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라구와의 면담)
"내일이면 퇴원인데, 기분이 어때?"
"제가 준비가 된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괜찮을 거 같아요."
"준비가 안 됐다고 느껴지면 퇴원 안 해도 돼. 확실하게 결정 후 퇴원하렴."
"여기에 계속 있을 수는 없잖아요. 제 갈길 가야죠."
약도 꾸준히 복용했고 감정의 기복도 확실히 덜 해진 것 같았다.
간호사, 의사, 단체 상담 등을 통하여 위안도 많이 받았고 스스로 마음을 어느 정도 추스를 수 있을 만큼 성숙해졌다.
몇 주 상간이었지만, 롤러코스터 같았던 하루하루를 보낸 듯한, 모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인생 경험을 했다.
나의 다음 행선지는 청소년 쉼터.
병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며칠 전에 답사도 다녀왔다.
시설도 쾌적했고 사감 선생님들도 다들 좋아 보였다.
2 인 1실이라 적응을 잘할 수 있을지가 고민이지만 나에게 선택의 여지는 별로 없었다.
테리 형님 집에 또 얹혀살던지, 지긋지긋한 집구석으로 다시 들어가던지...
애당초 후자는 옵션에 없었고, 한편으론 새로운 곳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했다.
적응을 잘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과 걱정이 있었지만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고픈 기대가 있었다.
이곳 대부분 환자가 그러했듯, 극소수 몇 을 제외하고는 작별인사 없이 조용히 내 물건 몇 가지를 챙기고 도망치듯 퇴원 수속을 밟고 병동을 나왔다.
'나도 모르게 정이 든 거 같지만, 다시 올 일이 없었으면...'
늦은 오전, 쉼터에 도착하니 다들 점심 식사 준비에 분주해 보였다.
어떤 조는 식기 세팅 담당, 어떤 조는 뒤처리 및 청소, 어떤 조는 설거지 담당으로 나뉘어있었다.
나도 오자마자 여기저기 거들러 다녔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그래야 할 거 같아서였는데 아무도 뭐라 하지 않고 가끔 지시만 내릴 뿐이었다.
이곳 쉼터엔 현재 내가 제일 막내라고 들었다.
고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연령대가 다양했는데 그냥 대부분 다들 평범해 보였다.
물론, 이들도 각자만의 사연이 있지 않겠나.
내 룸메이트는 대학교에 다니고 있는 형이었다.
큰 키에, 푸른 눈, 금발머리, 새하얀 피부를 지닌 전형적인 백인 남성을 떠올리면 되는 비주얼이었다.
"난 조던이라고 해. 혼자 오랫동안 독방 쓰다가 심심했는데 잘 됐다! 잘 지내보자."
다행히 사람이 좋아 보였다.
특히 내 기타에 큰 흥미를 보였다.
자기도 배우고 싶어서 여러 번 시도했으나 얼마 못 가서 포기했다고 했다.
어색한 하루를 이곳에서 시작했지만 사람 좋은 룸메이트 덕에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Last smoke!"
사감 선생님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밤 9시 50분, 마지막으로 담배 타임을 할 수 있는 시간이다.
모든 흡연인들은 지정구역에서 오늘의 담배를 맛깔나게 피우고 있었다.
그러고 방으로 돌아왔다.
"야, 근데 그거 알아? 밤늦게 혹은 새벽에 담배 당기면 화장실에서 피울 수 있는 거?"
냄새가 많이 나지 않나?
"여기 화장실은 환풍기가 엄청 강력해서 가까이에 대고 연기를 내뱉으면 아무 냄새도 않나."
잠을 자려고 누웠지만 도통 잠이 오질 않았다.
고질적인 불면증을 달고 살아왔던 내가 그래도 병원에 있으면서 많이 나아졌다.
그러나 새로운 환경에 또 적응을 해야 하는지라 잠이 쉽게 오지를 않았다.
담배 생각이 절실했다.
여기 입소할 때 주임 사감 선생님 말씀이 떠올랐다.
'혹시라도 흡연 시간, 구역이 아닌 곳에서 적발되면 바로 퇴소야.'
에라 모르겠다.
화장실 불은 꺼져있었다.
그냥 끄고 담배에 불을 붙이려 했지만 불을 켜야 환풍기도 돌아가야 하는 사정이라... 후다닥 피우기로 했다.
나의 놀라운 흡입력으로 평소 5분 정도 걸릴 담배타임을 1분도 안 되어서 끝내려 할 때...
내 등뒤로 싸한 느낌을 받았다.
사감 선생님이 화장실 문을 활짝 열고 무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빼박 딱 걸렸다.
(사감실)
"별 말은 안 하겠고, 아까 오전에 알려주었던 규칙 기억나니?"
"네..."
"그럼 지금은 늦었으니 내일 아침에 퇴소해야 한다. 갈 곳은 있어? 없으면 다른 쉼터 알아봐 줄게."
대단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감정의 변화가 전혀 없는 로봇 같았다.
"이렇게 된 거 그냥 지금 나갈게요."
"지금 많이 추울 텐데... 정 그렇다면 말리진 않을 게."
그렇게 나는 이곳에서 하루를 채우지 못하고 쫓겨났다.
막상 창피한 기분도 들고 해서 부랴부랴 나왔지만... 젠장, 어디로 가야 하지?
할 수 없다.
테리 형님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또 버스를 타고...
도착했을 때 아무도 집에 없었다.
형님은 오늘도 여자친구 집에서 머무르나 보다.
형님 집구석 한편에 내 짐과 물건들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내 침낭을 바닥에 깔고 누웠다.
몇 주간 병원에 있다가 왔지만 그저 기나긴 꿈을 꾸었다가 다시 깨어난 기분이었다.
깜깜한 천장을 보면서 내가 한심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어찌 보면 그깟 담배 한 개비 때문에 모든 걸 원점으로 되돌린 셈이다.
더 열심히 잘 살아보겠다는 나의 의지와 다짐은 한 없이 약했나 보다.
누구를 탓할 것도 없었다. 내가 문제였다.
내일 아침이 안 왔으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