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도 많이 비어있는데 진작에 혼자 쓰게 해 주지! 저런 예민한 또라이랑 굳이 방짝을 해줬어야 했나?"
처음 보는, 멀리서 딱 봐도 밝은 빨강? 오렌지? 빛 머리카락을 하고 있는 여인이 한눈에 들어왔다.
뭐라고 계속 투덜대고 있었다.
느낌이 한 성깔 하는 듯했다.
아무래도 빨강머리는 이곳에 오자마자 룸메이트와 한 판 붙은 모양이었다.
빨강머리는 간호사와 복도에 서서 한참을 얘기한 후 비어있는 병실로 발길을 돌렸다.
그 순간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내 쪽으로 걸어왔다. 당당하게 걸어오는 모습이 카리스마가 장난이 아니었다.
순간 움찔할 뻔했다.
"안녕? 난 낸시라고 해. 너는?"
다짜고짜 악수의 손을 내밀었다.
"저는, 삼오라고 합니다."
"특이한 이름이네?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몇 살이야?"
"이제 며칠 후면 열일곱이요."
"쯧쯧... 이 어린 나이에 어찌 여기까지 왔어? 하여튼 잘 지내보자."
뭔가 순식간에 지나간 거 같았다.
낸시는 어림잡아 나의 이모나 엄마뻘 정도 되어 보였다.
목소리는 힘이 있고 까랑까랑 했지만 적당히 여성스러웠고 얼굴은 초록눈에 주근깨가 가득했다.
카리스마 있으면서도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얼핏 느낌엔 환자보다는 새로 온 간호사로 착각할 법이었다.
"샤만, 카를로스 봤어요?"
"아, 아까 아침 일찍 퇴원했어. 어머니가 오셨더군. 나만 깨어있었어."
"아... 그럼 많이 괜찮아진 거예요?"
"그게 아니고 좀 더 알코올 중독을 집중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곳으로 간다고 하더라."
"아쉽네요. 인사라도 하면 좋았을 텐데."
"여긴 원래 다 그래. 그렇다고 싫다거나 그래서가 아니고 그냥, 작별이 익숙하지 않아서일 거야. 걱정 마라. 나는 퇴원할 때 알릴 테니! 하하."
"카를로스? 그게 누구야? 이름만 들어선 섹시한 라틴 청년 같은데?"
붙임성 하나는 기가 막힌 낸시 아줌마다.
"믿거나 말거나 러시아 아저씨입니다."
"잉? 근데 웬 카를로스? 호호."
낸시 아줌마는 항상 남에게 먼저 잘 다가갔다. 특히 남자들이랑 더욱 친했는데 다 이유가 있단다.
"내 바로 직전 직장엔 거의 다 남자였어. 그래서 남자들이 더 편한 거 같아. 근데, 엄밀히 따지자면 남자들은 아니지만..."
"남잔데 남자가 아니라뇨?"
"다 게이들이었어. 하하. 내가 패션 쪽에서 일했는데 이 쪽은 게이들이 많단다."
"아... 아직 어려서 그런지 저는 친구들의 폭이 많이 제한적이네요."
"그나저나, 넌 여기에 어떻게 온 거야?"
"저... 약 먹고 세상과 등지려 했는데... 우울증에 불안장애요. 그쪽은요?"
"나도 뭐, 비슷해. 우울증에... 약 끊고 후유증도 있고."
"약이라면, 마약...?"
"그런 것도 있었고 처방된 약도 있었고. 그래도 몸에 주삿바늘 같은 건 안 꽂았어."
"그렇군요. 저는 막상 약을 싫어했는데... 여기 있게 된 계기가 약 때문이니. 아이러니하네요."
"아, 그런데 너 한국 사람이니?"
"어? 네. 어떻게 아셨어요? 보통 먼저 중국 사람이냐고 묻는 게 대부분인데."
"우리 아버지가 영국군으로 6.25에 참전하셨었거든. 항상 한국을 그리워하면서 평생을 사시는 분이야. 그래서 한국은 나에게도 제법 친숙한 느낌이야."
이곳 따분한 병동에서도 나름 지낼만했다.
책도 읽고, 평생 해본 적 없는 명상(멍 때리기에 가까웠지만)도 하고, 규칙적인 식사도 하고, 그나마 잠도 더 자고.
다만, 사회와 동 떨어져 있고 다른 사람과의 교류가 별로 없으니, 사회적으로 단절된 느낌은 제법 큰 공허함을 몰고 왔다.
이런 와중에 수다쟁이 낸시 아줌마와 이런저런 얘기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담배도 같이 태우고 지하에 내려가서 커피도 한 잔씩 하고.
그러던 어느 날...
나의 담당 간호사인 데이나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이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아닐 테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뭐 때문에 이렇게 뜸을 들이세요?"
"몇몇 환자들 말로는 너랑 낸시가 보통 사이가 아니라고 하는 소문이 돌고 있어서 말이야..."
"네?! 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친하게 지내는 것도 조심해야 하는 일인가요?"
"아닌 거 알아. 그런데 솔직히, 낸시라는 여자가 다른 사람이 봤을 때도 제법 매력적이게 생겼잖아. 아마 다른 여성 환자들이 이 말 저 말하는 거 같아. 그래서 혹시 모르니, 너무 둘이서만 같이 있는 시간도 좀 줄이는 게 좋을 거 같아."
내 이모 뻘쯤 되는 여자랑 친해진 게 오해받을 일... 일 수도 있겠다.
보수적인 동시에, 나름 세계에서 가장 개방적인 나라 중 하나인 캐나다 아닌가.
얼마 후 낸시가 씩씩 대면서 내게로 왔다.
"세상에 참 베베 꼬인 인간들도 많지. 사람 친하게 지내는 것도 신경 써야 하나?"
보아하니 낸시도 간호사에게 한 마디 들은 듯했다.
"어쨌든, 난 신경 안 써. 너도 딱히 눈치 볼 것도 없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데이나의 말 때문에 신경은 조금 쓰였다.
"야, 너 근데 여자친구 있어?"
"아니요..."
"그럼, 내 딸 소개해 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