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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형돈 Aug 19. 2024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 전하는 5천 년의 서양 미술사

서양 미술 역사의 내러티브

절세의 미인의 아름다움이 십여 년쯤 가고, 군주의 절대 권력이 수십 년쯤 가고, 세계를 지배하는 제국의 흥망성쇠가 수백 년쯤 걸린다면, 수천 년이 지나도 우리를 변함없이 감동시키는 것은 예술 밖에는 없습니다. 뉴욕이 자랑하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은 지난 5천 년에 걸쳐 형성된 세계 미술사를 한눈에 보여준다고 자랑합니다. 미술의 문외한이었던 저는 이 박물관을 통해서 그 미술사의 기초를 배웠습니다. 서당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하던가요? 이 박물관을 30 년간 드나들던 제가 나름대로 이해하게 된 그 미술사의 내러티브를 여기서 간단히 소개하겠습니다.


이 박물관에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전시물은 이집트 파라오의 석상입니다. 매표소 앞에 있는 석상이니 표를 구입하지 않고도 볼 수 있는 전시물입니다. 수많은 예술품 중 왜 하필 이집트의 석상을 이 박물관의 가장 눈에 띄는 장소에 배치했을까요? 이 박물관은 5천 년의 세계 미술사 흐름을 보여준다고 자부하는 곳입니다. 5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곳은 우리나라를 포함해 많이 있습니다만, 나무로 지은 문명은 그 흔적을 남기지 못합니다.  반면 이집트는 5천 년 전쯤 그 당시 새로운 건축 및 예술 문화를 꽃피우면서 돌을 주요 재료로 사용했습니다. 5천 년이 지난 지금 세계 문화유산으로 남아있는 피라미드뿐 아니라 오벨리스크와 파라오의 석상들이 거대한 돌들로 만들어졌기에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박물관 전시실에는 석상들 이외에도 무덤에서 가져온 나무로 만든 관들도 있습니다. 이집트의 사막성 기후 때문에 나무가 썩지 않아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전시하는 5천 년의 미술사 중 첫 2천 년은 거의 대부분 이집트 예술품들입니다.


세계 미술사의 역사 5천 년 중 그 과반이 넘는 3천 년이라는 기간 동안 이집트 미술은 번성했습니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그 기나긴 세월 동안 미술 스타일의 변화가 거의 없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파라오의 복장도 3천 년간 거의 똑같고요, 그들이 숭배하던 신들도 거의 똑같습니다. 자세히 보면 석상들의 포즈도 그 기간 동안 변하지 않았습니다. 의자에 앉아 정면을 응시하는 포즈가 많습니다. 남자들은 떡 벌어진 어깨와 근육을 강조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고 한다면 중간에 여자 파라오 석상이 있다는 것 정도일 것입니다. 기원전 1500년경에 나타난 하트셉수트를 묘사한 석상이 있는데 허리가 잘록한 여성인 것이 분명하지만 앉아 있는 포즈와 파라오의 왕관은 여느 파라오 석상과 같은 양식입니다.  

이집트 덴두르 신전

이집트 전시관 끝에 도달하면 커다란 실내 광장이 나타나고 거기에는 이집트에서 통째로 옮겨온 석조 신전이 있습니다. 원래 이집트 나일강 상류의 누비아 (Nubia)에 있던 덴두르 신전 (Temple of Dendur)입니다. 고대 이집트 문명 말기였던 기원전 31년,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 (Cleopatra)와 사랑에 빠졌던 로마 장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Marcus Antonius)를 제압하고 이집트를 로마 제국의 일부로 복속시킨 아우구스투스 (Augustus) 황제의 지시로 지어진 신전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덴두르 신전의 표면에는 기원전 3천 년 전부터 계속 숭배해 온 전형적인 이집트 신들의 그림이 세겨져 있습니다. 1960년에 이집트가 이 지역에 아스원 하이 (Aswan High) 댐을 건설하게 되면서 이 신전이 영원히 수몰될 위기에 쳐해 졌는데요, 이때 미국 정부는 이집트 정부와 상의해서 이 신전을 미국으로 옮겨왔습니다. 그 신전을 600여 개의 조각으로 분해한 후, 배에 실어 운송을 한 다음, 미국에서 다시 재건한 것입니다. 원래 미국의 여러 박물관에서 서로 이 신전을 유치하려고 했는데, 야외에 설치하겠다는 제안들은 다 거절당했습니다. 이집트의 사암 (sandstone)으로 만들어진 신전인데 미국에서 비를 맞으면 몇백 년 못 간다는 판단을 한 것입니다. 마침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실내 광장을 새로 조성하고 습도를 낮게 유지하겠다고 제안을 해 와서 이 신전이 이곳에 위치하게 됐습니다. 이 신전이 위치한 실내 광장이 그 때문에 새로 만들어졌는데요, 이 박물관 내에서 제일 쾌적한 공간 중 하나입니다.


