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유의 [에필로그] 라는 노래와 함께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최근 나는 화장시설에서 일하게 되었다.
죽은 사람은 염을 하고 관에 들어가 화장터로 간다. 그곳에서 1000℃ 정도의 불길이 내뿜어져 나오는 화장로로 들어가게 되고, 그 속에서 몇십 분 정도가 지나고 나면 하얀 재가 된다. 약간의 냉각 시간을 거치고, 화장로에서 나오면 일부 커다란 뼈는 형체가 남지만, 대부분은 그냥 재가 된다. 장례기사는 뼈와 재를 모두 통에 쓸어 담아 유족에게 보여준 뒤, 남은 뼈를 가루로 만드는 분골함으로 옮겨, 기계를 이용해 완전히 가루로 만든다. 그 후 그것을 다시 꺼내 종이로 잘 감싸 유족이 준비한 함에 넣는다. 유골함은 유족에게 전해진 뒤 봉안당이나 유가족이 원하는 곳으로 가게 된다.
나는 최근 친구의 인스타그램에서 이런 글을 보았다. 내가 글을 쓰게 된 이유도 이 글이었다. 화장시설에서 일을 한지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이 글을 읽고 나서 조금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싸구려 플라스틱 빗자루와 쓰레받기"
이 글을 올린 친구는 자신이 방문한 화장시설에서는 청소기를 사용하는 것을 본적도 있다고 했다. 내가 일하는 곳에서는 청소기는 사용하지 않는다. 빗자루를 쓰긴 하지만 플라스틱은 아니다. 그런데 저 사진 속 글의 작가가 말한 유골에 담긴 정신성에 대한 존중이라던가 참담한 무신경함에서의 벗어남은 대체 어떻게 지켜질 수 있는 것일까? 플라스틱 빗자루든, 지푸라기 빗자루든, 최고급 붓이든 솔직히 말해서 그게 정말 차이가 있을까? 최고급 붓을 사용하면 정신성이 헤쳐지지 않는 것인가? 물론 작가도 답은 모른다고 했고, 나도 더 나은 방법이 있다면 그 방법을 쓰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더 나은 방법"이라는 것이 무엇에게, 혹은 누구에게 더 나은 방법인지를 생각해 보는 일일 것이다. 작가가 말에 따르자면 플라스틱 빗자루와 쓰레받기에는 고인에 대한 예의가 결여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눈에, 아니 유족들의 눈에 자신의 소중한 가족이 재가 되었는데, 그 재를 싸구려 빗자루나 청소기로 쓸어 담는 모습은 어딘가 말하기 어려운 이상한 감정이 올라오는 장면일지 모르겠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어떤 도구가 그들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을까? 위로의 수단이나 예의의 수단이 단지 도구의 변화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른 국가에서는 화장 후 뼈가 아래로 떨어지는 구조를 만들어 사용한다고도 하지만 시신 훼손에 대해 거부감이 있는 우리나라와 같은 국가에서는 뼈를 쓸어 담는 형식을 사용하고 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도구의 변화가 정말 고인에 대한 예의를 만들어 내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만들어낼 수도 있다. 내 가족의 마지막이 싸구려 플라스틱 빗자루라면 나라도 기분이 이상할 것 같다. 그렇다면 도구의 변화로 인해 생겨난 '예의'는 정말 고인에 대한 것일까? 아니면 그것을 바라보는 유가족에 대한 것일까?
