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믿습니까? 글쎄요...

by 이삼오

(닥터 라구와의 면담)


"아버지 어머니, 서로 간의 갈등이 아무래도 너한테 끼친 영향이 상당히 클 수밖에 없구나."



"실제로 저와 부모는, 정말 크게 부딪친 적은 없는 거 같아요. 그럴 수도 있었지만, 제가 어지간한 상황들을 피했던 거 같아요."



"예를 들면 어떤 식으로?"



"그냥 물리적으로 제가 그 상황과 현장을 피하는 거죠."



"그럼 주로 어디에 갔니?"



"어디든지요. 친구집, 도서관, 동네 공원, 성당..."



"아, 성당 다니니?"



"흠... 다녔었다고 하는 게 맞는 거 같아요. 최근 까지도 가다 안 가다 했어요. 그런데, 저한테 딱히 믿음이란 게 있는 거 같지는 않네요."



"그럼 부모님도 성당 다니시고?"



"아마,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신부님, 수녀님으로 착각했을 수도 요."





우리 집안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들이 많았다.



모두가 세례를 받았고 나는 어릴 때부터 이름 대신 세례명으로 불리는 게 어색하지 않았다.



특히 할머니가 제일 성당에 열심이셨다.



심지어 아버지는 한 때 사제의 길을 걸으려고 했지만 유일한 아들에 장손이었기 때문에 할아버지의 반대가 심했다고 들었다.



집안사람들 대부분 성당 관련 일이나 행사로 바쁠 때가 많았다.



내가 어릴 때부터 신앙심이 깊었다기보다는 그냥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였다.



소규모 지방 도시에 있는 동네 성당의 영향력은 지금 보다 신자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상당했다.



인스타나, 구글, 네이버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 신부님과 수녀님은 선생님이자, 인생의 조언자, 말 그대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플루언서'였다.





새어머니의 집안은 더욱더 막강한(?) 천주교 집안이었다.



나는 솔직히 이 집안 식구, 그러니까 법적으로 나의 몇 이모들과 삼촌들의 본명은 아예 몰랐다.



대부분 이름대신 세례명으로 불렀다.



이모 중에는 수녀님도 있었고 삼촌 중에 신부님이 된 사람도 있다.



아마 부모가 결혼을 할 때 종교적인 요건이 상당히 크게 적용하지 않았을까.



아버지와 새어머니는 어떻게 만나 게 된 지는 모르겠으나 어림짐작 성당의 누군가가 연결해 준 게 아닐까 한다.



공교롭게도, 아니 어쩌면 당연하게도, 아버지의 두 번의 결혼식은 모두 성당에서였다.



아버지의 재혼 후 에도 매주 일요일 성당에 미사를 보러 가는 건 변함이 없었다.



부모가 전날이든 언제든 한바탕 전투를 벌여도 성당은 함께 갔다.



따로따로 가면 사람들의 입소문에 신경이 쓰이는 거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뭔가 '함께' 한다는 게, 적어도 일주일에 단 하루는 멀쩡한 가족처럼 보일 수 있었다.





이민을 온 후에는 부모 둘 다 성당에 더욱더 적극적이었다.



아무래도 낯선 곳에서의 불안을 달래주기엔 성당, 교회 만한 곳이 없을 것이다.



토론토의 유이한 한인 성당 중 하나를 다녔는데 규모가 상당했다.



나도 덩달아 열심히 다녔지만 내 속은 따로 있었다.



나이가 한 두 살 먹어가며 좀 더 독립적으로 생활이 가능했을 때 즈음 성당에 참여할 수 있었던 건 모두 했다.



학생회, 복사단, 성경 공부...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내 장래희망이 신부님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냉기가 가득한 집에서 피신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성당 관련 일이라고 하면 부모가 태클을 걸 일이 없었기에 가능했다.



어쩌면 혼란스러운 시기에, 나도 모르게 종교에 의지했던 거 같다.






시간이 지나면서 부모의 사이는 점점 더 악화되는 동시에, 두 사람 모두 한인 성당에서 점점 더 멀어졌다.



좁은 한인 사회에다가, 사람 모여 있는 곳엔 항상 말 많고 탈 많고, 정치적인 이슈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



아버지는 혼자 동네 성당을 다녔고 어머니도 알게 모르게 혼자 다녔던 거 같다.



나도 방황을 하면서 점점 종교라는 것이 인생에서 아주 작은 부분만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무엇보다, 일주일에 한 번 부모가 다른 이들에게 비치는 모습과 행동들이 집에서와 정 반대되는 게 영 별로였다.



실망스러웠다.



집에서는 서로 고함에, 온갖 쌍욕을 퍼붓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성당에서는 고상한 척하는 게 삐딱해져 버릴 대로 삐딱해진 내 눈엔 역겹게 보였다.



그런데 우리 집 말고도 이런 사람들이 많지 않을까 생각했다.



한편으론 스스로의 감정을 억제하기 어려운, 그저 나약한 인간들이다.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회개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은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그런지는 모르겠다만.






한 번 성당을 멀리하면서부터 다시 되돌아가지 못했다.



그래도 부정적인 감정은 없다.



아직도 먼 길 갈 일이 있거나 큰 일을 앞두고 나도 모르게 자연스레 성호를 긋는다.



그래도 천주교라는 이 종교가 여전히 나에게 긍정적인 인상을 주는 데에는, 나에게 무조건 적인 사랑을 주었던 할머니의 영향이 제일 큰 듯하다.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keyword
이전 15화빨강머리 새엄마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