고대 이집트 문명은 그 이후 얼마 못 갔지만 이집트 미술은 바다 건너 그리스와 로마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증거가 이 박물관의 그리스 전시관에 있습니다. 기원전 6백 년 전쯤 만들어진 그리스 문명 초창기 남자 석상이 있는데요, 그 포즈가 기원전 2천5백 년쯤 만들어진 이집트 석상과 유사합니다 (아래 사진 참조). 팔은 몸통에 바짝 붙어 있고, 또 왼발을 앞으로 뻗은 포즈를 하고 있거든요. 기원전 6백 년이라 하면 그리스 및 그들의 경쟁자 페니키아인들이 한참 지중해에서 항해술을 발전시키던 시절입니다. 이들이 당연히 이집트를 드나들며 그들의 석상들을 봤을 겁니다. 감명을 받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는 이집트인들처럼 돌로 된 신전과 돌로 된 석상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지요. 초창기 그리스 석상들은 대부분이 근육질의 젊은 남자들입니다. 이집트의 석상들처럼 가슴과 허벅지 근육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이집트 석상과 다른 점이라 하면 벌거벗은 남자 석상이 많은데, 그 당시 벌거벗고 경쟁하던 올림픽 선수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는군요. 당대의 셀럽들이 예술에 영향을 미친 겁니다.

(왼쪽) 기원전 2천5백여 년 전 만들어진 이집트 석상. (중간) 기원전 6백여 년 전 만든 그리스 석상. (오른쪽) 서기 백 년경 만든 로마 여신상

벌거벗은 여성의 석상들은 수백 년이 더 흐른 뒤인 그리스 문명 후반기가 돼서야 출현했습니다. 그 중 특히 유명한 것이 벌거벗은 그리스 비너스 여신이 손으로 몸을 가리는 포즈의 석상들인데, 그리스에서 처음 만들어진 이후 인기를 끌어서 로마 시대에도 비슷한 여러 아프로디테 여신상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포즈의 여신상들을 카피톨리니 비너스 (Capitoline Venus)라고 통칭하는데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도 하나 있습니다 (위 그림 참조). 원래 영국의 더글라스 해밀턴 공작이 18세기 로마에서 구입해 소장했었다고 해서 해밀턴 아프로디테 (Hamilton Aprodite)라고 불리는데요, 오랫동안 그 소재가 잊혀져 있다가 2021년 갑자기 소더비 경매장에 매물로 나타났습니다. 이 석상을 구입한 사람이 2028년까지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이를 대여해 전시하고 있습니다.


박물관의 그리스 로마 전시관을 보면 세월이 지나며 석상들이 더 사실적으로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포즈가 다양해진 지는데, 팔을 안정적으로 몸통에 붙이지 않았던 조각품들 중에서 팔이 떨어져 나간 것들이 많습니다. 아시다시피 로마는 그 제국의 후반기에 가서 기독교를 받아들이는데요, 우상 숭배를 금지하는 종교를 받아들이면서도 신을 묘사하는 석상 만드는 전통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훌륭한 기술로 성모 마리아와 예수를 표현하기 시작하면서 2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되는 가톨릭 예술의 바탕을 제공합니다.


그런데 서기 476년에 로마가 멸망했습니다. 서양 사람들이 암흑기 (dark ages)라고 부르는 중세가 시작된 것인데요, 프로페셔널 예술가들을 후원할 수 있는 돈이 많은 권력층이 사라졌으니 예술의 수준이 이 시기에 확 떨어졌습니다. 수준은 떨어졌지만 그래도 과거 예술의 전통을 중세 교회를 중심으로 계속 이어갔습니다. 이러한 중세 미술을 전문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맨해튼 북부에 위치한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분원인 클로이스터 박물관 (Cloisters Museum)입니다. 클로이스터 박물관은 1929년 조지 그레이 바나드 (George Grey Barnard)라는 미국인 조각가가 1차 세계대전 이전에 프랑스에서 열심히 수집한 중세 조각품들을 중심으로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 그 당시 미국 최고의 부호 존 디 록펠러 (John D. Rockefeller)가 이 소장품들에 관심을 갖고 돈을 대서 현재의 건물을 지었습니다. 록펠러가 지금의 맨해튼 190가 이북에 땅을 사서 포트 트라이온 파크 (Fort Tryon Park)라는 공원을 조성했고, 그 한쪽 끝에 중세의 수도원을 모델로 한 건물을 지어서 거기에 소장품들을 전시한 것이 지금의 클로이스터 박물관이 됐습니다. 허드슨 강이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있는 아주 멋진 곳인데 그 위치가 맨해튼의 중심가와 많이 떨어져 있어 메트로폴리탄 본원에 비해 방문객 수가 적은 편입니다.


