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1!"
동생 녀석과 테니스 장 앞에서 놀고 있는데 누군가 창문 밖에, 나더러 들으라고 소리를 지른다.
아버지다.
94년 미국 월드컵, 한국 독일전.
한국은 전 대회 우승국인 독일을 상대로 전반에만 3대 0이란 점수로 제대로 참교육을 당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이 아무리 홍명보, 황선홍을 보유하고 있어도 클린스만, 마테우스, 푈러에게 상대가 되긴 좀 힘들지 않은가.
전반이 끝나고 나는 실망과 허무함에 동생과 공놀이를 하려고 나왔다.
이 녀석도 한 살 더 컸다고 기본적인 패스 정도는 했다.
잠시 후 또...
"3대 2!!!!!!"
아휴, 동네 창피하게... 조용히 좀 해주세요... 그런데 독일 상대로 두 골? 설마 동점이 되겠어?
그렇다. 결과는 3대 2. 월드컵 16강은 또 다음을 기약해야 할 듯하다.
성당 복사단, 학생회 캠핑 일정이 확정 됐다. 8월로 알고 있던 캠핑은 7월로 당겨졌고 2박 3일 일정이란다.
다들 내심 3박 4일을 기대했었다고 아쉬워했다.
나야 2박 3일이든 3박 4일이든 크게 상관없다.
캠핑 당일, 커다란 스쿨버스 두 대가 성당 회관 앞에 대기 중이었다.
형들 누나들 짐을 본다.
아니... 다들 집을 나가나? 뭔 놈의 짐이 한가득이다. 커다란 산악용 배낭에, 침낭에...
그 외에도 아이스박스 여러 개, 텐트들, 겹겹이 펼쳐진 박스들... 뭐에 쓰는 거지?
나는 꼴랑 작은 책가방 하나에 겨울 담요 하나가 다였다.
다들 침낭을 챙겨 온 거 같은데... 괜히 좀, 부끄러웠다.
버스에 올랐다. 평소에 타던 버스랑 비슷했지만 훨씬 깨끗했고 냄새도 덜했다.
출발 전 기사님한테 얼마나 걸리냐고 물어봤다.
빠르면 2시간, 보통 2시간 반 정도 걸린단다.
그럭저럭 괜찮은 거리 같지만 스쿨버스의 답 없는 승차감을 잘 알기에 멀미를 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복사단에서 친해지게 된 '눈깔'형이 내 옆에 앉았다.
눈깔 형은 나보다 한 살 많았고 캐나다에서 태어난 2세다. 그런데 한국말을 전혀 어색하지 않게 구사해서 내가 영어를 잘 못하는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원래 잘 때 눈이 살짝 떠진 상태로 잘 때가 있단다. (눈이 정말 크다) 그런데 작년 복사단 캠핑 왔을 때 다른 형들이 이 모습을 보고 그때부터 눈깔이라 하더란다.
눈깔 형이랑 재잘재잘 거리다 보니 멀미 걱정은 온데간데없었고 어느덧 캠핑장에 도착했다.
우거진 숲에 둘러 쌓여 있었고 중앙에 커다란 잔디밭이 있었다.
대부분 나무 가까이 텐트를 설치했다. 그늘 진 곳이 아니면 텐트는 아침에 사우나로 변한다고...
잔디에 먼저 두터운 비닐을 깔고 박스를 잘라 넓게 펼쳤다. 아하! 박스 용도가 이거였군. 습기가 올라오는 걸 막아준단다.
텐트 치는 걸 열심히 도왔다. 실제로 텐트에서 자본적이 없다. 캠핑도 처음이다.
텐트가 완성되자 다른 한쪽은 배구 네트 설치로 분주했고 또 다른 쪽은 바비큐 세팅에 바빴다.
캠핑장에 도착한 지 1시간 정도밖에 안 된 거 같은데 벌써 숯불 향이 솔솔 나기 시작했다.
점심 메뉴는 햄버거와 LA갈비였다. 각종 반찬과 음료도 푸짐했다.
열심히 고기를 굽고 있는 복사단장 형이 명언을 읊었다.
"캠핑은 먹는 게 절반이야. 먹는 거랑 캠프파이어가 빠지면 캠핑이 아니지..."
