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제, 문화, 그리고 예술의 중심지 뉴욕에 관한 수많은 글, 영화, 그리고 사진들이 있습니다. 그 대부분은 뉴욕의 맨해튼, 특히 이 섬의 125가 이남의 지역만을 묘사합니다. 외지인들은 125가쯤에서 뉴욕이 끝나는 인상을 받겠지만 그 이북으로 맨해튼은 218가까지 계속됩니다.
자전거를 타고 허드슨 강가를 따라 있는 공원 도로를 달리노라면 125가를 경계로 갑자기 바뀌는 도시의 광경을 체감할 수 있습니다. 125가 이남은 아무리 인종적으로 더 다양해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앵글로-색슨 및 유대인 문화권의 일부입니다. 길에는 혼자 또는 2명의 커플이 함께 다니는 광경이 주를 이루고 여러 사람이 무리를 지어 다니는 것은 보기 힘듭니다. 허드슨 강변 공원에는 책 읽는 사람, 산책 및 조깅을 하는 사람들이 주로 보이고 전반적으로 차분한 분위기입니다. 반면 125가 이북은 누가 봐도 흑인 또는 히스패닉 문화권입니다. 이 지역 허드슨 강변 공원은 주말에 대가족이 함께 모여서 바비큐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 찹니다. 연기를 내며 고기를 굽는 어른들, 도로변에서 자유롭게 뛰어노는 어린아이들, 음악을 크게 틀고 듣는 청년들, 그리고 러닝셔츠 차림으로 담배를 하나씩 입에 물고 모여서 카드놀이를 하는 아저씨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길 하나 차이로 다른 나라에 온 느낌입니다.
삼십 년 전 제가 뉴욕에 처음 유학 왔을 때 정착한 곳이 이 지역입니다. 제가 공부했던 컬럼비아 대학교 의과대학이 168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영어를 하는 나라에 간다고 생각하고 이곳에 도착했는데, 168가에 도착하니 학교 주위 동네의 공용어는 스페인어이더군요. 그 지역이 도미니카 공화국 이민자들이 사는 곳이었어요. 그 당시 학교 주위에 영어를 사용하는 음식점이 서너 개 정도 됐었던 기억이 납니다. 유학 가서 학교 기숙사에 들어갔는데, 그 생활이 불편하게 느껴졌습니다. 일단 기숙사에 남녀 학생들이 모여 살았는데, 샤워장이 남녀 공용이었습니다. 샤워장에서의 미국인 에티켓을 몰라서 다른 학생들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했습니다. 남학생들은 가운을 입고 샤워장을 다녔지만, 여학생들의 대다수가 수건 하나만 두르고 출입을 하더군요. 여학생과 샤워장에서 마주쳤을 때 눈인사라도 해야 하나, 아니면 모른척하고 지나가야 하나 더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나름의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지하실에 수영장에 샤워장이 있는 남자 라커룸이 따로 있었거든요.
샤워장 문제 이외에도 여러 불편한 점이 있어서 일 년 후 그 기숙사를 나왔습니다. 그리고 190가에 사는 어떤 유대인 아주머니 집에 방 하나를 세 내어 살았습니다. 거의 모두 스페인어를 구사하는 동네인 줄 알았는데, 그 한가운데에 위치한 언덕 꼭대기에는 미국 유대인들의 동네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이전 동유럽에서 이민온 유대인들의 후손들이 모여 살고 있었어요.
190가 인근에 살면서 맨해튼 북부의 숨은 진주를 잘 알게 됐습니다. 언덕 위의 유대인 동네의 북쪽 경계선에 포트 트라이온 파크 (Fort Tryon Park)라는 공원입니다. 거기에 허드슨강이 내려다 보이는 멋진 전망대가 있고요, 그 앞에는 정원이 가꾸어져 있는데, 꽃이 피는 늦은 봄에 특히 화려해지는 곳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공원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중세 유럽의 수도원 같은 건물이 나옵니다. 록펠러 가문에서 돈을 대서 만들었다는 클로이스터 박물관입니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분원으로서 중세 미술품을 전시하는 곳입니다.
이 박물관은 1930년대 세워졌는데 미국의 조각가 조지 그레이 바너드 (George Grey Barnard)가 수집해 온 중세 미술품을 기반으로 시작했습니다. 바너드는 미국에서 교육받고는 프랑스 파리에서 다년간 활동했는데, 본업으로만 생계를 꾸리기 힘들어서 고 미술품을 사고파는 일을 부업으로 했던 사람입니다. 바너드가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20세기 초반이라 하면 유럽 전역에 폐허가 된 중세 교회들이 가득하던 시절입니다. 당시 돌로 된 새 건물을 지을 경우 폐허가 된 옛 교회의 기둥 및 석조 재료들을 재활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던 시절입니다. 자연히 기둥 및 석조 재료를 사고파는 시장이 형성돼 있었지요. 바너드는 조각가이다 보니 문화재적인 가치가 있는 것들을 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거래하던 12세기 중세 수도원 기둥 및 조각품들 중 가장 아끼던 것들을 미국으로 가져오게 됐습니다.
