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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문 좀 잘 닫자고요.

나는 결백하다

by 버디나라 나홍석

어제 아주 큰일 날 뻔했다. 퇴근하고 집에 갔는데 와이프가 나를 보며 조곤조곤 이야기를 시작한다. 큰아들도 있었는데 정확히 나의 눈을 주시하며. 와이프가 나에게 이러는 경우는 많이 없는데 한 번 이럴 때면 섬뜩하다. 분명 내가 뭘 잘못한 경우다. 와이프 말은 이랬다, 냉장고 냉동실이 홍수가 났었는데 다행히 점심때쯤 큰아들이 발견하고 처리를 할 수 있었단다. 냉동실을 마지막 연 사람은 어젯밤에 냉동실에서 팥빙수를 꺼내 먹은 나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문을 잘 닫지 않아서 냉동실의 음식들이 모두 해동되어 물바다가 된 것이라고 아주 신이 나서 자신의 추리를 펼쳤다.


의기양양한 눈빛과 살짝 올라간 입꼬리는 '잘 걸렸다. 푸흣, 그것 좀 보라지. 나만 그런 거 아니야'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동안 이런저런 걸로 나에게 지는 경우가 많았던 와이프의 표정은 개선장군이 따로 없었고, 파나마에서 카라스키야에게 4번 다운을 당하고도 일어나 KO 시켜 챔피언이 된 홍수환이었다. 나는 인정할 수 없었다. 나는 항상 잘 닫는다. 어젯밤에 내가 팥빙수를 먹은 건 사실이지만. 아침에 부엌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와이프에게 "아침부터 낮까지 부엌에 있었던 건 당신 아닌가?"라며 그 잘못을 와이프에게 돌렸다. 솔직히 어젯밤 사실이 명확히 생각나지 않긴 하지만. 여하튼 냉동실이 홍수가 났으나 그 물들이 밖으로 안 나와서 천만다행이다. 밖으로 흘러서 목재 마루를 덮치기라도 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경찰이 "지난달 24일 저녁 9시 30분에 뭐 했나?"라고 물으면 용의자는 뭐 했었다고 잘도 얘기한다. 분명 어제 밤일인데 내가 냉장고 문을 정확히 닫았는지 기억이 명확하게 안 나고 입증하지 못하겠다. 사건 사고에 휘말리면 나는 용의자에서 분명 피의자가 될 것이다.


그동안 와이프는 냉장고 문을 잘 못 닫아왔다. 냉장고 문이 잘 안 닫혔다고 냉장고가 경고음을 계속 주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으면 띵띵 거리는 소리가 자주 들렸다. 이틀에 한 번꼴로. Smart Things에서도 알람이 오고. 그럴 때마다 내가 장난 반 진담 반으로 좀 나무라왔다. 그러면 와이프는 냉장고에서 또 뭘 꺼낼 거라며 잔소리 좀 고만하라고 하곤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동안 주로 그래왔으니 이번에도 그랬을 거라고 하는 것은 사례기반 예측이지 '사실'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주로 내가 나무라는 입장이었는데 내가 용의자로 몰리니 일단 와이프에게 던져 놓긴 했는데, 진짜 누가 냉장고 문을 못 닫은 걸까. 궁금하다.


와이프는 일반적으로 문 같은 걸 종종 잘 못 닫는다. 자동차를 타고 내릴 때도 차문을 잘 안 닫아서 계기판에서 문 열림이 디스플레이되고 띠링띠링 소리도 나고. 뭔가 과감하게 탕 닫지 못하고 문이 고장 나거나 다칠까 봐 그런지 소극적으로 닫는다. 착해서 그런가 마음이 약해서 그런가 자주 그런다. 남들에게도 나쁜 소리를 직접적으로 잘 못하는 성격이다. 그런데 이상한 건, 집에 있는 큰아들한테 잔소리는 잘한다. 그래서 큰아들이 힘들어한다. 참 희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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