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컨 센터에서 자연사 박물관까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만큼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주제가 또 있을까요? 서양 문학에서 이러한 작품의 대표 격이 셰익스피어의 비극 <로미오와 줄리엣>입니다. 셰익스피어는 그 이야기의 플롯을 1562년 쓰인 마테오 반델로 (Matteo Bandello)의 비극 <로메우스와 줄리엣의 비극적인 역사>에서 따 왔습니다. 그리고 20세기 들어서 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뉴욕을 배경으로 각색한 뮤지컬이 나와 다시 크게 히트를 쳤습니다. 이것이 당대 미국 최고의 작곡가 및 지휘자였던 레너드 번스타인 (Leonard Bernstein)이 작곡하고 스티븐 손드하임 (Stephen Sondheim)이 작사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입니다. 맨해튼의 어퍼 웨스트 사이드 (Upper West Side)를 배경으로 서로 적대 관계에 있던 포르토리코 (Porto Rico) 이민자 출신 여주인공과 폴란드계 남자주인공 사이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그렸습니다. 1957년 나온 뮤지컬이 대 성공을 하자 1961년 영화가 만들어졌고 이 영화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10개의 상을 휩쓰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역사에 길이 남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미국 문화계에 큰 족적을 남겼으니 2021년 미국의 대표적인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 영화를 다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원작에서 크게 다루지 않았던 어퍼 웨스트 사이드의 역사적인 배경을 더 다루었습니다. 영화 첫 장면에서 레너드 번스타인이 작곡한 서곡이 울려 퍼지면서 폴란드계 깡패 제츠 (Jets) 단원들이 어느 동네의 철거 현장에 하나둘씩 나타납니다. 그곳이 1950년대 이전에 어퍼 웨스트 사이드에 위치하던 포르토리코 이민자들의 동네 산후안 힐 (San Juan Hill)입니다. 뉴욕시에서 이 동네를 철거하면서 그 위치에 새로이 링컨 센터를 지었습니다.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메트로폴리탄 오케스트라, 그리고 뉴욕시 발레단의 공연 시설을 만든 것입니다. 대리석과 유리로 만들어진 멋진 건물들 사이로 분수대와 광장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여름에는 시민들을 위한 야외 행사를 많이 열고 있습니다. 발레 공연이 있는 날에는 정장을 차려입은 할머니들이 발레복장을 입은 어린 손녀들하고 손잡고 공연을 보러 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평소에는 악기를 들고 다니는 젊은이들도 많이 보이는데, 링컨센터 옆에 쥴리아드 학교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곳은 과거 깡패들이 활보하던 못 사는 이민자 동네의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습니다. 링컨 센터의 쾌적한 공간이 있고 또 센트럴 파크와 가깝기 때문에 잘 사는 사람들의 주거지로 변모했습니다.
어퍼 웨스트 사이드는 정확히 얘기하자면 센트럴 파크의 서쪽의 59가에서 110가까지를 아우르는 지역을 지칭합니다. 하지만 링컨 센터 주위를 지칭하는 72가 이남의 링컨 스퀘어와 72가 이북의 동네는 많이 달라 보입니다. 링컨 센터가 1960년을 전후해서 지어졌으니 그 주위에도 그즈음 지어진 1960년대 70년대 아파트들이 많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거기서 더 서쪽으로 가면 허드슨 강가에 2000년을 전후해 지어진 아파트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미국 대통령을 역임한 부동산 업자 트럼프가 지은 아파트 단지입니다. 2016년 트럼프 당선 당시에는 아파트 건물에 대문짝만 하게 트럼프 타워라고 적혀 있었는데요, 정치인으로서의 그의 인기가 뉴욕에서 최악이다 보니 입주민들이 그 간판을 없앴습니다.