서양 문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석조 건축물인데, 이 박물관은 록펠러의 재력을 이용해서 12세기 지어진 중세 교회 일부를 떼어 와서 박물관 건물의 일부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습니다. 스페인의 푸엔티두어냐 (Fuentiduena)라는 마을에 폐허로 남아 있던 교회의 반원형 본당입니다. 이 석조 건축물은 하중을 분산하기 위해 창문을 작게 반원형으로 만든 전형적인 로마네스크 양식의 예배당입니다. 그 정 중앙에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보이는데 중세 조각답게 사실적이기보다는 조금 만화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 뒤의 반원형 돔에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벽화가 보이는데, 역시 중세 미술답게 사람들의 비율이 사실과 조금 동떨어져 있습니다. 중요 인물인 성모 마리아는 크게 그려 놓았고, 반면 덜 중요한 옆의 인물들은 아주 작게 그려져 있습니다.

메트로폴리탄의 분원 클로이스터 박물관에 재건한 스페인 푸엔티두어냐 교회 반원형 본당

왜 록펠러가 이 건물에 특히 관심을 가졌을까요? 서양 건축사를 보면 고대 이집트부터 시작해서, 그리스, 로마 시대까지 중요한 신전과 교회는 모두 돌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석조 건축물 중에서도 지붕이 원형 돔 형태를 한 것이 최고로 대접했습니다. 원형 돔의 모양이 우아하기도 하지만 그 무거운 돌의 하중을 견딜 수 있도록 만들려면 최고의 구조 역학 기술자들이 필요했거든요. 돌로 만든 돔 지붕의 원조가 로마에 있는 판테온이고요, 르네상스 최고 건축물로 꼽히는 피렌체의 대성당이 원형 돔 지붕을 더욱 발전시켰습니다. 미국 국회 의사당을 비롯해서 최고 권위를 세워야 하는 서양 건축물들이 석조 돔 지붕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록펠러 및에서 일하는 미술사학자들이 스페인에 폐허로 남아있는 반원형 돔 교회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18세기 이후 방치 되어 돔 이외의 교회 건물들은 무너져 내린 상태였고, 그 공터는 공동묘지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1935년에 록펠러 측에서 돈을 주고 남아있는 건물을 사겠다는 제안을 했고, 협상이 여러 해 계속됐습니다. 결국 1957년에 양측이 조건에 합의를 하는데, 스페인 측에서 자기네 문화유산을 완전히 팔 수는 없고, 그 대신 장기 대여를 하겠다는 데 서명했습니다. 그리고서는 록펠러 측에서 기술자들을 파견해서 남아 있는 석조 교회를 해체해서 3천 3백여 개 블록으로 나눈 후 배를 이용해 뉴욕으로 가져와서 여기서 이를 다시 재건했습니다. 이 구조물이 클로이스터 박물관 건물의 한 벽면을 이루고 있으니 장기 대여로 가져왔지만 과연 스페인 정부에 다시 돌려줄 날이 올지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군요.


주지의 사실이지만 1400년대부터 이탈리아에서 미술에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돈을 잘 버는 상인 계층이 형성되면서 이들이 교회에 돈을 많이 기부하게 되었고, 교회에서 돈을 받고 일을 하는 프로페셔널 예술가들이 다시 나타나지요. 1400년쯤부터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르네상스가 시작하는데요, 그 이전 1300년대에 조금씩 변화를 알리는 선구자들이 나타납니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는 이 시기의 건축물을 볼 수는 없지만  그림과 조각품을 다수 전시하고 있습니다. 이 박물관 소장품을 통틀어 가장 많은 돈을 들여서 구입했다는 그림이 두치오 (Duccio)라는 화가가 그린 <마돈나와 아기 예수>인데 2004년에 4천5백만 불을 주고 샀다고 합니다 (아래 그림 왼쪽 참조). 이 그림이 뭐가 그리 대단하냐고요? 중세의 성모 마리아는 대부분 무표정이었고 아기 예수는 근엄한 애 늙은이 같이 묘사했었는데요, 이 그림에서는 성모 마리아가 사랑하는 엄마의 시선으로 아기 예수를 바라봅니다. 웃는 얼굴은 아니고 이 아기가 나중에 십자가에 못 박힐 운명이라는 것을 아는 듯 한, 사랑과 슬픔이 교차하는, 그러한 그윽한 눈빛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기 예수도 자신의 엄마를 바라보며 엄마의 머리를 쓰다듬습니다. 작은 아기가 엄마를 위로하는 듯합니다. 아직은 르네상스 시대 이전이라 아기가 아기 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르네상스로 가는 시기에 있는 몇 안 되는 중요 작품이라 큰돈을 써서 구입했다고 하네요.