고인에 대한 예의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유가족에 대한 예의와 고인에 대한 예의는 분명 연관되어 있겠지만 그럼에도 분명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인에 대한 예의. 예의란 뭘까? 공자는 예의를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죽음 이후에 타인이 나에게 하지 않았으면 일이라... 죽은 나에게 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은 뭘까? 글쎄, 부관참시 정도면 모를까 죽었는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긴 하다. 애초에 죽고 난 뒤의 내 몸을 정말 '나'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걸 정말 '나'라고 부를 것이라면 내 시체를 어떠한 형식으로든 훼손하지 않으면 좋을 것 같긴 하다. 죽고 나서 내가 원하는 것은 오히려, 나에게 무언가를 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아닌, 그저 나를 기억해 주는 일뿐인 것 같다. 죽음 이후에도 누군가 나를 기억해 준다면 좋을 것 같다. 그렇다면 죽은 나에게 하지 않았으면 하는 일도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나를 기억하지 않는 일, 나를 기억하지 못하게 하는 일' 그건 좀 당하기 싫을 것 같다. 그것이 '죽은 나'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나'의 일부인 내 몸이고, 살아있는 동안에 수도 없이 '나'로 지칭되는 내 몸이지만, 죽고 나서는 그 의미가 꽤나 많이 상실되는 것 같다. 내 몸으로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딱 내 몸. 내 이름도, 내 성격도, 내 말투도, 내 생각도, 아무것도 아닌 딱 그냥 내 몸. 그 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닌 내 몸으로만 나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떠올렸을 때, 그 사람의 몸만 떠올릴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내 몸은 분명 중요하지만, 죽음 이후에 나를 기억나게 하는 것은 내 몸이 아닐 것이다. 이순신 장군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그의 몸이 아니고, 이순신 장군을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도 그의 몸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 유가족들도 몸을 보고 그를 기억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사진이나, 유골이 담긴 유골함을 보면 더욱 그를 떠올리겠지만,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것은 그 사람과의 기억, 추억, 그 사람이 했던 말, 그 사람의 행동, 그 사람의 의미, 그 사람 그 자체일 것이다. 물론 내 몸도 '나'이지만, '나'를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내 몸은 아니었으면 한다. 내가 그 사람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어떤 감정을 주었는지, 나로 인해 행복했던 기억이 있다면 그것들을 떠올려주길 바란다.
그렇기에 나는 고인에 대한 예의가 장례기사의 도구에서 온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도구야 무엇이 되었든, 나와 처음 마주한, 아니 정확히는 내가 들어가 있는 관과, 하얀 재가 된 나를 처음 마주한 그 사람의 마음이, 그리고 그가 사용하는 도구가, 그저 자신의 일에 정성을 다하고 맡은 바를 성실히 하고자 하기 위한 것들이라면, 그 정도면 괜찮을 것도 같다. 어차피 죽고 나서 느끼는 불편함 따위는 없을 것이니까 말이다. 내가 하는 일도 그렇다. 화장로에 불이 잘 붙는지, 시신을 태우며 생겨난 화학물질들이 잘 정화되어 나가는지, 화장 시설이 고장 나지 않도록 해 많은 유가족이 그들의 슬픔을 느끼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그 일이,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수많은 '죽은 나'들에 대한 예의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찾아오는 모든 이들의 슬픔을 함께 느끼지는 않는다. 목 놓아 우는소리, 퉁퉁 붓고 퀭한 눈, 한눈에 봐도 지쳐있는 몸, 헝클어진 머리와 옷, 서로를 위로하고 지탱하는 행동들, 그런 모든 것들과 함께하는 매일이지만, 그 모든 순간에 나도 함께 슬퍼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다른 모든 이의 죽음에 매일 매시 슬픔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내가 할 일을 하는 것뿐이다. 그것이 그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남겨진 이들이 슬픔만 느낄 수도 록 하는 것. 조용히, 다른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도록 해서, 그들이 고인을 기억하는 데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것이 내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며, 나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고인을 위한 예의는 그가 잘 기억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지 않을까.
죽음 이후 '나'를 기억하게 하는 것. 어쩌면 죽음을 맞이할 우리가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한 일인 것 같다. 나를 기억해 주는 것이 나에 대한 예의라면, 그 예의는 결국 나에게 달려있는 것이겠다. 내 죽음은 내 삶으로 기억될 것이니까 말이다.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삶이라던가, 모두에게 손가락질 받는 삶. 아, 아니지.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죽음이라던가, 모두에게 손가락질 받는 죽음이 아니면 좋겠다.
어떻게 죽을 것인지와 어떻게 살 것인지는 전혀 다른 문제가 아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까지 우리는 살아있을 것이니까. 사는 동안 행복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삶, 그런 죽음이면 좋겠다.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