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도 벌써 절반이 지나갔다.
한국 같았으면 밀린 방학숙제 시작 밑 탐구 하기가 점점 더 싫어지는 '탐구생활'을 펼쳤다 접었다를 반복 중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방학도 길고, 심심해도 너무 심심할 때 가 많았다.
한국에서 몇 권 들고 온 책도 하도 읽어서 거의 다 외울 지경이었고 영어책 한 두 권도 계속 읽고 단어 찾고 하다 보니... 흠... 독해 능력은 확실히 레벨업은 된 느낌이다.
거실에서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뭔가 계속 의논 중이었다.
싸우는 건 아닌 거 같고, 계속 일정이 어쩌고, 텐트가 저쩌고, 날씨가 어쩌고, 먹을 건 저쩌고...
화장실에서 나올 때 아버지랑 눈이 마주쳤다.
"우리 여행 갈 거다."
여행? 우리가 여행을 간 적이 있던가...? 아! 기억난다. 아버지랑 둘이 강릉 주문진에 갔던 게 떠올랐다.
'그런데, 갑자기 왜? 무슨 이유로?'
가족 여행 가는 게 별 이유가 있나? 있어야만 한다. 단아함과 화목함이 쥐꼬리 정도만큼 있는 우리 집에 가족 여행이란 매우 부자연스러운 행위 일터이니 갑자기 왜 이런 결정이 내려졌는지에 타당한 근거를 알아야겠다.
"성당 누구 아저씨, 아줌마 기억나지? 그 집 식구랑 거기 아는 사람이랑 갈 거야."
아, 이제 조금 정상적이네. 우리끼리만 가는 게 이상하지 그럼.
아버지는 웬일인지 일정을 자세히 설명해 줬다.
총 2주 정도 일정으로 갈 거란다.
큰 밴을 빌려서 캐나다 동부로 쭈욱 가서 빨강머리 앤 집이 있는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주 가 최종 목적지라고 했다.
노바스코시아 주 핼리팩스에도 잠시 머무를 것이라고 들었다. 성당 아저씨 지인이 계신다고 했다.
도착지 까지는 중간중간 캠핑을 할 거란다.
심심해서 몸이 베베 꼬이는 날이 지속되어서 신날 법도 하지만 걱정부터 앞섰다.
'설마 사람들 있고 한데 싸우거나 냉한 분위기를 만들지는 않겠지?'
재미없어도 되니까 평화로이 아무 일 없이 갔다 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집 앞에 아주 커다란 밴이 도착해 있었다. 12인승 이란다. 텐트에 아이스박스, 바베큐그릴 외 다른 짐들이 많아서 허전함은 그다지 느끼질 못했다.
"요한아 인사해. 여기는 내 아들 D야. 너보다 한 살 많은 형이야. 같이 잘 지내."
D형은 나보다 한 살 많다고 했으나 두세 살은 많아 보였다. 큰 키와 나이에 비해 성숙한 얼굴과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얼굴엔 여드름이 빼곡했다. 박지성 현역 시절의 여드름도 울고 갈 만큼 울긋불긋한 얼굴이었다.
D형은 한국말을 잘하지는 못했지만 소통엔 별 문제없었다. 나도 이제 영어를 어느 정도 하는 데다가 표현이 힘들면 한국어도 섞어했다.
D형은 나에게 매우 친절히 대해 주었고 성격이나 행동을 보자 하면 학교에서도 제법 인싸에 속할 듯했다. 항상 이야깃거리가 끊이질 않았다. 차가 계속 달려도 창문 밖에 보이는 풍경은 변하질 않았다. 다행히 형과의 수다로 지루함을 씻어낼 수 있었다.
차에서 잠들다 깨서 수다 떨고를 무한반복 중 어느 캠핑장에 도착했다.
중간중간층이 낮은 호텔(모텔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할 듯하다) 도 보였지만 캠핑장이 많았다. 장거리 운전자들은 아예 캠핑 장비를 차에 실어 다니면서 쉴 일이 있으면 캠핑장을 애용하는 듯했다. 훨씬 저렴하고 자연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으니까.
D형의 가족은 텐트 치는 게 익숙한지 제법 능숙하게 텐트를 후다닥 쳤다. 나도 최근 성당 캠핑을 다녀온지라 거두는 게 익숙했다.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바베큐그릴도 준비했다.
캠핑장 주변 경치가 너무 좋아서 혼자 산책 겸 여기저기 돌아다니는데... 팔다리가 가려웠다.
'아, 모기...'
그렇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모기였다. 성당 캠핑 때는 모기보다는 벌이 문제였는데 여기는 모기가 문제였다.
생각해 보니 토론토는 큰 공원을 가지 않는 이상 모기가 거의 없다.
안 되겠다 싶어 텐트로 돌아와서 모기 기피제를 찾았다. 몇 번 뿌려 줬지만 큰 도움은 안 되는 듯했다.
아버지가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더니 건네준다. 그 유명한 호랑이 연고다.
물린데 이곳저곳 발라주니 제법 시원했다. 게다가 모기가 덜 달라붙는 거 같다.
'캐나다 모기들아. 호랑이 연고는 처음이지? 한 번 덤벼봐.'
그러고 또 캠핑장 주변을 돌아다니는데 저 멀리 아버지가 전혀 모르는, 캐나다 아저씨랑 대화(?) 하는 모습이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보아하니 역시나 모기 때문에 고생 중인 캐나다 아저씨에게 호랑이 연고를 홍보 중이었다.
말보다는 보디랭귀지로 소통 중이어서 내가 중간중간 통역을 했다.
캐나다 아저씨는 냄새는 좀 특이한데 시원한 게 좋다고 했다. 매우 흡족해하는 듯했다.
나는 D형네 텐트에서 자기로 했다. 대형이어서 나 말고 우리 식구 전체가 자도 될 크기였다.
누워서 텐트 위를 보며 멍을 때렸다. 여행 1일 차인데 한 1주일 된 거처럼 느껴졌다. 8시간 정도 차에 있었으니 살면서 차를 가장 오래 탄 하루이기도 했다.
차에서 제법 잔 거 같았지만 피로가 쌓였는지 잠들락 말락 했다. 그런데 옆에서 누가 계속 쉬지 않고 재잘거린다.
D형은 목소리가 막 크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엄청난 수다 쟁이었다. 덕분에 심심하지는 않았지만 빨리 자고 싶은 나에게는 좀 버거웠다.
그냥 자는 척을 했다. 그러고는 진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여름이라도 아침은 제법 쌀쌀했다. 식사는 차에서 대충 먹기로 하며 후다닥 떠날 준비를 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아직 반의 반도 못 왔단다. 나라가 크긴 크다.
오늘도 별일 없이 무사하기를 기도하며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