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7, Kyoto→Osaka
전날과 마찬가지로 아침에 일어나 보니 거짓말처럼 비는 그쳐 있었다. 야경을 찍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겠지만 대신 리드미컬하게 창에 부딪치는 빗방울 소리를 배경삼아 안주삼아 맥주를 마실 때 기분은 매우 좋았으니까 아쉬워하지 않기로 했다.
호텔에서 체크아웃 하면서 짐을 맡기고, 바로 앞에 있는 니조죠(二条城, 이조성)로 향했다. 이 성은 전국시대 최후의 승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현재의 도쿄)에 막부를 설치하고 교토에 왔을 때 천황의 거소인 교토고쇼(京都御所, 경도어소)를 보호할 겸 자신이 머무를 겸 해서 축조한 것이다. 공식적으로 세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 정이대장군)이 쇼군의 관직인데 이에야스는 바로 이 니조죠에서 정이대장군 관직을 받는다. 정이대장군은 중국에서 유래한 관직으로 이름 그대로 오랑캐(夷)를 정벌(征)하는 장군인데 섬나라에서 무슨 오랑캐냐 할 수도 있겠지만 일본에는 아이누 족처럼 혈통이 다른 민족들이 살고 있었으므로 그들 입장에서는 오랑캐가 맞다 할 수 있다. 애당초 원래 본토는 조몬인(남방계)이 토착민족이고 대륙-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북방계)이 섞인 것이고. 그래서 가마쿠라 막부를 열었던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정이대장군이 된 후 쇼군들의 공식 관직은 정이대장군이다. 뭐 그건 그렇고 니조죠는 핵심 건물인 텐슈카쿠가 벼락을 맞아 소실되고 화재로 다른 건물들도 많이 멸실되어 현재 남은 건물은 많지 않다.
이곳의 중심건물은 니노마루고덴(二の丸御殿, 니노마루어전)으로 여섯 채의 건물이 복도로 연결되어 있는 형태이다. 서양 건축에서 박공(Pediment)을 이루고 있는 부분이 매우 화려한 금박으로 장식되어 있어 상당히 멋졌는데, 이런 형태의 절정은 나중에 닛코의 도쇼구에서 보게 된다. 이곳은 일본의 역사에서는 나름 전환점이었던 대정봉환(쇼군이 모든 권력을 천황에게 돌려줌)을 선언한 곳이기도 하다.
니노마루고덴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은 바로 그 유명한 Nightingale Floor(鴬張りの廊下, 꾀꼬리 소리 복도)다. 복도를 걸을 때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는데 꽤나 하이톤으로, 이 소리가 꾀꼬리 소리처럼 들린다 해서 저런 이름이 붙었다. 목적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암살자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이렇게 만든 것인데, 과연 닌자의 나라답다. 마룻바닥 밑에 약간 유격을 두고 못 같은 것이 설치되어 있어 무게가 가해져서 바닥이 내려가면 그 못과 마찰이 되며 소리가 나는 구조(대충 이렇게 설명이 되어 있었음)인데, 밤에 시종이 시중을 들러 오는지 암살자가 침입한 것인지 어떻게 구별하지?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니노마루고덴을 나와서 니노미야테이엔(二の丸庭園, 니노마루정원)과 해자 등을 구경했다. 교토는 평지다 보니 혹시 공격군이 있다면 농성한다 해도 방어 효과는 크지 않았겠지만 어쨌든 깊지는 않아도 해자까지 파 놓은 걸 보면 제대로 된 성이기는 하다.
