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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그랬지...

by 이삼오

(다시 닥터 라구와 과거로의 여행...)



"혹시 아버지는 병원 오셨었니?"



"아니오. 아마 제가 여기 있는 거 모를 거예요. 지금 한국에 있다고 들었어요."



"한국에 무슨 일이 있으신가 보네?"



"글쎄요, 캐나다로 이민 오고 자주 왔다 갔다 했는데... 많을 땐 1년에 서너 번도요.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는 말을 자세히 안 해줘서요. 그냥 일 때문이라고... 그럼 무슨 긍정적인 결과물이 있거나 해야 할 텐데 그런 것도 아니고..."



"아버지랑 가까운 편이니?"



"어렸을 땐 그랬던 거 같은데, 시간이 갈수록 멀어지네요. 끊이지 않는 갈등... 뭐, 10대 소년과 아버지의 관계가 그렇게 썩 이상적일 수는 없잖아요."



"그럼 어렸을 때 어떤 기억들이 있니?"





(1980년대 후반, 서울)



아침에 일어나면 아빠는 이미 출근하고 없었다.



할머니는 어떻게든 나를 깨워 후다닥 세수를 시키고 안 먹으려는 아침밥 한 숟갈을 억지로 어떻게든 내 입에 쑤셔 넣었다.



그래도 할머니의 반찬들은 맛있었기에 끝끝내 거부하지는 않았다.



평일에 나의 일과는 유치원 하원 후 그림 그리거나 책을 보는 거, 동네 친구, 형, 누나들이랑 집 앞에서 노는 게 거의 다였다.



아마도 지극히 평범한 80년 대 후반 어린이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아빠를 보는 건 밤에 퇴근 후 한 시간 정도 남짓이었다.



일요일에는 거의 항상 아빠와 나들이를 갔다.



나는 항상 빨리 일요일이 왔으면 했다.



서울랜드를 비롯해 서울에 있는 어지간한 나들이 장소는 다 쓸고 다녔다.



서점들을 가기도 하고 경복궁과 덕수궁은 내 집 드나들듯 자주 갔었다.





장맛비가 내리던 여름, 양말에 샌들을 신고 밖을 나섰다.



집을 나서자마자 양말이 흠뻑 젖어버렸다.



참을 수 없는 찝찝함이 느껴졌다.



내가 젖은 양말을 이토록 싫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극장에 '우뢰매'를 보러 갔기에 한창 들떠있었어야 했지만 젖은 양말의 찝찝함은 어쩔 수 없었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는 극장 옆에 있는 KFC로 향했다.



한국에 들어온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닭집, 그냥 보통 켄터키치킨이라고 불렀다.



물티슈, 휴지, 포크가 들어있는 비닐 포장이 내 앞에 놓였다.



커다란 닭을 한 조각 들어 살을 뜯어먹었다.



짭짤한 게 너무 맛있었다.



어느 정도 뜯어먹자 아빠가 손으로 살을 발라줬다.



너무 맛있게 먹어서인지, 아니면 적응을 해서 그런지 젖은 양말은 잊은 지 오래다.





아버지와의 일요일의 추억들은 사진으로 고스란히 남아있다.



캐나다에 있는 아버지집 어딘가에 두꺼운 빨간색 앨범 하나, 파란색 앨범 하나에 보관되어 있다.



나는 가끔 이 사진들을 보곤 했다.



특히 아버지와 갈등을 빚을 때마다 보곤 했다.



그렇게 마냥 내편이었고 든든한 아버지였었는데...



이 시간들이 마냥 즐겁기만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리고 적어도 몇 년 정도까지는 아빠와 할머니가 내 세상에 전부였다.



유치원생이었던 나는 아빠와 그 어느 갈등도 존재하지도 않았고 그저 아빠에게는 끔찍하게 귀한 아들이었다.



결혼하기 전, 한 번씩 그 사진들을 보내달라거나 필름 원본을 달라고 해봤지만 에둘러서 거절당했다.



아마도 이 사진들이, 아버지와 나의 관계에 있어서 유일한 생명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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