는 조언인가 하는 의문은 있지만, 무조건적 괜찮음을 건네는 어른이 있다는 사실은 내게 큰 힘이 되었다.


어쩌면 ‘괜찮아, 괜찮아’라는 말보다는 나의 불안을 달래주려는 그 사람의 진심 어린 태도, 헤아림이 가득한 배려가 위로로서 다가오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평생에 걸쳐 나에게 그런 말과 태도를 보여주신 고모님은 그 무엇보다 내게 힐링이었다. 대자연의 어머니로부터 우리가 괜찮아 괜찮아라는 메세 지적 힐링을 받듯.


고모님과 함께했던 기억과 추억은 푸른 소나무였고, 선선한 바람이었고, 따스한 햇살이었다. 고모님의 ‘괜찮아’는 내게 잔잔하면서도 큰 울림이 있는 파도였고, 아무런 조건 없이 건네는 고요함과 평화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단단한 믿음과 응원이었다. 그 멈추지 않고, 반복되는 자연의 행위에서 사람들이 힐링을 받듯 고모님의 시선, 손길, ‘괜찮아’라는 말 한마디는 내 삶의 지속적인 힐링이었다. 그 힐링으로부터 나는 나의 후회를 다짐으로 바꿔나갈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나의 미숙함에 ‘괜찮아, 괜찮아’를 건네며 나를 치유하며 살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책과 후회로 망가진 내 자아의 일부에 공감을 건네도 괜찮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고모님은 내게 끊임없이 ‘괜찮아 괜찮아’라고 건네는 어머니이자 대자연이었다. ‘그래도 괜찮아 괜찮아’라는 상투적 위로가 아닌, ‘그래도 괜찮아’라는 진심 어린 태도와 이를 평생 보여준 존재였다.


그날의 여행에서 나의 불안은 눈앞의 푸른 우주를 해일로 바꾸었지만, 고모님의 ‘괜찮아’라는 말은 이를 다시 잔잔한 파도로 바꾸었다. 어느덧 해일은 다시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부드럽게 넘실거리고 있었다.



#후회가 다짐이 될 때


다짐은 한순간에 일어나지 않는다. 지나간 후회를 깊이 반성하고 고민하는 서사가 쌓이면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다짐은 발생이 아니라 피어남이다. 어느 날 문득 떠오른 과거의 기억이 진한 잔상으로 점점 변하는 듯한 날이 있다. 이를 계기 삼아 그 잔상이 더욱더 진해지는 이유가 무엇인지 자기 안의 지하실로 한발 한발 내디뎌 가다 보면 마음속 깊은 욕망을 마주하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는 과거의 우리가 느꼈던 감정을 더욱더 선명하게 알게 되고, 자아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진다. 지하실 깊숙이 숨어있던 거울 속의 또 다른 나 혹은 그 당시의 나를 비추고 있는 거울 앞에 마주 서며 그 경험으로부터 이어져온 나를 되돌아보게 된다. 그렇게 지나간 과거의 후회와 슬픔 좌절 등이 현재의 내 삶까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를 더듬어 가다 보면서 새로운 생각과 감정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러한 후회를 더 이상 하지 않기 위해서, 후회를 한다 하더라도 지나친 후회가 나를 괴롭히는 행위로 이어지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까지 후회스러웠던 근원적인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게 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후회를 조금씩 다짐이라는 방향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다짐을 한다. 후회가 다짐이 될 때이다.


다짐은 고통을 견디는 그 순간에 생겨나지 않는다. 고통에 조금씩 무뎌지는 순간에 떠오르는 것 또한 아니다. 괴로운일을 겪는다 해서 새로운 다짐으로 바로 이어지기는 힘들다. 고통을 딛고 일어서는 순간 혹은 일어서려 노력하는 순간에 하는 작은 결심들이 모이고, 우리의 일상을 꿋꿋이 해나가면서 다짐은 피어날 준비를 한다. 진정한 다짐은 온전한 고통을 담아내는 자아를 조금씩 분리시켜 지하에 묵힌 뒤에 몇 년이 지나서야 하는 것이다. 문득 깊은 어둠 속의 자아가 이제는 준비가 됐다 할 때 현재의 나를 불러내며 대화를 나누고 새로운 다짐을 하게 돕는다. 여기에 나에게 위로가 되었던 여러 기억들이 적절히 추가되면서 이루어진다. 다짐은 그런 것이다. 극적인 순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닌 하루를 살아가는 어느 날 문득. 후회스러웠던 기억과 그때의 자아가 내게 노크를 하고, 나에게 위로가 된 또 다른 기억과 경험이 더해질 때. 퇴근길 지하철에서 바라보는 노을빛에서. 햇살 좋은 날 산책하러 나온 노부부의 뒷모습에서. 아이의 손을 잡고 학교에 데려다주는 부모의 표정에서. 대자연의 장관을 바라보며 문득 떠오른 사랑하는 사람과의 추억으로부터. 다짐을 피어나게 만드는 것은 어쩌면 추억이다. 어쩌면 후회가 다짐이 되는 순간일지도.


내게 있어 새로운 다짐을 하게 된 계기는 문득 어느 날이었다. 호주에서 홀로 자전거 여행을 하던 어느 날. 문득 내게 찾아온 고모님은 여전히 내게 괜찮다며 위로를 건네주셨고, 후회를 다짐으로 바꿔 나가며 살아갈 용기를 주셨다. 2년 전 내가 호주로 향하기로 한 결심은 꿈을 찾기 위한 여정이 아닌 현실 도피였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주는 불안의 외면이었다. 호주에서 보낸 내 서사는 방황의 서사였다. 이 불안과 걱정이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았지만 자전거를 벗 삼아 바다를 바라보며 용기를 내 볼 수 있었다. 방황한 과거 또한 내 삶의 일부임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다짐을 할 수 있었다. 호주에서 보낸 나날이 시간낭비라 여겨졌지만 그럼에도 나를 미워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눈앞의 바다는 여전히 내게 ‘괜찮아, 괜찮아’라는 위로를 건네고 있었다.


바다를 타고 절벽에서부터 부는 바람이 제법 스산해지기 시작할 때쯤 나는 다시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별 하나의 추억과

별 하나의 기억

그리고 나의 고모님


6첩 방 남의 나라에서 시대를 슬퍼한 망국의 시인은 세대를 넘어서도 그리움을 감싸준다.


2019년 여름. 휴가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고모님을 모신 분향소에 들렀다. 유골함 앞에서 메이는 목을 부여잡고 인사를 올렸다. 기분 탓이었을까? 고모님의 따뜻한 인사가 귓전을 울렸다.


“어이구, 내 새끼 왔어. 고모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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