교토에 왔으니 일본의 궁전인 교토 고쇼…를 봤어야 하지만 11시 영어 투어에 참가하려고 간 것인데 왜인지 2시밖에 없어서 잠시 고민하다가 과감하게 포기했다. 당초 교토의 궁전은 8세기 말 나라에서 교토로 천도한 다음 건설되었는데 이 원본이 남아 있다면 포기하지 못했겠지만 전쟁과 화재로 다 날려먹고 19세기 중반에 재건한 것이라 포기한 것이다. 대신이라고 하면 뭐하지만 근처의 시모가모진자(下鴨神社, 하압신사)를 구경했다. 교토 천도 이전인 6세기부터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그리고 향한 곳은 본토초, 기온 방면. 교토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데 원래 계획은 저녁에 와서 야경도 찍고 기온의 게이샤 사진도 찍어보고 싶었는데 이틀 연속으로 비가 오는 바람에 포기해 버렸던. 본토초는 교토의 대표적인 유흥가인데 일본 특유의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술집과 상점들이 몰려 있고, 기온은 전통가옥이 즐비해서 교토의 고도(古都)다운 모습을 잘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우리로 치자면 북촌마을과 인사동이 합해져 있는 정도로 보면 된다.
배가 매우 고파져서(이미 점심을 한참 지난 시각) 전날 실패(까지는 아니었지만 그저 그랬던)했던 카레우동에 다시 도전하기로 했다. 첫 일본 여행에서 가장 먹어보고 싶었던 건 오코노미야끼와 바로 이 카레우동이었는데. 전날은 긴카쿠지에서 나와 변두리쪽에 있는 이름 없는 식당에 들어가서 먹은 거였으니 이번엔 제대로 된 집을 찾아가보자 해서 여행책에 소개되어 있는 미미코라는 식당으로 가서 카레우동을 먹었는데 과연 이번에는 소고기와 야채가 풍부하게 들어가 있는 카레우동이 기대한 대로의 맛이 나서 상당한 양이었음에도 싹싹 먹어치웠다.
만족스럽게 가득 채운 배를 부여(?)잡고 기온 쪽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는 일본 가부키의 시초로 최초로 세워진 가부키 극장인 미나미자(南座, 남좌) 극장이 있었다. 1929년에 세워졌으니 100년 남짓하지만 동아시아에서 공연장이 이 정도 역사면 긴 역사다. 오페라의 본고장인 유럽으로 가면 명함도 내밀기 어려운 수준이겠지만.
교토에서 또 아름다운 거리로 손꼽히는 곳이 신사이바시도리인데, 여기도 기온처럼 전통가옥들이 즐비한 곳이다. 이런 곳들은 세계 공통으로 건물들의 고도제한이 있어 시야를 가리는 일 없이 2~3층이 고작인 주변의 전통가옥들을 제대로 즐길 수가 있다. 오래된 목재로 지어진 전통가옥들을 천천히 즐기고 있는데, 운 좋게 풀메이크업의 게이샤(芸者, 예자)…가 아니라 게이샤 체험을 하는 일반인을 만났다. 진짜 게이샤가 낮에 얼굴에 흰 칠을 하고 돌아다닐 일은 당연히 없고(공연은 밤이니까), 사진을 찍는 것도 대놓고 초상권을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 사진도 찍으면 안 된다. 어쨌든 여행중인데 게이샤 코스프레를 하는 사람을 만났으니 사진을 찍으려고 다가가서 사진 찍어도 될까요?라고 영어로 물으니 알아들은 건지 못 알아들은 건지 고개를 끄덕해준다. 고맙다고 하고 찰칵.
어느새 오후의 한가운데로 시간은 흘러가고, 남은 여행지는 절 세 군데였으니, 도지-니시혼간지-히가시혼간지 였다. 오래된 유적이 많은 교토의 사찰들 중에서도 특히 그 규모가 엄청난 사찰들. 먼저 진언종의 본산인 도지(東寺, 동사)부터. 교토역의 약간 남쪽에 있는데 왜 동쪽 절이라는 이름이 붙었냐 하면 교토로 천도한 다음 교토 도성의 남문인 라쇼몬(羅城門, 나성문)의 동쪽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라쇼몬의 서쪽에는 사이지(西寺, 서사)가 있었는데 현재는 도지만 살아남았고, 무려 796년에 건설되었으니 나이가 1200살이 넘어간다. 물론 그때 당시의 건물이 남아 있는 건 아니지만. 도지에는 일본에서 가장 높은 고주노토(오중탑)를 비롯해서 당나라의 양식까지 포함되어 지어진 콘도(본당) 등등 볼거리가 정말 풍부한 곳이다.