(왼쪽) 르네상스 이전에 그려진 두치오의 <마돈나와 예수>. (오른쪽) 르네상스 시대 대표적 작품인 필리포 리피의 <마돈나와 예수>.

그리고서는 1400년대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미술의 대혁명이 일어납니다. 로마시대 이후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던 사실적 회화 및 조각 기법이 다시 나타났지요. 이 시기를 이끌던 주요 화가들의 작품들은 그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해서 미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작품은 미국 대륙에 딱 하나 있다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 아닌 워싱턴 (Washington DC)의 국립 미술 박물관 (National Art Gallery)에 있습니다. 메트로폴린탄 박물관에는 다빈치와 동시대에 꽤 유명했다고 하는 필리포 리피 (Fillipo Lippi)의 작품이 몇 개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그린 작품인데, 인물들의 신체 비율과 모습이 꽤 사실적입니다. 그가 그린 아기 예수의 얼굴을 보면 볼이 통통한 귀여운 아기가 틀림 없는데, 동시에 죄를 사하러 온 근엄한 구세주의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왠지 그 상반된 역할의 아기 예수 표정에서 리피의 재능이 느껴집니다.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단지 로마 시대의 기술을 다시 습득한 것에 그치지 않고 새 예술 기법도 개발하며 미술에 혁명을 가져왔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원근법을 과학적으로 연구해서 미술에 적용하기 시작한 것이죠. 3차원의 세상을 2차원 평면에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원근법 원리입니다. 피렌체의 예술가들이 거울을 이용해서 3차원의 세상을 2차원 평면에 투영한 후 그 비율을 공부해서 이 기법을 완성시켰다고 합니다. 물리학적으로 설명하면 렌즈 하나 (싱글 렌즈)로 세상을 보는 듯한 그림을 사실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박물관 안에 원근법이 개발된 초창기 시절 중요한 전시물이 있는데, 대부분의 방문객들을 그 의미를 모르고 지나칩니다. 피렌체 근처에서 활약하던 프레데리코 몬테펠트로 공작 (Frederico da Montefeltro)의 서재입니다. 이 서재의 주인은 학식과 무술이 뛰어났다고 하는데, 칼싸움을 하다가 한쪽 눈을 잃은 인물이었습니다. 눈이 하나 밖에 없었으니 세상을 싱글 렌즈로 보며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3차원의 세상을 싱글 렌즈로 보듯이 표현하는 원근법에 감명받아 르네상스 미술의 중요한 후원자가 됐습니다. 그의 서재는 색상이 다른 나무 조각들을 꽤 맞추어 장식을 한 가구들과 나무벽으로 가득합니다. 검은색을 내기 위해서 나무를 불에 그을리기도 했다고 하고요. 원근법의 원리를 이용해서 만든 평평한 나무 벽면의 패턴이 보는 이로 하여금 마치 3차원 공간을 보는 듯한 착각을 하게 합니다 (아래 그림 참조).


몬테펠트로 공작의 서재에 있는 나무 평면. 색상이 다른 나무 조각을 연결해서 만든 평면이 마치 3차원의 사물을 보는 듯한 착시를 일으킵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더불어 북유럽에서 또 하나의 기술적 혁명이 이 시기에 출현했습니다. 유화 (oil painting)가 지금의 네덜랜드 및 벨기에 지방에서 개발됐습니다. 그 재질의 특성 때문에 더욱더 사실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어요. 그리고 새로운 물감의 출현 때문에 그리스 로마 문화에서는 취약하던 그림 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럽의 미술가들이 이 재료에 매료가 되어 그 이후 5백여 년간 유화를 열심히 그렸습니다. 조각과 모자이크 작품이 주를 이루던 로마 시기와는 아주 다른 미술 트렌드가 발전한 거죠.


