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계획은 그럴싸했다. 한 대 처맞기 전까지3

#나의 계획은 완벽했다. 한 대 처맞기 전까지

by Ted 강상원

#나의 계획은 완벽했다. 한 대 처맞기 전까지


나는 한인 커뮤니티에 올라와 있는 한인 잡(한국인 고용주 밑에서 일하는 일. 주로 새벽 마트 청소, 바닥 타일 설치 등)을 하기로 했다. 호주에 갔다 온 사람은 알겠지만, 한국인 고용주 밑에서 일하면 최저 시급보다 낮은 급여를 받는다. 최악의 경우 돈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고생만 할 수 있다(물론 정당한 대우와 함께 친절한 고용주도 있다). 이런저런 이유를 떠나서 나는 한국 사람과의 접촉을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호주에 있는 동안은 최대한 영어를 많이 쓰고 싶었고, 한국에서와는 다른 경험을 하고 싶었다. 한국인 밑에서 일한다면 내가 먼 이국까지 온 이유가 없었다. 학비도 모아야 했지만, 영어 연습과 색다른 경험이라는 두 마리 토끼가 내 목표 1순위였다. 그렇기 위해서는 한국인과의 접촉을 최대한 피하는 것이 좋을 거라 생각했다.


미국의 영화학교에서 장학금을 타며 학업을 이어나갈 계획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어는 기본이었다. 아니 기본 이상을 해야 했다. 그곳에 간다면 연출자로서 팀을 지휘하고, 내가 연출하는 방향을 스태프들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하려면 단순히 영어를 할 줄 아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연출자는 배우에게 캐릭터를 설명해야 한다. 촬영팀에게 이 장면이 전달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알려주어야 한다.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작가들에게 말해야 한다. 영화의 색깔이 애매해지지 않기 위해 편집팀과 소통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위해선 내 영어 실력은 더욱 향상되어야 했다. 단순히 외국어를 잘하기 위함이 아닌 연출가로서 내 사상과 철학을 적절한 어휘로 전달하기 위한 필수 무기였다.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 또한 목표였다. 한국에서 경험해 보지 못할 색다른 체험이 미래에 내가 찍을 영화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 다국적 사람들과 어울리고, 그들과 소통하면서 내 세계를 넓히고 싶었다. 연출자로서 그리고 스토리 텔러로서 좋은 이야기를 직·간접적으로 내 안에 쌓는 일이 큰 자양분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한 인간으로서, 한 연출자로서 성장하는 시기를 갖고, 미국의 영화학교에 간다면 좋은 작품을 하나씩 만들어 갈 줄 알았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한인 잡(job)은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호주로 떠났고, 그 결심과 계획은 나를 비웃었다. 그리고 내 목표는 처참히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나의 계획은 정말 그럴싸했다. 그렇게 한 대 처맞기 전까지는.


하는 수 없이 나는 한인 커뮤니티를 이용해 일을 구하기 시작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을까 한 고용주와 연락이 닿은 즉시 채용이 됐다. 숙식 또한 제공됐다. 시급도 적은 편이 아니었다. 마트 청소를 하는 일이었다. 마트가 문 열기 전에 청소를 끝내야 해서 보통 새벽에 출근해 이른 아침에 일이 마무리된다. 낮에 여유시간도 생기니 괜찮은 일자리였다. 1주일 뒤면(호주는 보통 1~2주에 한 번씩 급여가 들어온다) 식사다운 식사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한국인 고용주와 연락을 하고 나서 출근날을 기다렸다. 성실하게 일하면서 돈을 모으고, 남은 시간에 다른 일을 알아봄이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첫 출근날이 다가올수록 그 현실적인 선택에 무기력함이 몰려왔다. 한국을 떠나기 전 호기롭게 한 결심은 그 호걸 같은 기운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아직 패배한 것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이미 결론 난 패배를 인정하지 못함이었을까. 나는 결국 첫 출근을 하루 이틀 남겨두고 사장님께 연락했다. 죄송하지만 출근하기 힘들 것 같다 말씀드렸다. 굳은 결심을 지키기 위한 신념과 그저 고집스러운 객기 사이 어딘가에서 방황하다 내린 결론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난 몇 개월을 되돌아봤다. 호주로 떠나기 전 세웠던 계획. 내가 이루고 싶은 꿈. 하루를 꽉 채우며 살았던 어학원 시절. IELTS 시험을 보던 날. 외국인 친구들과 함께한 해변에서의 파티. 구직활동. 배고픔과 무기력이 커지는 과정.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나는 즉시 밖으로 뛰쳐나갔다. 집 앞에 있는 공원에서 달리고 달렸다. 머릿속을 비우고 땀을 흘리며 내 안에 쌓인 물리적 정신적 노폐물을 밖으로 토해냈다. 근력과 체력이 떨어질 대로 떨어져 금세 숨이 차올랐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는 계속 달렸다. 땀을 흘릴수록 그간 누적된 패배감, 무력감 같은 것이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이를 조금씩 느끼면서 그날 달리고 계속 달렸다. 얼마나 달렸을지 모르지만, 온몸에 땀이 흐르고, 옷이 다 젖을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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