어퍼 웨스트 사이드에서 가장 고풍스럽고 으리으리한 아파트들은 72가 주위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지역에 제일 처음 들어선 고급 아파트가 1884년에 지어진 고급 아파트 다코다 (Dakota)입니다. 72가 센트럴 파크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데요, 최고 부자들을 위한 호텔식 아파트로 지어졌습니다. 그 이후에 이 주위에 고급 아파트들이 계속 들어섰습니다. 다코다 아파트 북쪽으로는 1907년 완공된 프랑스 양식의 아파트 랭함 (Langham)이 있고요, 그 바로 북쪽에는 1930년에 완공된 르네상스 양식의 산 레모 (San Remo) 아파트가 있습니다. 산 레모 아파트는 꼭대기에 멋있는 쌍둥이 타워가 있어서 더 눈에 띄는데요, 그 이후에 이 지역에 지어진 많은 건물들이 여기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일단 어퍼 웨스트 사이드 90가 인근에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엘 도라도 (El Dorado)에 비슷한 쌍둥이 타워가 있습니다. 그리고 72가 다코다 아파트 바로 이남에 서 있는 머제스틱 (The Majestic)이라는 아파트도 건축 양식은 확연히 다르지만 쌍둥이 타워가 있습니다. 똑같이 생긴 쌍둥이 타워가 보는 이들에게 크게 어필을 하는 모양입니다. 어퍼 웨스트 사이드 최남단인 59가 콜럼버스 서클에 2000년에 도이체뱅크 센터 건물이 들어섰는데요, 건축 양식은 확연히 다른 현대식 건물이지만 역시 쌍둥이 타워가 있습니다. 그 때문에 센트럴 파크 서쪽의 어퍼 웨스트 사이드는 일련의 쌍둥이 타워가 줄지어 서 있는 특징을 갖게 됐습니다.
19세기말에 다코다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72가 주위의 인프라가 크게 발전했습니다. 아직 전기가 뉴욕시 전역에 보급되기 전인데, 엘리베이터가 있는 고급 아파트가 이 지역에 세워졌으니 거기에 전기를 보급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 어느 지역보다 각종 도시 인프라가 먼저 생겼습니다. 그리고 20세기 초에 지하철 노선이 이곳을 통과하게 되자 자연히 72가에 지하철역이 들어섰습니다. 뉴욕의 지하철역들은 대게 볼품이 없는데요, 72가 역은 고풍스러운 역 건물이 번듯하게 있습니다. 그 지하철 역의 바로 서쪽에 또 으리으리하고 고풍스러운 아파트 건물이 서 있습니다. 1903년에 완공된 프랑스 보자르 양식의 안소니아 (Ansonia) 아파트입니다. 마치 프랑스 파리에 있을 법하게 생겼는데, 건물 벽면에 온갖 화려한 장식이 가득합니다. 그중에는 보행자들을 내려다보는 사람 얼굴 조각이 다수 있는데,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만들기도 하지만 밤에는 섬뜩한 느낌도 들게 하는군요.
어퍼 웨스트 사이드에서 건물 높이가 15층쯤 된다면 20세기 초반 건물들이 많고요, 3층에서 5층 사이의 높이이면서 에레베이터가 없다면 19세기 건물들입니다. 저희 가족은 1920년에 지어진 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만 그 나름대로 장단점이 있습니다. 일단 건물이 견고하고, 집의 천장이 높은 장점이 있습니다. 반면 단점도 있습니다. 제가 취미로 피아노를 치는데요, 이웃집 초등학생 아이가 놀러 와서는 한마디 해서 건물이 층간 소음에 취약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아저씨 지금 치는 게 대니 보이 <Danny Boy> 아니에요?”
“어. 네가 이 노래를 어떻게 알아?”
“아저씨 똑같은걸 밤낮 치시잖아요.”
그 이후 이웃들이 피아노 얘기를 꺼내면 더욱 긴장이 됩니다.