이 시기의 그림들은 초보자들의 눈에는 대동소이해 보입니다. 모두가 사실적인 기법의 그림들이거든요. 하지만 시대가 바뀌며 미술에 계속 변화가 있었습니다. 처음엔 성경책과 그리스 로마 시대의 소재를 중심으로 그림을 그리다가, 돈이 있는 상인 계층이 생기면서 일상생활을 표현한 그림들이 나타납니다.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이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이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갑자기 무역업에서 돈을 번 사람들이 집에 조그마한 그림들을 걸어 놓고 살기 시작하지요. 그러면서 전에는 없던 풍경화와 정물화가 등장합니다. 그림물감의 발전도 미술에 크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르네상스 초기만 하더라도 물감의 색상이 다양하지 않았습니다. 그림의 색상이 암울한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색상이 더욱 환해집니다.


수백 년 동안 화가들이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는 데 열중하다가 19세기 중반이 되자 카메라가 등장했습니다. 르네상스 이후보다 사실적 그림을 더 열심히 그리려 노력하던 미술가들이 패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화가들의 시대는 종말을 고하게 됐다고 다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일부 미술가들이 이 난관을 돌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무렵 활동을 시작한 사람 중 프랑스의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가 특히 유명합니다. 하루의 특정 시간에 해가 특정 방향에서 비출 때, 직접 밖에 나가서 그 순간의 분위기를 포착하는 유화를 그렸습니다. 해의 방향이 조금만 바뀌어도 그림의 느낌이 달라지기 때문에 그는 무척 빨리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런 그의 그림이 프랑스에서 처음엔 푸대접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프랑스에서 미술가로 인정을 받으려면 첫째 묘사가 사실적이어야 할 것, 둘째 붓자국이 없이 정성을 들여서 그림을 그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순간의 인상을 포착하겠다고 붓자국이 사방에 나 있는 그림을 그렸으니 당연히 프랑스 살롱에서 퇴짜를 맞았지요. 그런데 카메라의 시대가 도래한 와중에 사실적 그림에 싫증을 내던 대중들이 모네와 같은 인상파의 그림에 열광을 했습니다. 사진과는 다른 느낌의 새로운 예술이 출현했다고 본 것입니다. 사실 프랑스 보다는 미국인들이 먼저 열광을 했고요, 그래서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을 위시한 미국 여러 박물관에 인상파 그림들이 많이 있습니다.  

클로드 모네의 작품 <루앙 (Rouene) 성당>

그 이후로 미술계의 변화 속도는 빨라졌습니다. 5천 년 미술 역사를 보자면 19세기 이전에는 유유히 흐르던 미술의 전통을 계승 발전하는 작품들이 인정을 받았는데요, 19세기 후반에서부터는 옛 전통을 파괴하는 기발한 미술이 갑자기 대우를 받았습니다. 인상파가 수십 년간 유행한 후 사람들이 이에 싫증을 내기 시작하자 포스트 인상파들이 나타났습니다. 반 고흐, 세잔느, 마티스 같은 화가들이 전혀 새로운 화풍을 개발했고 미술계에서는 새 화풍을 환영했습니다. 나중에 나타난 파블로 피카소는 르네상스 화풍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그림을 그려서 더욱 주목을 받았지요.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고 위해 원근법을 개발한 것이 르네상스의 토대였습니다. 그 원근법의 기초가 되는 것이 카메라의 싱글 렌즈 광학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피카소는 다르게 봤습니다. 그의 스타일을 한 미술 평론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더군요.


“피카소가 그린 여성들의 얼굴이 괴상해 보인다고요? 아닙니다. 우리는 싱글 렌즈 카메라와는 달리 눈이 두 개 달린 존재이잔아요. 사랑하는 여인에게 키스를 하러 다가가 보세요. 왼쪽 눈은 그녀의 왼쪽 얼굴을 보게 되고, 오른쪽 눈은 그녀의 오른쪽 얼굴을 향합니다.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눈이 두 개 달린 사람이 상대를 사랑스럽고 친밀한 눈으로 보는 시각을 표현한 것입니다. 카메라도 이를 표현 못하고 르네상스 거장도 이를 노친 겁니다. 그래서 피카소가 위대하다는 거예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소장품들은 20세기 초반 미술작품까지 전시를 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의 작품들을 보려면 구겐하임 (Guggenheim), 모마 (MOMA) 또는 휘트니 박물관 (Whitney Museum)을 가야 합니다. 하지만 현대 미술관에서 보여주는 작품들은 과거에 없던 새로운 발상을 강조하기 때문에 미술 역사의 내러티브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합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저는 그 어느 현대 미술관보다도 5천 년 미술사를 마치 유유히 흐르는 장대한 강물의 물결처럼 보여주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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