다음으로 간 곳은 니시혼간지(西本願寺, 서본원사). 일본 정토진종의 총본산으로 정토진종의 개조인 신란을 모시기 위해 1272년 건설된 묘당이 이 절의 출발이었다. 신란의 증손자가 혼간지의 주지이자 3대 법주가 되면서 아미타불을 모시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현재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들 중 하나가 아미타도(阿弥陀堂)다. 전란과 화재와 지진 등으로 여러 건물들이 소실된 뒤 재건되었는데 현재의 건물들은 대부분 17세기에 지어진 것들. 이 정토진종은 교세가 무섭게 확장되었고, 11대 법주였던 혼간지 켄뇨는 오사카의 이시야마 혼간지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센고쿠 시대(일본의 전국시대) 통일의 기반을 닦은 오다 노부나가를 10년이나 괴롭히게 되는-다케다 신겐 등과 협력하여-등 정말 잘 나가던 때가 있었다고.
니시혼간지를 나와서 이번에는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 동본원사) 차례. 위의 혼간지 켄뇨의 두 아들인 쿄뇨와 쥰뇨가 불화하여 혼간지는 두 개로 갈라지게 되었는데,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니시혼간지에 대립하여 세워졌다. 그렇지만 니시혼간지에 비해 역사가 일천하여(17세기에 세워짐)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게다가 내가 갔을 때는 여러 건물이 보수중으로 대부분의 건물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특이했던 건 사람의 머리카락으로 엮은 밧줄이었는데, 절의 창건 시절 큰 목재 운반에 사용하라고 여신도들이 머리카락을 잘라 보내온 것으로 밧줄을 만들었다고 한다. 사람 머리카락 밧줄이라, 일견 섬뜩한 느낌.
이렇게 3일간의 교토 여행이 마무리되었다. 이 날 여행의 출발점이었던 니조죠 근처에 있는 호텔로 다시 가서 짐을 찾고는, 오사카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교토와 오사카는 신칸센으로 15분, 보통 열차로도 30~40분밖에 안 걸리기 때문에 정말 금방인데 이게 문제가 될 줄은 몰랐다. 배낭을 둘러메고 오사카에 도착해서 지하철을 타고 난바로 가는데, 딱 퇴근시간과 겹쳐서 사람이 엄청나게 많았다. 정신도 없고 사람들에 치이고 쓸려서 난바행 지하철에 올랐는데, 이상하게 그 칸에 남자가 나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 왜 이러지 오늘 여성의 날이라도 되나 하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면서도 전혀 눈치를 못 챘다. 교토에 가기 전 오사카 지하철을 이용할 때 라인에 따라서 출퇴근 시간 때 여성전용 칸이 있다는 걸 미리 알고 와서 플랫폼 승강장을 살펴보고 탔었는데, 교토에서 돌아온 이 때는 피곤하기도 하고 정신도 없어서 그걸 잊고 여성전용칸에 탄 것이다. 이걸 알게 된 건 내 하차역인 난바에 도착하기 직전, 땀이 삐질삐질 나기 시작했다. 어째 애들이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더라…하지만 누가 봐도 대놓고 피곤에 절은 여행자라 이해해 주겠지 뭐, 라고 생각하기는커녕 너무 창피해서 문이 열리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걸어서 호텔까지 직행.
땀을 너무 흘려서 하루 종일 물을 많이 마신 탓도 있고, 조금 늦게 점심을 먹은 탓도 있어서 힘은 드는데 딱히 식욕이 크게 느껴지지도 않고 이것저것 다 귀찮아져서 저녁은 감자칩과 샐러드를 사 와서 호텔에서 대충 먹고 침대에 널브러져서 맥주를 홀짝홀짝 마시다가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