“아이들이 피아노를 치나 봐요. 근데 나이 든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곡들을 치네요”
어퍼 웨스트 사이드는 주거지역이지만 사람들을 끄는 명소들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 대표적으로 79가 센트럴 파크 옆에 위치한 미국 자연사 박물관 (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이 있습니다. 19세기 후반에 들어선 박물관인데요, 원래 그 입구에 테오드르 루스벨트 (Theodore Roosevelt)의 동상이 있었습니다. 루스벨트가 말 위에 멋지게 앉아 있고 그 옆에 왼쪽으로는 미국 원주민이, 오른쪽으로는 흑인이 주인님 떠 받들 듯 서 있는 동상이었습니다. 20세기 초 인종차별적 사회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한다는 불평 때문에 몇 년 전 결국 철거됐습니다. 동상은 철거됐지만 이 박물관에서 루스벨트의 위상은 여전합니다. 젊은 시절 하버드 대학에서 자연사를 공부했고, 사냥을 즐겼습니다. 박제를 만드는 법도 배웠습니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미국 서부에서 사냥을 많이 했고 대통령 퇴임 직후에는 아프리카 사파리에서 수많은 동물을 사냥했습니다. 그때 박제로 만든 동물들의 일부가 이곳 미국 자연사 박물관에 전시돼 있습니다. 루스벨트가 크게 기여한 박물관이니 포유동물 전시장이 이곳에서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박제가 된 커다란 짐승들도 대단하지만 그 뒷배경으로 그려 넣은 그림들이 이 박제들을 더욱 실감 나게 만듭니다.
이 박물관은 공룡 화석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도 많이 찾습니다. 이 건물에 처음 들어서면 반원형의 지붕이 있는 테오도르 루스벨트 로톤다 (Theodore Roosevelt Rotunda)라고 명명된 공간이 나옵니다. 거기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잘 보존된 공룡 화석들입니다. 이 박물관이 제일 자랑하는 소장품처럼 보입니다. 공룡 화석 중에서도 제일 유명한 티 렉스 (T. Rex)를 처음 발견했다는 바룸 브라운 (Barum Brown)이 이 박물관 소속 고생물학자였다고 합니다. 그가 몬타나에서 1902년 발견한 티 렉스 화석을 비롯해, 브론토사우루스, 아파토사우루스, 에드모토사우루스, 그리고 매머드 화석, 멸종된 말 화석 등이 이 박물관의 4층을 가득 매웁니다. 예로부터 유명 학자들이 이 박물관 소속으로 활약을 했고, 지금도 여기에서 박사학위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마 전 보존이 무척 잘 된 공룡 화석이 발견됐다는 뉴스가 들려왔는데, 이 발견의 의미를 방송에서 열심히 설명하던 한 공룡 전문가도 자신이 이 박물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하더군요.
박제와 공룡으로 특히 유명하지만 이 박물관은 천문학, 지질학, 생물의 다양성, 그리고 인류학 전시도 인상 깊습니다. 태평양 여러 섬의 원주민을 연구한 인류학자로 20세기에 크게 명성을 떨쳤던 마가렛 미드 (Margaret Mead) 박사가 이 박물관 큐레이터였고, 현재 이곳의 태평양 지역 전시실이 그의 이름을 따서 마가렛 미드 전시실이라고 돼 있습니다. 다른 지역 사람들을 소개하는 전시실도 있는데요, 그중에는 한국의 사랑방을 소개한 것도 있습니다. 한때 세게 무역의 중심지였던 중국 시안을 축소판으로 만든 것과, 그리고 우리의 친척뻘 되는 시베리아 원주민 무당을 묘사한 전시물이 제 기억에 남습니다.
어퍼 웨스트 사이드는 행정구역상으로는 110가까지 이어지지만 95가 이북으로는 동네가 바뀌는 느낌이 듭니다. 암스테르담 애비뉴를 따라 북쪽으로 걸어가면 95가 이북에서부터 사람들의 피부색이 짙어지는 것을 확연히 볼 수 있습니다. 이 지역에는 전통적으로 중남미 계통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거든요. 저는 젊은 시절 104가에 위치하던 한 영화 극장을 애용하면서 이곳의 다른 문화를 실감했습니다. 영화가 시작하며 주요 인물들이 처음 등장할 때마다 관객들이 큰 소리를 내며 환호를 하고 박수를 치더군요. 그리고 영화 후반부에서 악당을 무찌르는 장면이 나오면 다시 우레와 같은 환호 소리가 들리고요. 마치 시끌벅적한 동네 페스티벌 현장에서 영화를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조용히 영화를 보는 백인 동네 분위기와는 확연히 달랐어요. 혹시 빠른 템포의 음악에 정열적인 댄스를 추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후예들이 산 후안 힐이 철거되면서 이곳으로 많이 이사 왔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혼자 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