옛 건물의 석자재를 떼어다가 다른 용도로 쓰는 것이 그 시절에 국한된 것은 아니더군요. 얼마 전 스페인 남부의 코르도바 (Cordoba)를 여행하며 11세기에 지어진 메스키타 (Mezquita) 이슬람 사원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무척 큰 규모의 사원 전체가 돌기둥의 숲으로 이루어진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돌기둥들은 11세기에 만들어진 재료가 아니더군요. 그보다 천 년 전에 로마 신전 건설을 위해 만들어진 기둥들이, 로마 제국 멸망 후에는 게르만족의 부족국가인 서고트 왕국에서 지은 교회를 짓는데 재활용됐습니다. 그 이후 무어족이 스페인을 지배하며 이슬람 사원을 짓게 됐는데, 서고트 왕국 교회의 기둥들을 다시 가져다가 썼더군요. 2천 년 전에 만든 기둥들이지만 대리석으로 잘 만들었기에 새로 만든 것들 보다 더 훌륭해 보였습니다.
현재의 클로이스터 박물관에서 표를 구입한 후 들어서면 그 한가운데에 정원이 보이고, 그 주위에 기둥들이 서 있는데, 이것들이 바너드가 수집한 대표적 석조물입니다. 지금의 프랑스 서남부 지방 피레네 산맥에 위치한 생 미셸-드-쿠사 (Saint Michel de Cuxa)라는 수도원에 있던 기둥들을 이용해서 조성한 공간입니다. 생-미셸-드-쿠사 수도원은 9세기에 처음 세워진 곳이고, 클로이스터 박물관에 가져온 기둥들은 그 수도원의 12세기 건축물의 일부였습니다. 그런데 프랑스혁명 이후 혁명 정부가 이 수도원을 국유화하고 그곳의 수도승들을 추방하면서 중세 건물들이 폐허로 변하게 됐습니다. 바너드가 이 수도원의 기둥들을 특히 아낀 이유는 핑크 빛이 나는 비교적 희귀한 돌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바너드는 그런데 가난한 미술가였습니다. 무리하게 중세 석조물을 수집하다가 돈이 떨어져 곤궁한 상황에 처해지곤 했지요. 그런 바너드의 수집품을 1930년 록펠러 가문에서 사들이고서 클로이스터 박물관을 개관했습니다. 그리고 박물관측에서는 록펠러 가문의 재력을 이용해 계속 유럽 중세 여러 교회에서 석조물을 계속 가져왔습니다. 앞서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 전하는 5천 년의 서양 미술사>에서 소개했듯이 스페인에서 폐허로 남아있던 교회의 반원형 본당을 통째로 뜯어 온 것이 그중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입니다. 이 박물관 전시물 중 교회의 일부분을 원형 그대로 보존해서 가져온 대표적인 구조물이고요. 그 이외에도 작은 공간들이 여럿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수도원에서 회의를 하던 챕터 하우스 (Chapter House)를 모델로 만든 공간이 있는데, 이를 장식하는 근사한 돌기동과 이를 연결하는 둥그런 로마네스크 아치 역시 원래 프랑스의 폰타트 (Pontaut)라는 12세기에 지어진 수도원의 일부였습니다. 이 수도원이 16세기 종교전쟁 이후 폐허가 됐습니다. 그리고 남아 있는 구조물은 개인 소유가 되어서 마구간으로 쓰이고 있었고요. 이를 박물관측에서 1932년 구매한 후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합니다.
록펠러 가문에서 이 박물관을 조성하면서 거기서 보이는 강의 모습도 보존을 하겠다고 강 건너 뉴저지에도 땅을 매입해서 개발하지 않은 상태로 유지해 왔습니다. 몇 해 전 한국기업 LG에서 그 지역에 고층 건물을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자 그 강가의 경관이 망가진다는 불평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결국 LG는 자발적으로 층수를 줄여서 건물을 지었고, 그래서 클로이스터 박물관에 있는 두어 개 야외 공간에서 바라보는 허드슨강과 그 건너편의 모습이 아직도 평화롭기 그지없습니다.
이곳 클로이스터 박물관을 처음 방문했던 삼십 년 전 어느 날이 아직도 기억이 나는군요. 한국에서 자라난 평범한 소시민으로서 서양 건축 및 미술 문화를 접할 기회는 그전에 당연히 없었지요. 그러다가 영어 공부를 하겠다고 13세기 이탈리아 북부의 어느 수도원을 배경으로 한 움베르토 에코 (Umberto Eco)의 소설 <장미의 이름>을 읽게 됐습니다. 소설의 도입부는 그 수도원 묘사부터 시작하더군요. 수도원 입구의 기둥 (column)과 그 위에 있는 장식용 캐피털 (capital)을 세세히 서술하며, 그 위로 무거운 지붕을 떠받들고 있는 아치 (arch)에 대한 설명, 그리고 그 위에 있는 팀파눔 (Tympanum)에 새겨진 긴 수염을 가진 심판자의 모습에 대한 묘사를 읽으면서 그 생소한 용어들에 머리를 긁적이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 이후 클로이스터 박물관에서 실제 중세 건축물을 관찰하며 그 용어들을 하나하나씩 배워 나갔습니다. 미국의 건축 문화의 원류가 된 서양 석조 건물의 기본을 이곳에서 처음 배운 것입니다. 125가 이북으로는 볼 것이 별로 없다는 평이 있지만 저의 서양 문화에 대한 관심은 이곳에서 시작했고, 또 이곳을 기술하며 제 연재 <뉴욕은 하루 만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를 마치게 되었네요.
제가 뉴욕에 온 것이 1994년 8월 말 경이니 이제 이곳에 정착한 지 삼십 년의 세월이 흘렀군요. 나름대로 그동안 접해 온 저의 제2의 고향에 얽힌 이야기들을 독자들과 공유하며 지난 세월을 회고해 보았습니다. 오늘 맨해튼 북부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이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제 글을 아껴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