한쪽에서는 배구를, 한쪽에서는 춤을, 다른 쪽에서는 통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를, 저 멀리에서는 족구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냥 캠핑 테이블에 앉아서 햇빛에 콜라 한 캔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나에게는 여유였지만 누군가 볼 때 그냥 멍 때리는 것처럼 보였을 거다.
이곳에 와서 다 좋은데 한 가지가 심히 거슬린다.
내가 정말 싫어하는 벌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꿀벌이다.
뭔 놈의 벌이 이렇게 많은지, 도시에서는 꽃 밭에서나 좀 보이던 게 캠핑장에서는 음료수 캔만 열었다 하면 벌들이 꼬였다.
내 콜라에도 캔을 손으로 쥐고 있지 않는 한 벌 두세 마리는 기본으로 달라붙는다.
다른 형, 누나 들은 익숙한지 별 신경을 안 쓴다. 벌이 앉아있던 콜라 캔을 집어 드니 벌이 날아갔다.
어떤 형이 나에게 썰을 푼다.
작년에 캠핑 왔을 때 벌이 콜라캔 안에 빠졌는지 모르고 들이켰다가 벌을 뱉었다고 했다. 다행히 쏘이진 않았지만...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밤이 되자 모두가 기다리던 캠프파이가 시작 됐다. 공식적으로 불장난을 해도 되는 시간이었다.
캠핑장 관계자 말로는 최근 비가 오지 않아 숲이 건조해져서 캠프파이어를 못 할 수도 있다고 하였으나 막판에 오케이가 떨어졌다. 다행이다.
캠프파이어가 펼쳐지니 또 먹거리 준비가 한창이다. 감자를 호일에 쌓아 불구덩이 안에 던진다.
하얗게 생긴 스펀지 같은 무언가가 보인다. 마시멜로...
'아, 만화에서 보던... 캠핑 오면 다들 저 하얀 걸 구워 먹던 게 이거 구나...'
미스터리 하나 해결.
그런데 이게... 굽는 게 만만치 않다. 잘못하면 겉이 홀라당 타기 때문에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처음 구운 거 치고 잘 됐다. 한 입 베어문다. 열라 뜨겁다. 또 입천정 데었다. 핫도그에 이어 마시멜로까지... 별의별 걸로 다 입 안을 덴다.
맛은, 그다지 내 취향은 아니었다.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자 대망의 하이라이트, 장기 자랑 시간이다.
춤 연습을 열심히 한 형들은 듀스의 노래에 맞춰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잔디밭에, 조명은 캠프파이어 불 빛과 플래시가 다였지만 근사한 무대를 선보였다.
누나들도 투투 노래에 춤을 추었고 통기타 노래 팀은 내가 모르는 곡들로 메들리를 선보였다.
다들 너무 잘했고 멋졌다.
이날 밤의 마지막 일정, 야식 타임.
익숙한 아이템이 눈에 들어온다.
추억의 육개장 사발면!
한국에서 먹어보고 오랜 시간 잊고 있었던 나의 최애 라면.
한 그릇 뚝딱 해치웠는데 어떤 누나가 스텐 국그릇에 담긴 회색 빛깔의 정체 모를 국물을 건넸다.
양송이 수프. 처음 먹어본다. 짭조름하고 고소한 게... 내 입맛에 딱이다. 이렇게 새로운 먹거리 레퍼토리는 계속 늘어만 간다.
캠핑에서 돌아온 다음 주 일요일, 회관에서 미사를 마치고 복사단, 학생회 형들과 월드컵 결승전을 봤다.
이태리와 브라질, 호마리우와 로베르토 바지오의 대결. 둘 중 누가 우승해도 이상하지 않을 결승전이다.
대부분 형들은 압도적으로 브라질을 응원했다.
이 중 몇몇 형들은 남미에서 살다왔기 때문에 브라질을 응원한다고 한다.
연장전에도 승부를 가르지 못한 채 승부차기에 돌입했다.
그 유명한 바지오의 페널티 실축 사건의 역사를 실시간으로 접했다.
브라질의 우승을 확정하자마자 집으로 향하기 위해 전차를 기다렸다.
브라질 국기를 흔들며 쉴 새 없이 빵빵거리는 차들이 거리를 메웠다.
'브라질 사람도 토론토에 많이 사는구나...'
한국은 역대급 더위에 난리라고 한국 신문에서 봤다.
그러나 이곳은 적당히 더웠고 밤공기가 산뜻한 건 1년 전 여름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방학이 계속 평화로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